137화
*
바로 떠나지 못했던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갑자기 떠나는 게 어디 있냐며 징징거리는 테르들도 마음에 걸렸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긴 했지만 인수인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영지 쪽 문제도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왕성 뒤뜰을 수놓은 널따란 화단과 밭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없어서.
한참이나 이불을 바르작거리며 고민하던 이엘이 결국 슬리퍼를 신고 램프를 손에 들었다. 밤이 조용한 건 그가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가 잠을 아예 포기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오늘 낮에 보았던 얼굴이 그랬다.
이엘은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 레온의 방문 앞에 섰다.
똑똑. 예의상 문을 두드리긴 했지만 레온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손을 움직여 커다란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역시나 그의 방은 스산하고 차갑기만 하다. 저 멀리 커다란 침대 위에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인영이 보였다.
“레온 님.”
“…….”
“레니. 괜찮아요?”
내일 아침이면 떠나야 하는데. 저 모습이 못내 밟혀 노아에게 억지를 부려 가면서까지 여기 남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 밤이면 끝이다. 동이 트면 당장 돌아가야 한다.
“레니.”
레온은 하얀 시트 끝을 잡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혹 신음 소리를 들으면 그녀가 찾아올까, 수건을 입에 물고 소리를 삼켰다.
아무리 우논이라고 해도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무리였다. 잠깐 잠에 빠졌는데 그새를 못 참고 악몽에 시달리는 꼴이라니. 레온은 고통으로 소리 없이 몸부림치며 제 귀를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의지했다.
이엘의 목소리는 꺼져 가는 정신력을 간신히 붙잡게 만들어 주었다. 그건, 외로움에 고통받는 자신에게 신이 내려 주신 하나뿐인 구원 줄이었다. 눈물 나게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녀는. 이러니 내가 너를 못 놓지. 숨을 들이켜며 이를 꽉 물었다.
토닥토닥. 어느새 그 다정한 손이 제 몸뚱어리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일정한 박자에 맞춰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고통이 미세하게 사라져 간다. 이상할 정도로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안정을 찾아 느려진다.
“괜찮아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
“오늘은 편하게 자요. 제가 여기서 지켜볼게요. 응?”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손수건으로 레온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친 숨을 쉬던 레온이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숨소리도 고르게 터졌다. 아픔이 죄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견딜 만큼은 된 모양이다. 안도한 이엘의 눈동자와 레온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식어 버린 금회안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옆…… 옆에 있어 줘.”
“네.”
“오늘 밤만…… 오늘만.”
“알겠어요. 얼른 눈 붙이세요, 폐하.”
벌벌 떨리는 손이 이엘의 손을 답삭 잡았다. 정말 구원 줄이라도 되는 양, 손 하나에 의지해 레온이 눈을 꾹 감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더운 열기에 이엘이 걱정스레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줄 때였다.
갑자기 레온의 방문이 무례하게 벌컥 열렸다.
“레온! 괜찮아?!”
웬 성난 늑대 하나가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문을 열었다기보다는 머리로 박살 내듯 밀고 들이닥쳤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검은 늑대는 이엘을 발견하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성큼성큼 침대까지 걸어온 노아는 이엘이 주저앉아 있던 곳의 반대쪽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하여간 고집은 진짜. 너랑 맞먹는다니까.”
노아가 이엘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제 얘기가 왜 나와요? 그녀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한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있던 쿠션 하나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곤 침대 근처 바닥에 쿠션을 놓고 누워 버렸다.
“여긴 내가 있을 테니 넌 돌아가서 자.”
“노아 님이 여기 계신다고요?”
“그래. 어릴 때도 종종 이랬어. 넌 돌아가서 쉬어. 내일 영지로 돌아가야 하니까 체력은 아끼는 게 좋아.”
“보다시피 손이 잡혔어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힌 건지, 아니면 저가 잡고 있는 건지. 하지만 애매모호한 얼굴로 배시시 웃는 걸 보니 화가 나려 했다가 다시 수그러들었다. 노아는 물끄러미 붙잡은 두 남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짜증스레 쿠션을 들고 자리를 이동했다. 이엘이 주저앉아 있던 바닥 쪽으로.
“그럼 내 옆에 누워.”
그는 쿠션을 이엘에게 밀어 주고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의 몸을 꼬리로 휘감았다. 따뜻하게 해 줄게. 다정한 노아의 음성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온의 손을 잡은 채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모로 누운 그녀의 등 뒤로 검은 늑대가 다가와 내려갔던 체온을 데워 주었다.
잘 자. 늑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엘도 눈을 감았다.
