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폐하. 이건 다친 축에도 들지 않아요.”
“시끄러워. 조용히 있어. 로, 붕대를 다오.”
“예, 폐하.”
로가 공손히 건네는 붕대를 받아 그녀의 발에 둘렀다. 민망하기 짝이 없다. 겨우 발에 생채기 조금 났다고 온 동네 사람들 다 모여 구경하고 있는 꼴이라니. 거기다 누가 생채기 생겼다고 붕대를 감는단 말인가. 부끄러움에 홧홧해진 얼굴을 손바닥 안에 숨겼다. 부산을 떠는 로를 비롯해 시종장까지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다쳤다고 말 안 했어?”
“그러니까 이건…… 다친 게 아니라니까요.”
“네가 이렇게 다치면 내가 노아를 볼 면목이 없잖아.”
또 핑계를 대시네요. 그녀가 작게 비죽거리자 레온이 붕대를 감은 발을 아프지 않게 꾹 눌렀다. 안 아파요. 이엘이 볼멘소리를 내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응, 아프게 해 줘? 투닥투닥 말다툼이 몇 번 오갔다. 불퉁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레온은 소리 없이 웃으며 조심스럽게 붕대 감는 것에 집중했다.
한편 두 사람의 익숙한 말투와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란트는 놀라다 못해 입까지 쩍 벌리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우리 왕께서…… 이, 인간과……. 불쾌하기는커녕 외려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치료비 청구해.”
여기서 못마땅한 건 노아뿐인 듯했다. 뜬금없는 노아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치료비요? 이엘의 물음에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그녀의 앞에 제 손을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엘은 화가 난 듯한 노아를 뚱하게 쳐다봤다.
“노아 님. 화나셨어요? 저 걸어 다닐 수 있어요.”
“귀빈으로 보내 놨더니 이렇게 다쳐 왔는데 화가 안 나게 생겼나?”
“귀빈인지 아닌지는 내가 정하는데?”
날카로운 레온의 답변에 주변이 싸해졌다. 딱 봐도 심기가 좋지 않은 제 왕의 눈치를 살피며 하나둘 뒷걸음질 쳐 침실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셋만 남겨진 공간엔 적막만 맴돌았다.
“짐 싸, 오헬. 돌아가자.”
“돌아갈 거야?”
노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온이 치고 들어갔다. 원래는 그냥 보내 줄 생각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 불우한 처지를 동정해 이곳에 남는 건 끔찍하게 싫었으니까.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너를 이곳에 붙잡아 두고 싶다. 어떻게 해서든.
그게 네 동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영지 개발 이제 막 시작했어. 네가 다 떠맡고 있으면서 내팽개치고 떠날 거야? 그럼 나머진 누가 처리하라고?”
“그걸 왜 오헬에게 떠넘기지? 네 영지다. 그 정도는 네가 할 수 있잖아, 레온.”
“난 지금 오헬에게 말하고 있어.”
“알겠어요. 그것만 마무리 짓고 갈게요.”
“오헬!”
“어차피 그러려고 했어요. 테르들 글공부도 이제 시작 단계였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해요. 저도 계산 잘 하고 있으니까.”
이엘이 노아를 한 번 쳐다봤다가 이내 레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또 못된 눈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레온은 평소와 같은 눈동자였다. 이엘은 익숙하게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걱정 마세요. 무책임하게 돌아서는 그런 인간은 아니니까.”
그게 이 기묘한 생활의 시발점이었다.
*
“저, 저분 좀 가라고 하면 안 돼……?”
“맞아, 오헬…… 우리 잡아먹을 것 같아.”
겁에 질린 새끼 호랑이와 사자들이 이엘에게 큰 몸뚱어리를 치대며 벌벌 떨었다. 새끼들이 이렇게 덜덜 떠는 건 전적으로 참나무 아래 앉아 있는 노아 때문이었다. 불편하지도 않는지 정복 차림으로 앉아, 이엘과 새끼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아 님이 무서워?”
“다, 당연하지……!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 늑대들의 왕은 피도 눈물도 없대.”
“맞아. 그냥 닥치는 대로 다 잡아먹는다고 했어.”
“우리도, 우리도 잡아먹힐 거야…….”
끝내 렌이 흐아앙! 귀여운 소리를 내며 엉엉 울기 시작하자, 다른 테르들도 입꼬리를 내리며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양새가 됐다.
