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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31화 (131/488)

131화

“너,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해?”

“렌이 종이를 날려 버려서요. 지금 찾는 중이거든요. 혹시 보셨어요?”

“못 봤는데.”

“분명 여기 어디로 떨어진 것 같은데…….”

저 멀리서 테르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레온을 발견하고 알은체를 해 올 게 빤했다. 그러면 그간 불편한 가면까지 뒤집어쓰며 정체를 숨긴 의미가 없어지질 않는가. 레온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

“이 근처…… 앗!”

덩굴에 다리가 엉킨 이엘이 순간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레온이 그녀의 팔을 잡아 품에 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넘어진 레온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제 몸 위에 올라탄 작은 형체가 느껴져 움찔거렸다.

“오헬?!”

“거기 있어?”

시끄러운 소란에 테르들이 되레 더 몰렸다. 레온은 빠르게 이엘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품 안으로 바싹 끌어안아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덩굴 쪽으로 굴러 그늘에 몸을 완전히 숨겼다. 테르들은 대충 훑어보다가 다시 다른 쪽으로 이엘을 찾아 떠났다. 레온은 예민한 귀를 세워 새끼들이 사라질 때까지 소리를 죽였다.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을까. 레온은 문득 제 손등에 닿는 차가운 촉감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녀의 손이 제 손등을 덮고 있었다. 어느새 의문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마주 닿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새하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게…….”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기분에 레온은 말을 하려다 말고 제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도무지 무슨 말로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바보라도 된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서부터 막혔다.

“저기, 레니 님……? 저 좀 놔주시겠어요?”

먼저 정신을 차린 이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레온이 아아! 소리를 내며 부산스럽게 이엘에게서 떨어졌다. 다행히 테르들은 저 멀리 사라진 뒤라 정체를 들키진 않았다. 서둘러 먼저 일어난 레온은 여전히 바닥에 넘어져 있는 이엘을 바라보았다. 상체만 일으켜 옷을 터는 그녀를 향해 주저하던 제 손을 내밀었다.

‘레니. 언제나 암컷에겐 다정하게, 그리고 매너 있게 행동해야 한다.’

왜 갑자기 루나의 그 말이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이미 귀 끝이 달아오르다 못해 뜨거워진 레온은 이를 사리물었다. 루나에게 배운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그녀를 여자로 인식했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그의 손을 냉큼 잡고 일어선 이엘은 나머지 제 옷도 마저 털었다. 그 모습을 레온은 주시하고 있었다.

“오헬.”

“네?”

“…….”

사람을 불러 놓고 말이 없다. 이엘은 옷을 털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레온을 쳐다봤다. 서너 걸음 떨어져 있던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넌 어떻게 살아남았어?”

“…….”

“그때 분명 우리가 다 죽였는데.”

뜬금없는 진지한 물음이었다. 뭉뚱그려 묻는 물음이었으나 속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걸까? 이엘은 진지한 금회안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밝힐 필요는 없지.

“도망쳤어요. 어린 남자아이는 살려 주던데요. 비록 광산으로 던져졌지만.”

“어린 남자아이? 네가?”

“네.”

“…….”

“새끼들이 기다릴 테니 저는 먼저……,”

“노아도 알아?”

갑자기 그의 입에서 노아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노아? 한 종족의 왕을 다소 친근하게 불렀다. 이곳의 왕과 사촌 관계이니 왕의 친구인 노아와도 가까운 사이인 걸까? 여전히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엘은 섣부르게 답하지 않고 가만히 레온의 눈치를 살폈다.

레온은 피곤한 듯 마른세수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왜 저 아이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 뒤로 노아의 그림자가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네 비밀 말이야. 노아도 아냐고.”

“제 비밀이요? 전 비밀 없어요. 노아 님껜 다 말씀드리는 편이고요.”

“…….”

그녀가 대답을 회피한다는 걸 느꼈다. 당연했다. 짧은 기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건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제게 마음을 열었을 리 없다. 자신은 그날 밤에 모든 걸 열어 보였지만 이엘은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을 ‘아는 지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귀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질척거리며 지저분하게 구는.

그 생각까지 하니 레온은 온몸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루나 님이 암컷에겐 언제나 다정하고 매너 있게 행동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건 암컷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피식 헛웃음을 지은 레온은 이엘을 향해 뻗으려던 손을 거두고 등 뒤로 숨겼다.

“가도 좋아. 다음에 보자.”

“레니 님.”

“어. 왜.”

“전에 부탁드린 편지는 잘 갔나요?”

그렇지 않아도 로를 통해 급하게 편지를 보냈다. 기껏 불러 놓고 물어보는 게 또 노아의 편지라서, 레온은 저도 모르게 실망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위로하듯 건넨 그 한마디에 이엘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뭘. 별것도 아닌데.”

“저한텐 그게 전부예요. 크게 바라던 일인걸요.”