*
고통이 완전히 멎은 건 동이 트기 직전 무렵이었다. 레온은 더운 숨을 내뱉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 작은 무언가가 들어차 있었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으면 이엘의 손등에 붉게 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힘을 줬는데도 빼지 않았다는 게, 못내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상체를 들어 올리니 바닥 러그 위에 옆으로 누워 있는 이엘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붙어 있는 검은 늑대도. 노아는 언제 들어온 걸까? 살짝 눈가를 찌푸리는데 어둠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나?”
“보다시피.”
시큰둥한 레온의 대답에 노아가 속으로 웃었다. 하여간 새침하기는. 그는 금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바닥에 누워 자는 이엘을 빠르게 제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럼 오헬은 데리고 간다.”
“잠깐만. 여기 눕게 해.”
“뭐?”
“어차피 이제 일어날 시간이었어. 밖에 데리고 나갔다가 찬 바람 맞게 하지 말고. 그냥 여기 눕혀.”
역시 이상하다. 인간에게 자신의 침대까지 양보하는 레온이라니. 그것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노아의 시선을 무시하고, 레온은 시트 정리를 하고 베개까지 새로 꺼내 두었다.
“뭐 해? 눕혀.”
“너…….”
“그리고 잠깐 얘기 좀 해.”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테라스가 있는 곳으로 나가 버렸다. 노아는 레온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제 품에서 뒤척거리는 이엘을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그러곤 그 작은 손등 위에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아쉽게 떨어졌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쪽 종족은 뭐가 됐든 광활하고 큼지막하다. 발코니조차 무슨 방이라도 된 것처럼 휘황찬란하고 넓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레온이 서 있는 난간까지 향했다.
“무슨 얘기. 갑자기 또 보내 주기 싫단 소린 아니겠지.”
“이젠 나도 못 미더워?”
“그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작게 웃었다. 이 달밤에 잠도 자지 않고 얼굴을 맞대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이 있나. 서로의 영지에 잠깐씩 오갈 때도 밤에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이 함께 머무는 밤엔 꼭 누군가가 떠올랐으니까.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건 흐려진 추억을 선명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일한 아픔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닮았어.”
“누가 누굴.”
“오헬이 루나 님을.”
“…….”
“많이 닮았어.”
레온에게 루나가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제 어머니는 신을 제외한 가장 높은 존재. 가장 경외하고 가장 사랑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루나를 오헬과 견주다니.
“레온. 너……,”
“내가 다른 개체보다 예민한 거 알지?”
“…….”
“밀로란 놈이 뭔지 대충 감이 왔거든.”
역시. 모르고 보내 준 게 아니군. 노아가 이맛살을 구겼다. 책임을 늑대에게 물면 답이 없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용의 위치는 모든 이종족의 원수쯤은 되니까.
“모르는 척 넘어가 줄게.”
“도량이 넓어서 감사하네.”
노아가 속을 쓸어내리며 넌지시 웃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그림처럼 그려진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는 언제부터 네가 보호하고 있던 거야?”
차갑게 식어 버린 금회색 눈동자가 노아에게 닿았다.
“오헬도 내가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는 건가?”
“레온.”
“알겠지만 내겐 암컷이냐, 수컷이냐는 별로 큰 의미 없어. 인간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될 뿐이지.”
쓸데없이 체류가 길어져서는 아닐 것이다. 레온은 아주 예민하고 섬세해서 작은 변화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하는 자니까. 어쩌면 첫 만남에 알아챘을 수도 있고, 그의 말처럼 암수의 구별이 별 의미가 없기에 자각을 이제야 했을 수도 있다.
애당초 레온은 이 세계에 암컷과 인간 여자가 사라진 것엔 큰 관심이 없었다. 모든 이종족이 암컷에 예민해진 것과는 달리, 그의 말대로 레온은 인간과 이종족, 그 기준점만 남아 있을 뿐.
그러니 이 화제를 구태여 꺼낸다는 건.
“눈에서 안 떠나.”
“…….”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레온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언뜻 은색처럼 은은하게 보였다. 루나가 죽은 뒤로 줄곧 식어 버렸던 눈동자에 작은 생기가 자라기 시작했다.
“쟤를 보면 루나 님조차 잊어버리게 돼.”
“레온.”
“그러니까 반드시 감춰.”
“…….”
“다른 종족이 정체를 알아채고 달려들지 못하게.”
일순 행복하게 보였던 눈동자에 싸늘한 기색이 어렸다. 냉랭한 낯은 2차 전쟁 때 황성에 들어가 황제의 목을 베어 버렸던 그때와 똑같았다.
“이번엔 쉽게 죽도록 놔두지 않을 테니까.”
그건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가지 마. 응?”
“오헬!”
