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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33화 (133/488)
  • 133화

    “이 약초가 통증을 억눌러 줄 거예요. 일단 먹어요. 네?”

    그러나 레온은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놀란 이엘이 레온을 흔들었지만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이엘은 빻은 꽃을 작게 뭉쳐 레온의 입 안에 넣었다. 그러나 씹기는커녕 눈도 못 뜨는 레온이 삼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레니, 제발…….”

    어떻게든 삼키게 해야 한다. 머뭇거리던 이엘은 남은 꽃을 제 입에 물고 레온의 입을 잡아 벌렸다. 맞닿은 입술이 차가웠다. 이엘은 거리낌 없이 꽃을 자신의 혀로 모아 레온의 혀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입술을 떼고 이번엔 물을 머금었다. 다시 입술을 부딪쳐 물을 밀어 주었다. 그러곤 그의 고개를 움직여 삼키게 만들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제야 힘이 빠진 이엘은 러그 위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으로 물들었던 신음 소리가 점차 작아지는 게 들렸다. 손수건을 들고 와 식어 가는 땀을 닦아 주었다. 레온은 여전히 눈을 뜨진 못했지만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퍼져 간다.

    “레니. 괜찮아요?”

    그 후로 몇 번을 더 묻고 나서야 레온의 눈이 떠졌다. 고통이 사라진 레온은 식어 버린 금색 눈동자로 이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레니?”

    “……고마워.”

    “이렇게 아프면 란트 경이라도 불러야죠. 혼자 끙끙 앓으면 어떡해요. 어디가 아픈 건데요? 이 약초는 통증을 눌러 줄 뿐이에요.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약효가 끝난 뒤에 또 아플지도 몰라요.”

    “괜찮아. 어디 아픈 게 아니니까.”

    어딘가 문제가 생겨서 아픈 게 아니었다. 지속된 실험으로 인한 후유증이었기 때문에 치료를 할 수도 없었다.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몸이 그때를 계속 기억하는 한,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할 병이었다. 하물며 그 효능 좋다는 타이곤의 갈기가 제 것인데 그것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이라면 말 다 했지.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그동안 모른 척했잖아요.”

    처음엔 꿈결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소리가 미세했고 금세 그쳤으니까. 게다가 왕성엔 레온과 자신뿐이었는데 아침이 되면 레온이 평소와 다른 게 없어서 자신이 꿈을 꿨다고 치부해 버렸다.

    죄책감 어린 이엘의 눈동자를 보던 레온이 하얗게 질린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어릴 때부터.”

    “…….”

    “태어나서부터 계속.”

    “…….”

    “연구소에서 당한 실험 때문에 이따금 밤이 되면 아파. 다 내가 나약해서 그런 거지만.”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화제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레온은 그녀의 녹안만 바라보면 뭐든 다 말하고 싶어졌다. 제 말에 정성껏 귀 기울여 주는 그 작은 온기가 고팠다. 그 온기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가만히 보드라운 이엘의 뺨을 쓸어내리던 레온이 일순 미간을 좁혔다. 별보다 예쁜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어서.

    “왜 또 울어.”

    “…….”

    “또 미안하다고 할 거야?”

    핀잔을 줄 기운도 없었다. 말없이 손등을 이엘의 눈가로 옮겼다. 그가 손으로 눈을 가려 주니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죄책감으로 얼룩져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이엘에게 레온은 지인 그 이상이 되어 버려서.

    무슨 약초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어지간히 효능이 센가 보네. 그 생각을 하며 레온이 상체를 일으켰다. 물론 여전히 머릿속은 그때의 기억으로 혼잡한 상태였지만 참을 만했다.

    레온은 러그에 주저앉아 숨죽여 우는 이엘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저 때문에 우는 눈물은 언제 봐도 아깝기만 하다.

    그는 엉망이 되어 버린 이엘의 침의를 보다가 다른 손도 그녀를 향해 뻗었다. 순식간에 이엘의 허리를 잡아 침대 위로 올렸다. 눅눅한 눈을 한 그녀가 침대가 더러워진다며 내려가겠다고 말했지만 레온이 막았다.

    얼결에 제 앞에 마주 앉은 이엘의 이마 위에 레온이 입술을 묻었다. 차갑던 입술이 온기를 되찾아 따뜻했다.

    “내 옆에서 자고 가.”

    “…….”

    “그냥 잠만 자. 다른 거 안 바라.”

    내가 불안해서 그래. 덧붙여진 그의 목소리에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그 효과 센 꽃을 입에 잠깐 담아 놓았다고 몸이 뻑뻑해진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몸이 축 늘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지듯 힘없이 무너지는 이엘의 몸을 레온이 받았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정신도 몽롱해진다. 이엘은 정신을 바싹 차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레온은 약에 취한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이엘을 제 옆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푹 자. 다정하지 못한 그의 목소리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레온은 그녀의 머리를 들어 팔베개를 해 주곤 제 품 안으로 폭 끌어당겼다.

    온기가 느껴지니 춥고 시린 가슴이 녹는다. 이대로라면 평생 침대 안에 머물러도 좋을 것만 같다.

    그건 레온 평생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

    “폐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로는 식사 준비로 꽤 바빠서 란트가 대신 왕을 깨우러 침실로 향했다. 늦잠이란 단어를 모르는 제 왕이 웬일로 오늘은 해가 떴는데도 침실을 나오지 않았다. 정말 별일이었다. 란트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불안한 생각이 든 그가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폐하!”