이엘은 다소 황당했다. 내가 보기엔 늑대나 너희나 다를 게 없거든? 오히려 너희가 더…… 아니, 됐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언제 들어도 저 덩치 큰 새끼들의 말은 기가 막힐 뿐이다.
결국 이엘은 새끼들을 뒤로하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늑대의 왕에게 향했다. 노아는 참나무 아래 그늘 안에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 있었다. 아무리 우논이라고 해도 근 몇 달을 바쁘게 보내느라 지칠 만도 했는데 그는 여전히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이엘은 노아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시선을 마주쳤다.
“폐하. 여기 이렇게 계실 거예요?”
“왜. 안 돼?”
“새끼들이 무서워하는데요.”
“누굴. 나를?”
“네, 놀랍게도요. 잡아먹힐까 봐 무섭대요.”
“기가 막히는군. 난 네가 쟤네한테 잡아먹힐까 봐 무서운데?”
“제가요?”
웃음이 터졌다. 이엘이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자 노아도 그녀를 따라 슬쩍 웃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엉망이 되어 버린 이엘의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 주었다.
“여기서 감시할 거야. 잡아먹나 안 먹나.”
“피곤하지 않으세요? 왕성에서 좀 쉬세요.”
“레온이 왕성 출입 막은 거 잊었어?”
“아.”
“귀빈이라면서 별관을 내주던데.”
이엘이 머쓱하게 웃었다. 레온의 왕성은 낮엔 모두에게 열려 있었지만 외지에서 온 손님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노아는 따로 별관을 안내받아 그곳에서 생활 중이었다. 물론 이엘은 여전히 왕성 손님방에서 머물고 있었고. 어째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민망했다.
“너 그 녀석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왜 너만 특별 대우를 하는 건데.”
“질투 나세요? 제게 친구를 뺏긴 거 같아서?”
“그쪽 말고 다른 쪽으로.”
“…….”
“신경 쓰이잖아. 레온이랑은 그런 식으로 꼬이고 싶지 않다고.”
노아는 가만히 이엘을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곤 제 쪽으로 살짝 잡아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저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듯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솔직히 속이 좀 탄다.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전히 노아는 그녀의 마음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저 예쁜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바보처럼 그것마저 좋아져서.
“네가 남겠다고 했으니 기다려 줄게.”
“…….”
“엘. 열심히 일하고 와. 언제든 내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커다란 손이 이엘의 뺨을 감싸 앞으로 당겼다. 하얀 뺨 위에 짧게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이 상황이 못마땅하면서도 싫은 내색 않는 노아에게 고마웠다. 해 줄 수 있는 게 웃어 주는 것밖에 없다. 다녀올게요. 그 말과 함께 빙긋 웃어 준 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끼들에게 돌아갔다.
한편 새끼들은 저 멀리서 돌아오는 이엘과 그 너머에 여전히 앉아 있는 늑대들의 왕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야? 왜 안 돌아가……? 불안한 금색, 회색 눈동자들이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헬? 노, 노아 님은 왜 안 돌아가셔……?”
“감시하시겠대.”
“감시?”
“응. 너희가 틀릴 때마다 하나씩 잡아먹겠다는데.”
뭐?! 기겁한 새끼들이 그 육중한 몸으로 통통 튀어 올랐다. 으악! 안 돼! 몇몇은 울상이었고 몇몇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 그러니까 오늘은 좀 혹독하게 공부하자. 알았지?”
이엘은 그사이 살이 조금 빠진 테르들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노아까지 온 마당에 계속 이곳에서 머무를 순 없으니 테르들의 공부와 다이어트에 박차를 가해, 근 시일 내로 마무리해야겠다.
테르들의 공부 후엔 영지 쪽 일을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노아는 아픈 발을 조심하라며 아예 늑대로 변해 그녀를 태우고 다니려 했지만 이엘은 노아와 이야기할 틈도 없이 바빴다. 어영부영 저녁 식사도 대충 해결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모든 업무가 끝이 났다. 워낙 게으른 종족들이라 달래고 어르는 게 제일 큰 고생이었다.
이엘은 별관으로 같이 가자는 노아를 돌려보내고 화단에 잠깐 들렀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레온에게 필요한 약초를 미리 심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포필렌 꽃을 비롯한 여러 약초를 사다 심어 놓았다. 부디 꽃이 잘 피기를.