“가지 마!!”
“오에에―!”
아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이곳으로 떠날 때 울상을 짓던 늑대들보다 더 난리였다. 이제 가면 또 언제 오냐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비슷한 장면을 하도 많이 본 노아는 심드렁했으나 사자와 호랑이 성체들은 하나같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것들이 지체 높은 이종족 위상을 다 떨어뜨리네―라며.
테르들의 글공부는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예상했던 범위에 훨씬 못 미치는 진도였지만 그래도 아예 실패는 아니었다. 어제 엘타가 짧지만 완전한 문장을 적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테르들은 여전히 단어도 못 외웠지만.
그것만은 꼭 도와주고 싶었는데. 제대로 마무리도 못 하고 돌아가게 되어 테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이엘은 정든 새끼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며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 거야.”
“다음이 언젠데!”
“맞아. 저번에도 몰래 도망치더니…….”
“그러지 말고 여기서 우리랑 살자. 응? 우리가 사냥으로 맛있는 토끼 잡아 줄게.”
“나는 물소도 잡을 수 있어! 물소가 얼마나 맛있는데.”
“나는 하이에나를 잡을 거야. 그것들은 우리 원수거든.”
하이에나까지 나오니 이엘은 슬슬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말려야 했다. 이러다가 옆에 노아를 두고 늑대까지 잡겠다고 하겠네. 다행히 내내 불만이 가득하던 성체들이 제 새끼들을 끌고 가다시피 데리고 사라져 주었다.
노아는 슬슬 따분해진 건지 꼬리로 그녀를 툭툭 건드렸다. 결국 이엘은 저를 향해 인사하는 로와 란트에게 고개를 꾸벅하곤 노아의 등 위에 올라탔다. 올 때는 오드 덕에 빨리 도착했지만 갈 때는 전처럼 노아의 등에 타 며칠을 가야 했다. 성미 급한 노아가 열린 성문으로 돌아서려는데 레온이 그녀의 옷을 잡아 버렸다.
“조심히 가.”
“네, 폐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 번, 밀로의 일은 사죄드려요. 죄송합니다.”
“그 일은 네가 다 갚았으니 됐어.”
그의 말에 이엘이 웃었다. 이엘은 레온의 수명을 받을 수 없었고, 자신의 수명을 그에게 줄 수도 없었다. 그가 고통을 삼키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아픈데도 그는 치열하게 매일을 살아간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네.”
“그래, 그럼 됐어.”
난 여기서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우논이 인간을 언제까지나 기다린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했다. 아랫입술을 말아 깨무는 그녀를 향해 레온이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가 감췄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엘은 마음을 강하게 다잡으며 레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레온은 한참이나 잡고 있던 이엘의 손목을 느릿하게 놓아 주었다.
“신께서 함께하시길.”
모여 있던 개체 몇이 놀란 눈으로 자신들의 왕을 쳐다봤다. 왕께서 인간에게 신의 가호를 바라셨다. 저주가 아니라 가호를…….
신의 가호를 빌어 주는 행위는 경애를 동반하지 않고는 이종족 내에서 쉬이 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엘은 그의 따뜻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섧게 대꾸할 뿐이었다.
“……폐하의 영지에도 신의 축복이 넘치기를.”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신에게 버려진 이종족을 위해 신의 축복을 빌었다. 감히 바랄 수 없는 신의 가호와 축복을 서로를 향해 빌어 주었다. 레온이 애틋한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신호로 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문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문을 넘어 권역 끝을 향해 내달렸다. 워낙 넓은 땅이라 해가 기울 때까지 달려도 여전히 한복판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대화도 없이 땅을 벗어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바쁘게 달리던 다리가 레온의 권역 끄트머리 갈림길에서 멈췄다.
평소였다면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고민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왼쪽으로 난 길은 노아의 영지로 가는 최단 거리이긴 했으나 웬만해선 발을 딛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제도 쪽으로 가는 게 더 빨라서 그런가요?”
“됐어. 돌아서 가도 금세 가.”
“그래도 제도를 통과하는 게 낫잖아요.”
망국의 황녀를 등 위에 태우고 어떻게 제도를 지나치란 말인가. 독수리의 등에 타 제도의 하늘을 날아간 적은 있었지만 직접 땅을 밟는 건 다른 경우였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그 땅을 그녀가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노아로서는 무엇이 됐든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이엘은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했다. 이미 불탄 황궁을 떠날 때부터 제도는 불바다였으므로. 일그러진 세잔티노와 별반 다를 게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께서 내린 그 잔혹한 형벌의 대가를. 악의 축이 되었던 그 끔찍한 땅의 말로를.
“제도를 통해 가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