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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34화 (134/488)
  • 134화

    “그건 안 돼.”

    드물게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동맹관계라는 타이틀을 차치하고도 젖형제와 같은 사이였다. 형 역할을 하던 노아가 레온에게 고개를 젓는 일 따위,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왜?”

    “이래저래 사정이 복잡해.”

    “그게 오헬을 내어주는 조건이라고 해도?”

    “레온.”

    “영지 봤지? 지금 오헬은 날 도와 영지 사업에 손을 댔어.”

    노아도 성문을 넘어서면서부터 달라진 레온의 영지에 놀랐다. 황폐 그 자체였던 땅이 활기를 되찾은 건 물론이고 곳곳에 부산스러운 공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일 놀랐던 건 무기력하기만 했던 사자와 호랑이들이 움직이고 있단 사실이었다. 믿기지 않는 현장이었다.

    이엘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겠지. 영특한 그녀는 어느 영지엘 가도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있다. 죽어 가는 독수리들을 살렸듯, 무기력한 사자와 호랑이에게도 활기를 불어넣었겠지. 그 생각에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덧입히다 보니 그 오밀조밀한 얼굴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래, 봤어. 보기 좋게 변해 가는군.”

    “그래서 그 인간이 지금 내게 필요하단 소리야.”

    “…….”

    “그냥 내어줄 순 없어. 영지 사업은 시간이 꽤 걸리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무너진 영지를 되살렸던 늑대들과는 결이 달랐다. 레온의 영지는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 그 자체였으니까. 노아는 고집스런 레온의 눈동자를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식일 줄 알았지. 그의 오랜 친우는 공과 사에 구분이 확실했으니까.

    “우리가 하이에나와 손을 잡은 건 들어서 알고 있지, 레온?”

    “그래. 전혀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하이에나란 단어가 들리자마자 레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철천지원수 같은 놈들이다. 아무리 종족 간의 문제라곤 해도 동맹관계, 그 이상의 관계까지도 이어진 제게는 언질 정도는 해도 좋지 않나. 지난 종족회의 때도 느꼈던 섭섭함이 이번 일로 더 증폭됐다.

    “하이에나들이 우리에게 건넨 것들 중에 목재나 석재가 상당히 많아. 백향목도 몇 있고. 영지 개발에 필요할 테니 아낌없이 보내 주겠다.”

    그러니 이 정도 선에서 오헬을 돌려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동시에 밀로의 존재 역시 말해 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레온은 노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시종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쪽 문을 열었다. 노아의 눈이 그곳에 박히듯 향했다.

    “오헬.”

    “폐하를 뵙습니다.”

    사나운 종족 틈에서 눈치 보며 사느라 고생깨나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녀는 낯이 좋아 보였다. 오히려 말랐던 얼굴에 살이 올라 보기 좋을 정도였다. 다만 조금 피곤해 보여 마음이 좋진 않았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네.”

    이엘은 노아의 반가운 기색에 적당히 마주 웃어 주곤 레온이 가리킨 자리에 착석했다. 참 이상한 광경이다. 둘은 형제였고 다른 둘은 모호한 관계였고 또 둘은 모호한 관계가 되려 했고.

    이엘은 오랜만에 노아의 얼굴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살이 빠져 더 날카로운 인상이 됐다. 일이 잘 해결된 건가. 걱정이 앞섰다.

    “오헬.”

    레온이 그녀를 부드럽게 불렀다. 그 다정하지 못하나 다정한 음성에 노아의 눈썹이 위로 틀어졌다. 그가 레온을 알고 처음 듣는 말투였다.

    “네, 폐하.”

    “노아가 널 데려가고 싶다고 왔는데.”

    “…….”

    “넌 어떻게 할 것이냐.”

    뭘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노아는 여전히 제 친구의 속셈을 몰라 고개를 모로 틀어 상황을 주시했다. 그야 당연히……,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노아 님.”

