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폐하. 혹시 최근 잠을 못 주무십니까?”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일이 많이 바쁘기는 하나, 폐하의 건강을 우선으로 두십시오. 한 종족도 아니고 여러 종족을 이끄시는 폐하께서 혹 옥체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 네 종족은 순식간에 와해될 겁니다. 폐하의 몸은 폐하만의 것이 아님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후작은 아침부터 잔소리를 하려는가?”
충언을 뒤집어쓴 걱정의 표시였다. 레온은 그간 후작이 시작부터 물고 늘어지는 게 저를 못마땅하게 여겨서라 생각했지만, 최근 영지 일을 하는 동안 오히려 그 반대였음을 깨달았다. 영민한 왕이다. 충신을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러니 조금 전의 그 말 또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한 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온은 지금 작은 것 하나에도 민감했다. 걱정이든 충언이든. 제 신경을 거스르는 말에 일일이 웃어 줄 아량이 없다는 뜻이었다.
“왕이 되어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고 내 면전에다 욕을 하는 것인가.”
“폐하. 실언을 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왕의 심기를 눈치챈 후작이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갑자기 회의실 안이 싸늘해졌다. 후작이 잔소리하는 게 하루 이틀이던가. 늘상 있던 일인데 오늘따라 저희의 왕이 몹시 노한 듯하다. 이럴 땐 알아서 설설 기는 게 최고지. 모여 있던 귀족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폐하.”
다정하지 못한 왕의 눈동자가 다정한 녹안에게 닿았다.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레온은 쓰린 속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뒤늦게 자각한 제 감정에 설렜다가 좌절했다가, 하루에도 수십 번 굴곡진 기분을 체험하고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하는 건 어떨지요.”
그녀의 제안에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은근한 눈짓을 보내왔다. 아무래도 레온의 저 깐깐한 성미를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레온은 겨우 저 작은 인간의 뒤에 숨어 제 할 말도 못 하는 귀족들을 한심스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귀족들은 말 끝나기 무섭게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후작. 일어나게.”
“예, 폐하.”
“조금 전 일은 내가 과민했군. 그대의 뜻은 잘 알고 있소. 명심할 테니 그대도 잠깐 나가 바람 좀 쐬고 오도록.”
“예, 폐하. 감사합니다.”
언제나처럼 후작은 넌지시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눈치를 살피기 바쁜 자들이 모조리 떠나니 커다란 회의실엔 레온과 이엘, 단둘만 남아 버렸다.
나흘이었다. 화단에서의 고백이 있고 나흘 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
“…….”
잘 지냈냐는 그 흔한 인사조차 하기 어려웠다. 얼굴을 마주 보면 당장 귀 끝부터 홧홧해질 것만 같아서 레온은 줄곧 시선을 모로 피하고 있었다. 긴 테이블의 끝과 끝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적만 맴돌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이엘이었다. 그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나 레온의 근처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레온 님.”
“응.”
“잠 못 주무셨어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의 핀잔 섞인 말에 이엘이 발간 눈동자를 한 채 맥없이 웃었다. 그날, 풀벌레 우는 그 화단에서의 고백을 들은 그녀가 펑펑 울었다. 제 고백이 끔찍해서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끌어안는 자신의 손을 피했겠지. 제게 안겨서도 한참이나 울었다. 이유를 통 모르겠다만…….
사실 후회가 조금 밀려오기도 했다. 내 고백이 네게 아픔이 되었다면, 이 얼마나 처량하단 말인가.
나흘 동안 레온은 단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대로 잠들면 어김없이 악몽을 꿀 테니까. 빌어먹을 고통 속에 숨조차 쉬지 못할 테니까. 아픔이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아픔을 잠재웠던 달콤한 기억이, 익숙했던 고통을 낯선 존재로 만들어 버려서. 그래서 나흘이나 잠을 자지 못했더니 신경이 잔뜩 예민해졌던 것이다.
그랬는데 나흘 만에 마주한 그녀의 얼굴도 저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날 이후로 너도 잠을 못 이룬 걸까. 눈가에 피로를 잔뜩 달고 흰자위엔 붉은 핏발이 서 있을 정도였다. 레온의 이마가 좁혀졌다.
“영지 일로 피곤하면 좀 쉬도록 해. 아무도 네게 강요하지 않으니까.”
영지 일 때문이 아닌 걸 알면서. 이엘은 레온의 배려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직도 노아의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
“…….”
“거기 뭐 숨겨 뒀어? 왜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데.”
레온의 볼멘소리에 또 맥없이 웃는다. 이엘은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며 금발의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제 시선에 레온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 간다.