    “쉿.”

    금방이라도 본체화를 할 것처럼 뛰어 들어간 란트는 난데없는 광경에 입을 벌리며 멍청하게 우뚝 서고 말았다. 그의 왕은 역시나 오늘도 늦잠 따윌 자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계실 뿐이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누군가가…….

    “오, 오헬 님입니까?!”

    “쉿. 소리 죽이라는 말 못 들었어?”

    “죄, 죄송합니다…….”

    곤히 잠든 인간 소년을 품에 안은 채 자신의 왕은 요지부동이었다. 저어, 폐하. 식사는 어찌할까요……? 어쩌다 보니 조심스레 묻게 됐다. 제 눈치를 살피는 란트를 향해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식사를 챙겨서 침실로 갖고 오게.”

    “네, 알겠습니다.”

    “아, 오헬 것도 함께.”

    “이, 인간의 것도요? 제가요……?”

    “그럼 내가 갈까?”

    “아니요. 알겠습니다.”

    꼬리를 내리며 그가 문을 닫고 나갔다. 당혹감이 어린 얼굴이었다. 란트의 당황한 얼굴이 잊히지 않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레온은 상체만 일으켜 세우곤 제 옆에서 잠든 이엘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간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어제의 그 약초 때문인 건지, 아니면 네가 내 품에 있어서인지. 레온은 곤히 잠든 이엘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조금 더 자도록 둘까. 이불을 단단하게 덮어 주곤 침대를 벗어났다.

    어제 난동을 부린 탓에 침실이 엉망이었다. 우선 이엘이 실수로 밟을 수도 있으니, 깨뜨린 화병 조각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폐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시종장이 트롤리를 밀며 들어왔다. 그는 왕의 침대를 힐끔 보다가 내색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가져온 음식을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폐하. 오헬 님의 것은 어찌할까요?”

    “같이 두도록. 내가 깨우겠다.”

    “예.”

    시종장이 트롤리를 밀며 방을 나가자 레온은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련된 욕조에서 대충 몸을 씻고 가운을 입고 나왔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든 이엘을 확인하곤 편안한 면바지와 셔츠를 꺼냈다. 바지까지 다 입고 셔츠를 입으려는 찰나에 뒤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깼어?”

    “아…… 네.”

    눈을 뜨자마자 본 게 맨몸이라니. 익숙해진 것 같은데도 영 적응이 안 된다. 머쓱해진 이엘이 괜히 시선을 피하며 목덜미만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하얀 몸 위에 어울리지 않는 상처가 수두룩하게 새겨져 있던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레온의 몸을 쳐다봤다. 역시나 그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그것도 실험 때문에 그런 거예요?”

    “…….”

    “레니……,”

    “그만. 아침이나 먹자. 배고파.”

    어제 이후로 레온은 스스로와 약속했다. 더는 이엘의 앞에서 연구소 이야기 따위 하지 않겠다고.

    젖어 가는 눈동자가 더는 보기 싫었다. 웃는 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노아였다면 언제나 저 아일 웃게 만들었겠지. 그 생각에 씁쓸했다. 어떻게 자란 환경조차 난 불우한 건지.

    엉망이 된 침의를 툭툭 털곤 레온의 맞은편에 반강제로 앉았다. 이엘은 레온의 안색이 괜찮은지 살피기 바빴으나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소 딱딱한 표정이긴 했지만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수프를 적신 빵을 입에 넣으며 레온에게 말을 건네려던 차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란트 경. 내가 식사 중엔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폐하. 급한 일이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뭔데.”

    “늑대가 오고 있습니다.”

    “…….”

    “노아 님이 홀로 오고 계십니다. 이미 경계를 넘었고 곧 성곽에 도착하실 듯합니다.”

    레온은 란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시선을 곧장 이엘에게 박았다. 식사를 하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그러나 반가워하는 기색 없이 얼굴이 점차 어둠으로 물들어 간다. 나가 봐. 딱딱한 레온의 명령에 란트가 방을 나갔다. 레온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노아가 왔다는데, 표정이 왜 그래?”

    “…….”

    “오헬.”

    “노아 님껜 제가 말씀드릴게요.”

    “뭘?”

    “여기 남겠다고요.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고요.”

    어쩌면 내 불우한 환경이 네 굳건한 마음을 흔든 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레온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미소도, 좋은 표정도 짓지 못했다.

    네 마음을 후벼 파면서까지 널 붙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

    “어서 와.”

    “오헬은?”

    “다짜고짜 그 인간부터 찾는 거야? 인사 정도는 해도 좋잖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응접실로 안내받자마자 이엘의 안부부터 물었다. 노아가 인상을 쓰며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우리 쪽에서 실수가 많았어. 진작 내가 왔어야 했는데.”

    “…….”

    “밀로는 공식적으로 우리 쪽에 의탁하고 있다. 그러니 모든 건 내 책임이야. 오헬은 관계없으니 그만 풀어 줘.”

    “그게 뭔지 넌 알지?”

    “…….”

    “그거 인간 아니잖아.”

    밀로를 살려 보낸 이유가 반쯤은 그것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 인간이었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을 테지만.

    “딱 봐도 우논이야. 종족이 뭔지도 모르는데 네가 데리고 있을 리도 없고. 넌 알면서도 숨겨 주고 있는 거지?”

    “역시 네 눈을 속일 순 없군.”

    “뭔지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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