    “……뭐?”

    “죄송합니다. 먼 길까지 걸음해 주셨는데 실망스러운 답을 드려서.”

    “오헬.”

    “아직 영지 쪽 일도 마무리되지 않았고 테르들 글공부도 더뎌서요. 조금 더 머물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레온. 잠깐 자리 좀 비켜 줘.”

    “그래.”

    사실 레온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 갈기 때문인가 싶어서 식사할 때 넌지시 물어봤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이엘이 이곳에 남는 건 기뻤지만 억지로 남게 만드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레온은 가만히 이엘의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응접실을 나갔다.

    “나타니엘. 약 얼마나 남았어? 한계까지 몰아서 먹고 있잖아. 그런데도 여기 계속 있겠다고? 왜.”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뭘.”

    “레온 님이 연구소에서 태어난 거요.”

    침묵이 맴돌았다. 레온이 그런 것까지 네게 말했다고? 언제나 제 과거를 약점처럼 취급하던 놈이다. 자존심이 강한 레온이 인간에게 그런 이야길 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다 얘기했다고? 충격에 휩싸인 노아를 앞에 두고 이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릴 때도 밤에 잠을 못 자셨어요?”

    자신의 어미였던 루나는 밤이 되면 언제나 레온이 머물고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어린 소년은 늑대의 영지로 오던 날부터 밤만 되면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때는 노아도 어렸기 때문에 늘 문 틈새로 훔쳐보며 레온을 꺼려했다. 그런 노아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루나는 익숙하게 레온을 달래고 밤을 지켰다.

    어머니를 뺏겼다는 생각을 하기엔 그는 긍지 높은 우논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레온을 두고 질투란 걸 하기엔 자신의 위치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애써 의젓하게 레온을 대하고, 부러 형답게 양보를 했다.

    하지만 그게 너를 양보하겠단 뜻은 아니다.

    “그래서. 너도 밤마다 내 어미처럼 레온의 곁을 지키겠단 거야?”

    “적어도 완전히 나으실 때까진……,”

    “죽을 때까지 저건 못 고쳐.”

    “…….”

    “우리라고 노력 안 했을 것 같아? 타이곤의 갈기로 약을 만들었지만 효과 없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유능하다던 황실 주치의를 매수해 데려왔지만 소용없었다고. 그런데 네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대체.”

    노아도 괴로웠다. 철이 들고 나선 레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 고고하신 인간들에게 무릎까지 꿇어 가며 도와 달라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정신적인 문제와 직결되니 지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렇게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레온을 봐줄 인간들은 없었다. 레온은 연구소에서 도망친 존재였기 때문에 황실을 배척하면서까지 치료해 줄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레온은 자존심이 세다. 네가 동정하는 걸 알면 기분 나빠 할 거야.”

    “동정 아니에요.”

    “넌 아니겠지만 레온은 그렇게 받아들일 텐데.”

    고작 며칠 지냈지만 노아의 말대로 레온의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챘다. 어젯밤이야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제 간호를 받았다지만, 정신이 있을 때만 하더라도 화병을 깨뜨리며 난동을 부리지 않았던가. 호의를 동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다.

    짤막한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어젯밤의 충격적인 발작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살았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노아의 도움으로 좋아졌지만 자신도 여전히 기다란 식탁을 마주하면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여전히 커다란 옷장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몸이 좋지 않은 밤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정신적인 문제란 그런 것이다. 어쩌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괴로울지도 모른다. 그 괴로움을 잘 알고 있는 자신이 모른 척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건 둘째 치고. 우리 안부도 제대로 묻지 않았잖아, 엘.”

    노아가 지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주하자마자 쓸데없는 일로 실랑이를 벌였다. 그가 먼저 분위기를 환기하며 운을 뗐다.

    이엘은 줄곧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제야 노아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늑대들을 걱정했듯, 그도 자신을 걱정했으리라. 자리에서 일어난 노아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접어 시선을 마주했다.

