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노아 때문에 밀로가 실소했다. 그렇게 안 믿겨? 그가 되묻자 노아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밀로는 웃음을 멈추곤 어깨를 으쓱였다.
“왕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우린 땅에 발붙이고 사는 종족도 아니고 군집도 애매해서 그런 용어는 안 쓰지만, 뭐 너희랑 비교하자면 그렇지. 늑대로 따지자면 네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역시 용들은 이해할 수가 없군.”
“이래 봬도 내가 제일 제정신인데?”
다시 또 특유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유를 되찾았다. 확실히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태생이 고민을 모르고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성격인데, 근 며칠 동안은 이것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 제 성격 같아선 그냥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비꼬고 나왔을 일이지만…….
‘그래? 그럼 우리가 그 암컷 가져도 돼?’
‘…….’
‘아니면 네가 데려와, 여기로. 어때?’
인간 여자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딴 소리를 중얼거린 건지도 모르겠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엘을 절대 그곳에 데려갈 수 없다. 또 속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네 종족이 오헬에게 관심이 있다고?”
“그래, 맞아. 여기로 내려오겠다는 걸 막으려고 그런 쓸데없는 거래를 한 거야. 타이곤의 갈기를 왜 원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친 놈은 없었는데.”
그게 다른 용도가 있나? 밀로는 생각을 덧대던 것을 멈췄다. 그것들이 뭔 생각이 있겠냐마는. 분명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저를 골리려 한 짓이겠지. 하여간 구제 불능이다. 이런 말을 자신이 하는 것도 우습지만.
“아무튼 이번 일은 내 잘못이야. 그냥 갈기를 잡아 뜯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건 전적으로 이엘 때문이었다. 이엘과 함께 지내며 제 마음이 좀 이상해져서. 잠든 꼬마 타이곤을 보고 있으니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이 생겨 주저했던 것이다. 게다가 꼬마 놈이 꼭 누구를 연상하게 해서…….
마치 이엘에게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새끼들에게 약해져 버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튼 하이에나 일은 마쳤으니 내가 오헬을 데리러 다녀올게.”
“네가 또 가면 레온이 널 용서하겠나? 이번엔 내가 간다.”
“알겠어. 이번엔 왕, 네가 좀 데려와.”
웬일로 순순히 물러난다. 어쩌면 영리한 이엘이 밀로의 성격을 누르기 위해 부러 자처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노아는 밀로에게 그만 돌아가란 말을 남기고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편지였다.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 이후엔 늑대와 하이에나의 걱정이 주를 이뤘다. 아무래도 노아가 그쪽 영지에 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쪽 일이 꼬인 것을 걱정한 모양이었다. 하이에나의 일을 처리하고 오늘 새벽에 영지에 도착했다. 안드로는 노아를 맞아 주며 이엘에게 도착한 편지를 건넸다. 덩달아 레온의 편지도 함께 도착해 있었다.
「네가 직접 와.」
짧고 강렬한 한마디였다. 한참이나 편지를 쳐다보던 노아는 의자에 걸쳐 놓았던 제복 망토를 집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직접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
“춤은 젬병이라고?”
“꼭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진……. 레온 님은 어떠신데요?”
“뭘 해도 너보단 낫겠지.”
하긴 행동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묻은 귀공자 같은 태도만 봐도 알겠다. 이엘은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르쳐 줄까?”
“르네 님한테 배웠어요.”
“르네? ……독수리? 너 그 남자랑도 아는 사이야?”
“전에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보다 이것 좀 도와주세요. 사다리 같은 게 안 보여서.”
손이 아주 조금 모자랐다. 까치발을 들어 빈 책장 틈에 책을 꽂으려고 했으나 손이 아주 조금 모자란다. 버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이 고개를 흔들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손에서 책을 뺏어 대신 책장 틈에 집어넣었다. 덕분에 책장과 레온의 가슴팍 사이에 갇힌 이엘은 바짝 긴장을 해야 했지만.
레온은 인간 여자치고는 큰 편인 이엘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창문 새로 들어오는 봄바람에 귀엽게 살랑거렸다.
“싹이 났던데.”
“맞아요. 어제 확인하니까 조금 자랐……,”
“다 뽑아 버릴까.”
“…….”
“아니면 수로 공사를 망쳐 버릴까.”
못된 소리를 또 하네. 이젠 이엘도 레온의 심술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수준이 됐다. 그녀는 제 목덜미로 느껴지는 레온의 숨결에 입술을 깨물더니 등으로 그를 조금 밀어 냈다. 그러곤 완전히 돌아서 레온을 마주했다.
“그럼 화낼 거예요.”
“…….”
“또 장미 종자 훔쳐서 도망칠 거야.”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협박 전문가인 레온의 일그러진 눈썹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머쓱해진 이엘이 뭐라고 둘러대기도 전에 레온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기더니 이엘의 어깨 위에 이마를 묻었다. 지친 숨이 이엘의 목을 간지럽힌다.
“피곤해. 좀 쉴래.”
“그럼 침실로 돌아가셔서……,”
“아직도 고민해?”
“…….”
“내 갈기 준다고 했잖아.”
“폐하.”
“내가 수명을 깎아 가면서까지 주겠다는데, 왜 싫어? 네 동생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
“내가 준다니까.”
