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30화 (130/488)
  • 130화

    서툰 욕심으로 협박을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 레온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약점이 그런 거라면 건드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 약점은 레온에겐 하등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게 네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이라면 내가 왜 그걸 폭로하겠어. 그녀의 약점이 된 순간부터, 동시에 제 약점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을 붙였다.

    “다만 네겐 다른 약점도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레니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곳에 함부로 침입했다는 네 동생.”

    “…….”

    “넌 그게 뭔지 모르지?”

    이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산 넘어 산이었다.

    “그게 늑대들에게 해가 되는 존재일 수도 있는데.”

    “레니 님.”

    “보아하니 너도 그게 인간이 아니란 건 알고 있는 모양이고.”

    레온의 퉁명스런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이엘은 레온의 협박 아닌 협박에 입을 굳게 다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자신도 모르는 밀로의 정체를 그가 알았다. 아닌 척했지만 못내 불안했다. 그의 말대로 밀로의 정체가 늑대들에게 어떤 화를 불러올지 몰라서.

    그런 이엘의 표정을 고스란히 읽은 레온은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역시…… 네겐 이딴 식의 사냥이 내키지 않아. 그는 결국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늑대들에게서 아무 연락도 없다며?”

    알면서도 제 아픈 구석을 후빈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프를 휘저었다.

    노아는 할 일이 아주 많은 왕이었다. 패티스의 잔꾀에 걸려 그쪽 일을 수습하느라 그도 꽤 고생을 하고 있겠지. 그의 성질 같아선 진작 찾아왔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는 건 그쪽 일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폐하께선 바쁘시니까요.”

    “널 잊은 건 아니고?”

    레온은 제 성질이 고약하고 더럽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론 고고하고 우아하지만 제 속은 말도 못하게 꼬여 있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이렇게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러니 노아마저 자신에게 성질 좀 죽이라고 말하지.

    “노아 님이 절 잊고 살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응. 난 그걸 원해.”

    “…….”

    “그러면 그게 또 하루, 네가 여기 머물 이유가 되겠지.”

    정말 자신이 돌아가지 않길 바라는 건가. 이엘은 자신을 모호하게 바라보고 있는 레온의 금색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보았다. 말은 협박 비슷한 투였지만 그의 눈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온의 눈동자는 그 어떤 호의도, 관심도 없어 보였다. 말 그대로 모호했다.

    “말씀드렸지만 꽃을 피우면 저는 폐하의 허락하에 여길 떠날 거예요.”

    “…….”

    “레니. 저는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이라도 친밀한 관계라면……,”

    “기가 차네.”

    “도와주세요, 레니.”

    저 아이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는 레온도 알고 있다. 처음 봤을 때도 바득바득 이를 갈며 씨앗을 받아 돌아가겠노라 말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자신이 그녀의 발을 불로 태웠어도 제 손을 잡고 왕의 창고로 향했다. 그런 아이였다.

    레온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마음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만큼은 알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널 살게 만드는지, 너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센 건지.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린 레온은 취향도 아닌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이번에도 내가 폐하를 저버리고 너의 탈출을 도와 달라?”

    “이번엔 탈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타박했다. 언제까지 자신을 씨앗 도둑으로 생각할 건지. 약간의 불퉁함이 섞인 얼굴을 보며 레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역시 보내 주기 싫다. 타는 목을 축이려 잔을 입에 붙였다. 자꾸만 갈증이 났다.

    “폐하와의 거래를 당당히 성립하고 제 발로 나갈 거예요.”

    “…….”

    “그러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달라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또.”

    이엘이 꼬물꼬물 손을 움직이며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니와는 문제가 생기고 싶지 않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처음 올 때와 다시 왔을 때 모두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엘은 레니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관계가 틀어지는 건 싫었다.

    “그럼 내게도 뭔가 부탁해 봐.”

    “네?”

    “또 알아? 네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도움을 줄지.”

    “…….”

    “네가 씨앗을 훔쳤을 때처럼. 내가 공범이 되어 줄지 누가 아냐고.”

    ……정말로 그래 줄 것처럼. 이엘은 입을 꾹 다물고 선연한 레온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서로의 속내를 파헤치려 시작한 눈싸움이었는데 얼마 가지 못하고 레온이 먼저 피해 버렸다.

    “일단 지금은 식사부터 해. 약 먹으려면 속이 비어선 안 되잖아.”

    귀 끝이 얼얼할 정도로 뜨거웠다. 이상하게 저 기분 나쁜 녹안이, 기분 나쁘지 않다. 몹시…… 몹시 좋았다. 그 눈동자가 제게 향하는 게,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몹시 좋았다.

    생소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취향에도 없는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노아 님께 편지라도 하나 보내고 싶어요.”

    ……그런 부탁일 줄 알았다. 씁쓸한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역시 어려울까요? 오가는 게 쉽지 않을 테니…….”

    “그게 뭐가 어려워. 날 무능한 사람 취급하는구나, 너.”

    “아니요. 제겐 그것도 어려운걸요. 그렇지 않아요, 레니 님.”

    “내가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부탁이 겨우 그거야?”

    그녀는 자신을 왕의 사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적어도 제게 왕을 독대할 권한이 있다는 것쯤은 알 텐데 부탁이라고 하는 게 고작 저런 거라니.