    “보고 싶었어. 응?”

    애틋할 정도로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정말로, 노아는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 그녀가 보고 싶었다. 성질 같아선 하이에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었지만 하이에나와의 관계는 이엘과도 엮여 있는 사안이라 꿋꿋하게 일 처리를 하며 고통의 시간을 견뎠다.

    고작 몇 주 못 봤다며 위로하기엔 이미 감정이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너는 아닌가?”

    “보고 싶었어요. 돌아가고 싶었고.”

    “근데 발은 왜 이래?”

    언제 본 건지 이엘의 슬리퍼를 벗겨 상처투성이가 된 맨발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상처를 살폈다.

    “넘어졌어? 넘어진 상처가 아닌데, 이건. 약도 안 발랐어?”

    “괜찮아요, 폐하. 누가 보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서 조용히 기다려 주던 레온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아직도 얘기가 안 끝났냐며 물어보려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노아가 친히 무릎을 꿇고 그 위에 이엘의 맨발을 얹은 모양새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당황한 이엘이 황급히 노아의 손에서 제 발을 빼냈다.

    “괘,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야?”

    “발에 상처가 난 것 같은데. 네 성에 약은 없나?”

    “다쳤어, 너?”

    언제 다친 거지? 레온이 노아를 지나쳐 빠르게 다가왔다. 노아의 말대로 그녀의 하얀 발이 엉망진창이었다. 분명 어제만 하더라도…….

    아, 어제. 흙투성이가 된 그녀의 침의를 떠올렸다. 그 밤에 약초를 구하겠다며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된 건가. 레온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좁혔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프지도 않아요.”

    졸지에 두 남자의 관심을 받게 된 이엘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빠르게 슬리퍼를 신어 제 발을 감춰 버렸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일상의 생채기에 불과한 정도라,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정말 별것 아닌 상처였다.

    그러나 레온에겐 아니었다.

    그는 순식간에 이엘의 등과 무릎 뒤에 팔을 얹어 제 품 안으로 안아 올렸다. 놀란 건 비단 이엘만이 아니었다. 함께 들어왔던 시종장과 란트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노아 역시.

    “폐, 폐하. 저는 정말로 괜찮……,”

    “란트 경. 일전에 사 왔던 약재를 들고 오도록 하게. 시종장, 그대는 깨끗한 물을 준비하고. 노아, 넌 따라 들어와.”

    그 말을 마친 레온은 이엘을 안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시종장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준비하러 나갔고, 란트 역시 약재를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표정의 노아가 그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노아 님……?”

    “오헬이 머무는 곳이 어디지?”

    “오헬 님은 왕성에 마련된 손님방에서 머무십니다.”

    우논인 자가 인간인 이엘을 상대로 극존칭을 하고 있다. 이는 제 왕이 시키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레온이 인간을 같은 왕성에 머물게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인간과…… 같은 공간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레온에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란트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던 노아는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느껴지던 냄새를 지울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만 더 묻도록 하지.”

    “네, 폐하.”

    “오늘도 오헬이 그 손님방에서 머물렀나?”

    “…….”

    “이봐. 난 오헬의 주인이다. 네 왕과 쓸데없이 소유권 다툼 따위 하고 싶지 않아.”

    “아닙니다.”

    “…….”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폐하의 방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식사도 함께 하셨고요.”

    그제야 저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란트는 노아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마치곤 왕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응접실을 나갔다.

    “함께라고…….”

    젠장.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애써 억눌렀는데……. 어쩐지 그녀의 몸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더라니. 줄곧 늑대의 냄새로 엉겨 있던 곳에 낯선 냄새가 파고들었다. 그것도 꽤 깊게. 단순히 이곳에서 지내며 묻었다기엔 다소 짙었다. 끌어안고 자기라도 했단 말인가. 골머리를 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호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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