잠에 취한 듯 레온이 웅얼거렸다. 이엘은 그의 등을 손으로 다독거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 제안이 끌리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자신도 갈기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
눈이 번쩍 떠졌다. 오늘도였다. 오늘도 이상한 소리가…….
역시 환청이 아니었다. 이엘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램프를 들고 문을 열었다. 미세하게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추운 복도를 지나쳤다. 인기척이 전혀 없는 왕성이었다. 이엘은 무작정 걷던 걸음을 멈추고 위층을 올려봤다.
빠르게 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은 레온의 침실이었다. 그녀는 주저하던 손으로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신음 소리가 노크 소리에 완전히 멎었다.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문부터 벌컥 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더운 숨이 엉켜 있었다.
“레니!”
“……나가.”
“괜찮아요?”
“나가란 말 안 들려?!”
레온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침대에 웅크린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엘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했지만 화병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져 버렸다.
“가까이 오지 마. 꺼져, 제발…….”
“레니.”
“인간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 제발 나가,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아.”
이렇게 약해 빠진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다. 허약하고 모자란 모습은 그만 보여 주고 싶었다. 레온은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운 작열통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약한 모습은 보여 주기 싫어서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약은 먹었어요?”
“나……가라고…….”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왜 이렇게……,”
“제발 좀 꺼져!”
침대 근처까지 온 이엘의 손목을 억세게 잡아 홱 내쳤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레온은 한 번 더 고함을 지르려다가 또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삼켰다. 몸을 둥글게 말고 엎드린 채 고통을 참는 레온을 보며 이엘이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라, 란트 경을 불러 올게요.”
“조……금만 버티면…… 괜찮아져…….”
버틴다고? 저렇게 두었다간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우논이 영존하기는 하지만 죽지 않는 건 아니었다.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하면 속절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야, 약 없어요?”
“없어. 괜찮으니까 네 방으로 돌아가, 좀.”
“뭐가 괜찮아요?! 그렇게 아파서 숨도 못 쉬면서!”
“…….”
“기다려요. 제가 약초를 찾아올게요. 알았죠? 조금만 버텨요, 레니.”
얕보이는 게 싫어서 밤이 되면 모두를 내쫓았다. 아픈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기 싫어 꽁꽁 감췄다. 어떤 날은 잠드는 게 무서워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수도 없이 받은 실험의 후유증은 평생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만들었다.
레온은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삼키지 못한 채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100까지만 세고 있어요. 알았죠?”
“뭐……?”
“금방 올 테니까, 1부터 100까지만 세고 있어요. 응?”
마치 옷장 안에 갇혀서 유모가 열어 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던 제 어린 시절처럼.
이엘이 땀에 젖은 레온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웃어 주었다.
“곧 올게요.”
처음으로 레온은 제가 아플 때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방을 나간 그녀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웃기지도 않는 숫자 놀이를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새벽은 기온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나 얇은 침의만 입고 나온 이엘은 차가운 밤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급하게 달리느라 슬리퍼가 몇 번이나 벗겨져 발바닥에 흉터가 하나둘 생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엘은 화단을 뒤지며 며칠 전에 보았던 꽃을 찾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소매를 걷었지만 이미 흙투성이였다. 게다가 흙을 파헤치느라 기껏 가꾼 화단까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꽃을 피우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예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꽃을 찾아 헤맸다.
꽃의 종류를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꽃은 워낙 효능이 강해서 어릴 적에 책 너머로 잠깐 봤음에도 뇌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정성을 들여 가꾼 화단엔 원치 않았던 손님이 몇 찾아왔는데, 그 꽃도 일종의 그런 존재였다. 어디선가 날아와 숨어들더니 다른 꽃의 양분을 쪽쪽 빨아 빠르게 자랐다. 그냥 놔두라는 레온의 말을 듣길 잘했네. 조급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이엘의 눈이 한곳에 멈췄다.
“찾았다!”
포필렌 꽃은 진통 효과가 상당히 큰 꽃이었다. 인간이 함부로 오남용했다간 그대로 약에 취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정도로. 약초는 제대로 알아 둘걸. 이종족에게도 효과가 통할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배운 책엔 이종족을 위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발이 부서져라 뛰어 왕성으로 돌아왔다. 벅찬 숨을 가다듬고 방에 들러 세숫물에 손을 깨끗이 닦았다. 그러곤 꽃을 작은 볼에 담아 곱게 빻았다. 레온의 침실로 가는 길이 유난히 추웠다. 혼자 생활하는 르네의 왕성도 이 정도로 춥지 않았는데, 레온의 왕성은 추운 걸 넘어서 스산했다. 이런 곳에선 멀쩡한 사람도 병이 들 것 같다.
“레니. 저 왔어요. 괜찮아요?”
“…….”
“레니?”
“542까지 셌어…….”
그가 몸을 잔뜩 만 채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이엘이 안도했다. 이엘은 우선 레온의 커다란 침실 곳곳에 놓인 초에 불을 밝혔다. 그러곤 꺼져 가는 화로에도 장작더미를 넣어 불을 더 지폈다.
그러는 새에 다시 레온의 신음 소리가 커졌다. 황급히 레온에게 향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레온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오지 마……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