    어쩐지 힘이 빠졌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다면 왕께 말씀 좀 잘 부탁드린다고, 그리 말할 수도 있는 건데. 저 똑똑한 아이가 그런 청탁을 하지 않는다.

    정말 나를 무능하게 생각하는 건가.

    “겨우가 아니에요.”

    “…….”

    “지금의 제겐 그게 큰 부탁이에요.”

    “…….”

    “노아 님과의 연락이 절실해요. 그래요. 레니 님껜 숨기고 싶지 않으니까 다 말할게요. 말씀하신 대로 늑대들과 연락이 단절됐어요. 그래서 불안해요. 그들이 절 잊어버린 건 아닐 거예요. 그렇다면 제게 연락도 못 할 정도로 무슨 사정이 생긴 거겠죠. 그게 저는 불안한 거예요.”

    아, 그런 건가. 그게 ‘겨우’가 아니었던 건가.

    “노아 님의 답이 필요해요. 너무 불안해서…… 걱정돼서요. 뭐라도 듣고 싶어서.”

    “…….”

    “그거면 충분해요. 그거면 괜찮을 것 같아요. 정말…… 그거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레니 님.”

    그건 네게 큰 부탁이었던 거야. 그가 네게 큰 존재여서.

    이번에도 노아에게 진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노아의 낙승이었다. 레온은 어릴 적부터 부러워했던 제 친구를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

    “아니, 틀렸어. 이게 답이야.”

    이엘이 글자가 적힌 종이를 손으로 흔들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새끼 사자가 괜히 툴툴거리며 발을 땅에 굴렀다. 사자의 발이 지나간 자리가 움푹 패여 있었다. 제 딴엔 좀 귀엽게 봐 달라며 투정을 부린 행동이었으나 그 앞발에 인간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맹수는 맹수구나라는 생각을 덧대며.

    “아아―!”

    사자의 뒤에 서 있던 엘타가 으스대며 사자를 밀쳐 내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엘은 우등생인 엘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바닥에 내려놓았던 레버를 태엽을 감듯 몇 번 돌렸다. 동시에 테르들의 시선이 모두 하늘을 향했다.

    이엘이 테르들의 글자 공부와 다이어트를 위해 특수 제작한 장난감이었다. 높게 솟은 나무들에 줄을 감아 동그란 원을 만들어 그 아래 글자가 적힌 종이들을 매달았다. 이엘이 레버를 돌리자 종이들도 펄럭거리며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엘타는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돌아가는 종이들에 매서운 시선을 박았다.

    “모음을 찾는 거야, 엘타.”

    펄럭거리는 종이들 중 모음은 한 개였다. 자음 속에서 모음을 찾기 위해 호랑이의 눈이 섬광처럼 번뜩거렸다. 순식간에 펄쩍 뛰어오른 엘타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던 종이 중 하나를 입으로 홱 낚아챘다. 사뿐히 바닥으로 떨어진 엘타가 큰 눈을 반짝이며 이엘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정답이야, 엘타. 아주 잘했어.”

    사실 엘타에겐 난이도가 다소 낮은 편이긴 했지만, 어쨌든 칭찬은 교육에 필수 요소 중 하나이니. 이엘이 엘타의 입에 생고기 하나를 넣어 주었다. 엘타가 냠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다른 테르들이 부럽다는 듯 쳐다봤다.

    “엘타는 이미 글자를 다 배웠잖아! 우리랑 다르단 말이야!”

    “맞아! 이건 불공평해!”

    “불공평해!”

    하나가 불만을 표시하니 기다렸다는 듯 나머지도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엘타는 잠깐 쉬고 우리끼리 하자. 대신 이번엔 벌칙도 추가할 거야.”

    “벌칙이라니……?”

    “틀리면 저기 보이는 도토리나무까지 달렸다가 돌아오는 거야. 알았지?”

    “너무 멀어!”

    “가기 싫으면 맞히면 되잖아. 그치?”

    이엘이 적당히 달래자 테르들이 입을 꾹 닫았다. 이엘과 노는 건 무척 재미있지만 최근 들어 체력이 부쩍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뭐라고 반박할 새도 없이 그녀가 레버를 돌리며 다음 게임이 시작됐다. 바싹 긴장한 얼굴로 테르들이 이엘을 향해 귀를 쫑긋거렸다.

    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레온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애완동물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기분이 나쁘다고 표현하기엔 테르들이 너무 즐거워 보였다. 되레 문제를 내는 그녀가 더 지쳐 보일 만큼.

    레온은 멍하니 이엘을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에 닿아 흩날렸다.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별을 갖다 박은 것처럼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눈이 부셨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레온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끔찍한 흑발과 녹안이, 왜 저렇게 예쁜 건지 모르겠다. 질겁할 정도로 싫어하던 조합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바보 같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인간을 감싸고돌던 노아를 어리석다고 평하던 자신이었는데…….

    어쩌면 노아도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알고 있기에 줄곧 숨겨 왔던 건 아닐까.

    일순 그런 못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비밀을 노아는 몰랐으면 하는. 그러다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버린다. 갈수록 바보 같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레니? 거기서 뭐 하세요?”

    수풀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이엘이 튀어나오자 레온이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언제 온 거야?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가면을 등 뒤로 홱 숨겨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