“얼굴 보는 것도 쉽지 않네.”
“레니 님.”
“자, 나드가 널 찾았어.”
그의 품에서 튀어나온 나드가 헉헉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까르르 웃으며 나드를 품에 안아 올린 이엘이 새끼의 얼굴에 제 뺨을 마구 비볐다. 하루의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그사이 레온은 그녀가 서 있던 주변을 둘러보았다. 며칠 전, 이엘이 꽃을 찾아 헤매느라 엉망이 되었던 곳은 다시 복구되었다. 캄캄한 밤, 이 너른 들판과 화단을 뛰어다녔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좀 쓰렸다. 루나 이후로 처음 받는 다른 이의 호의가 기쁘면서도 속상했다. 참 기묘한 감정이다.
“……왜 남겠다고 한 거야?”
“네?”
“네가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기꺼이 돌려보냈을 거야.”
“…….”
“내가 억지를 부리며 널 붙잡았다는 걸 네가 모를 리도 없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엘이 나드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뽈뽈거리며 뛰어나간 나드를 보다가 레온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레온을 데려온 곳은 포필렌 꽃이 심겨진 곳이었다.
“저기서 필 꽃이 그때 폐하께서 드셨던 약초예요.”
“…….”
“많이 복용하시면 안 돼요. 저건 약초 중에서도 독초에 가까울 정도로 효과가 강하니까. 적당히, 정말 참기 힘드실 때 빻아서 드세요.”
차라리 미련 없이 떠나 주지. 이렇게 곳곳에 네 흔적을 남겨 놓으면 어떡해. 내가 좋아하는 곳에 네 손길을 남겨 두면 어떡해. 나를 위해 이렇게 네가 마음을 쓰면 나는…….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누군가 곁에 있는 거예요.”
“…….”
“밤마다 혼자 참지 마시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세요. 곁에 누가 있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많이 가라앉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맞다. 어릴 땐 루나가 늘 곁에서 밤을 지켜 주었다. 루나가 있는 밤은 언제나 통증이 덜했다. 마치 상쇄되어 억눌려진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성장하면서부터는 형제 같은 노아가 밤에 찾아와 자신을 지켜봐 주었다. 악몽에 뒤척이는 밤이면 노아가 그를 깨워 밤새 숲을 내달리며 놀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나서부터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왕이란 위치가 그랬으니까. 내가 누군가를 지켜 주어야 할 위치였으니까. 돌아보니 이제 정말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레온은 이엘을 바라보며 쓰린 웃음을 삼켰다.
“내 곁에 누가 있는데.”
“왜 없어요. 많잖아요. 모두가 폐하를 사랑하잖아요.”
“아니. 아무도 날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내 아비와 어미가 그들의 직계였으니 억지로 날 받아들인 거야.”
“그렇지 않아요. 폐하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젠 폐하께서도 받아들이셔야 해요.”
“…….”
“레니. 당신은 정말 성군이에요. 모두가 당신을 존경하잖아요.”
폭군인 아비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성군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백성들이 사랑하는 왕이라면, 충분히 성군이지 않을까 싶다.
달빛이 유독 아름다운 밤이다. 이엘이 레온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드를 바라볼 때였다. 레온이 그녀의 팔을 조심히 잡아 제 쪽으로 돌려 세웠다.
“넌?”
“네?”
“넌.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저도 성군이라고……,”
“아니. 그거 말고.”
“…….”
“너도 날 사랑할 수 있어?”
무슨 의미의 사랑인지 모르겠다. 이엘은 달리 말을 잇지 못하고 레온을 올려봤다. 레온의 금빛 머리가 달빛을 머금어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도 요요하게 흔들렸다. 존재감이 정말 강한 남자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널 사랑하고 싶어.”
“……폐하.”
“비록 몸이 이따위라 번식 같은 거 전혀 할 수 없는 몸이지만.”
“…….”
“그냥 그런 욕망 말고.”
“…….”
“사랑이란 감정을 모두 다 네게 퍼붓고 싶어.”
레온은 사랑받고 자라지 못해서 사랑이란 감정을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그 상대가 이엘이 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제 온 감정을 쏟아 내고 헌신해도 될 만한 존재가 오직 그녀뿐이라서.
“사랑해. 내가 널 사랑하나 봐.”
그토록 혐오하던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