그래.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충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레온은 자꾸만 공허한 느낌이 드는 제 마음을 탓하며 무심하게 그녀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만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이엘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조금 전 그들이 누워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주웠다.

그녀의 손에 검은 가면이 들려 있었다. 천연덕스럽게 흙을 잘 털어 레온을 향해 건넸다.

“폐하.”

“…….”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멍청하게 눈이 어두워져 사위 분간도 못 했다. 정체 숨기자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는데. 이젠 쓰나 마나 소용이 없어진 가면을 받으며 실소했다.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제멋대로다.

“눈치챘었어?”

“아뇨. 전혀요. 방금 알았어요.”

그래, 넌 나한테 별 관심이 없으니까.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작은 일에도 실망과 서운함이 스며든다. 불필요한 감정이 자꾸만 생겨난다. 왕답지 못하게, 감정 따위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오헬, 그렇다고 해도 네가 돌아갈 수 있는 건……,”

“이제 불편하게 가면 쓰고 식사하지 마세요.”

“…….”

“전 레니, 아니…… 레온 님을 존경하고 좋아하니까요. 폐하께서 불편하신 건 싫어요.”

반칙이다. 너는 언제나 입만 열면 예쁜 말만 해. 미운 말, 나쁜 말만 듣고 자란 내 귀에 언제나 달고 예쁜 말만 해.

“제가 존경하는 레온 님이 레니, 당신이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

“제게 잘해 주셔서 감사해요, 폐하. 그러고 보면 폐하는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제게 큰 도움을 주셨네요.”

이러니까 내가 자꾸 나쁜 심술을 부리고 싶어지는 거다. 이게 다 네 말이 예뻐서.

네가 예뻐서.

“폐하. 그러니까……,”

“네 동생이 타이곤의 갈기가 필요하다고 했지?”

“……네? 아, 네…….”

밀로와 갈기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이엘은 하던 말을 꾹 누르고 마른침을 삼켰다. 갈기 이야긴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내 갈기를 줄게.”

“폐하?”

“대신 너는 내 영지에서 함께 지내.”

“…….”

“앞으로 평생.”

그건 내 수명을 줄 테니까 너는 네 수명을 내게 달라는 의미였다.

*

“네가 아무리 멋대로 구는 용족이라고 해도 타이곤의 갈기를 훔치려 하다니. 제정신이냐?”

“…….”

“말해. 대체 뭔 생각으로 그걸 훔치려 했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밀로는 꽤 지친 얼굴이었다. 언제나 기세등등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눈 아래가 거뭇거뭇할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닦달하는 노아와 말이 없는 밀로를 번갈아 쳐다보던 앤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제 왕을 붙잡으려 할 때였다.

“잠깐 다 물려. 둘이 얘기하고 싶어.”

답지 않게 다소 진지한 목소리였다. 노아는 그의 청대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늑대들을 제 집무실에서 전부 물렸다. 앤디도 떨떠름하게 밀로를 쳐다보다가 테르들을 챙겨 문을 닫고 나갔다.

늘 북적대던 왕성에 적막이 찾아왔다. 이제 이야기해 보라는 듯 노아가 싸늘하게 노려봤다. 밀로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서둘러 이엘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며 도망쳤다던 턱수염을 수색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약아빠진 하이에나들은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엔 분명 턱수염 하나만 잡으면 된다고 했으나 도중에 말을 바꿨다. 도망친 놈들이 꽤 여럿 있다며, 같잖은 협박까지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그녀를 그 위험한 곳에 방치해 버렸다. 밀로는 다급한 숨을 꿀꺽 삼키며 마침내 무겁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놈들이 오헬의 정체를 알아차렸어.”

“놈들이라니?”

“내 종족.”

“…….”

“거래를 해 왔어. 타이곤의 갈기를 갖다 달라고.”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노아는 팔걸이에 올리고 있던 손을 거두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용들이 알았다고……. 지금 저 통제 안 되는 용 한 마리도 힘든데, 다른 용들까지 알았다고.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뭘? 오헬이 여자라는 거?”

“……그래.”

“처음 만나자마자 알았어. 말했잖아, 난 인간 남자 따위에 관심 없어.”

“…….”

“조금 더 일찍 돌아갔어야 했는데.”

밀로도 복잡한 심정이었다. 용들은 원래 다른 종족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종족에게도 관심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 둔 것도 아닌데 왜 자신을 찾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때가 된 것도 아닌데.

덕분에 위에서 다 지켜봤단다. 제 소중한 존재가 암컷이란 걸.

“그럼 설마…… 네가 왕이야?”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밀로를 쳐다봤다. 용은 완벽하게 독립적인 개체로 생활한다. 같은 종족이라 할지라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런 용이 하찮은 인간 따위에 관심이 생겼다고?

그렇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저놈 때문이란 소리가 된다. 밀로의 주변에 이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용들이 밀로를 주시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 테지. 그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니까. 알려진 바는 적으나, 그들에게도 무리의 리더는 중요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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