소년 왕의 순수한 반응은 그날의 고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 감정 표현에 있어서 솔직했다. 아, 물론 가면을 쓸 땐 아니었지만. 그 생각에 웃음이 피실 새어 나왔다.
“왜 웃어.”
“갑자기 폐하께서 가면을 쓰셨던 게 떠올라서요.”
“…….”
“왜 그러셨나 궁금하기도 하고.”
레온은 입매를 일자로 다문 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왜 그러셨어요? 이엘이 그를 놀리려는 듯 고개를 기우뚱 기울여 묻자, 레온의 귀가 다시 또 붉어지기 시작한다.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리고 자신을 떠보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인 얼굴이, 못내 귀엽기도 하고.
“내 취미야.”
“거짓말.”
“내가 거짓말을 왜 해?”
“저한텐 사촌이라고 하셨잖아요.”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못 알아챈 이엘이 바보로 보일 정도로, 허술하고 빈약한 거짓말.
“근데 너 정말 나인 줄 몰랐어?”
“네.”
“왜? 얼굴만 가렸지, 다른 건 똑같았잖아.”
“그러네요. 지금 보니까 완전 똑같네.”
“…….”
“폐하 눈이 정말 예쁘네요. 가면 썼을 때나 벗었을 때나.”
“네가 더 예뻐.”
걸러 내지 않은 말을 내뱉은 레온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저 흉물스러운 녹색 눈동자가 예뻐 보이면 말 다 한 거다. 스스로를 탓하며 한숨을 삼켰다.
감정이란 건 참 쓸데없다.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증폭되어 버려 절제가 안 된다. 그런데도 그 감정이 더없이 소중해진다는 게. 사람을 참 미치게 만든다.
이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의 눈동자를 응시하다 힘없이 미소 지었다. 다정하지 못한 왕의 다정한 눈동자. 적어도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엘은 저 금회안과 비슷한 눈동자 몇을 알고 있다. 피시가 그랬고, 노아가 그랬고.
‘난 네가 늘 그리워.’
르네가 그랬다.
‘내 마음을 다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그땐 제게 물밀 듯 쏟아지는 그의 감정이 버겁고 부담스러워 외면하기 급급했다. 부모에게조차 버려진 자신을 누군가가 사랑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치부했다. 그래서 그의 감정도 한낱 짐승의 성욕쯤으로 생각해 무시했다.
조금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였고, 그 남자라면 충분히 시간을 주고 기다려 주었을 텐데도. 이엘은 섣부르게 그를 판단해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런데도 르네는 끝까지 자신을 배려하며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알고 있다. 아비에게서 외면받았고, 어미가 저를 두고 떠났고, 언제나 주먹만 쥘 뿐 할 줄 아는 게 없는 제 어린 오라비가 그랬다. 그들에게서 사랑을 갈구해 봤자 돌아오는 건 무시와 무관심뿐이었다.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당했다. 그러니 사랑을 외면당했을 때의 그 심정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그것에 그토록 마음 아파했으면서, 자신은 르네의 소중한 감정을 무시하고 부정했다.
“감사해요.”
“뭐가.”
“제게 좋은 말씀, 좋은 감정을 주셔서.”
“…….”
“지금은 제가 폐하께 좋은 답을 드릴 만한 형편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그때도 이렇게 표현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는 하물며 자신이 과거의 황녀임을 알고 있다. 철천지원수임을 알면서도 마음을 주었다. 자신의 몸에 흉터를 새긴 것에 절절하게 후회하며 더 마음 아파했다.
그런 존재의 감정을 왜 그리 쉽게 무시했나. 그 생각에 북받쳐 며칠째 마음이 쓰렸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자신은 정말 이기적인 인간의 표상이었다.
“……노아가 좋아?”
레온이 자신 없이 물어 왔다. 생각에 사로잡혔던 이엘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로. 그녀의 대답은 힘이 없었지만 거짓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레온은 가만히 이엘을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던 두루마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네게 여유가 생기면.”
“…….”
“잊지 말고 날 찾아.”
레온이 건네는 두루마리를 의문을 담아 받았다. 그는 열어서 확인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주저하던 이엘이 끈을 죽 잡아당겨 풀어,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펼쳤다.
“내 감정은 변함없을 테니까.”
출입 허가증. 자신의 발을 묶어 두려 억지를 부려 가며 영지 밖으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막을 땐 언제고. 옥새까지 찍혀 있는 서류엔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돌아가도 좋아. 그만 돌아가.”
“레온 님.”
“짧지만 긴 시간 동안 수고했어. 영지 일 하느라, 내 비위 맞춰 주느라.”
자리에서 일어난 레온이 바로 옆에 앉은 이엘의 앞에 섰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그 동그란 이마 위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가 뗐다.
“난 여기서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