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이렇게 고통받았을지 몰랐다. 이종족들이 연구실에서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건 책 너머로 배웠지만, 솔직히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그래서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겨 버렸는지도 모른다.
연구실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괴로웠으면서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이 아니었으니 함께 슬퍼하진 못했다.
그는 타이곤이다. 자신이 그토록 찾으면서도 찾기 싫었던 타이곤이, 레니였다. 이엘은 이 영지로 들어오면서부터 잊고 싶었던 진실과 매 순간 마주쳐야 했다. 이온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타이곤의 갈기. 그걸 얻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그걸 알면서도 잊고 싶었다. 독수리의 눈알이 그러했듯, 그것들은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는 지금 제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정말 악마로구나. 저를 이용해 이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려는 끔찍한 존재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건 어떤 것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자신의 역겨운 욕심이었다. 천칭이 어느 쪽으로도 기우는 게 싫어, 아득바득 무게를 재지 않는 이기적인 욕심.
“오헬.”
축축하게 물기 묻은 울음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깼다.
이상하다. 분명 우는 건 극도로 싫어하는데, 그것도 인간이 우는 건 혐오 그 이상으로 싫어하는데. 레온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것처럼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렸던 제 감정이, 다시 돌아와 그 자리에 천천히 쌓여 가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빼곡하고 치밀하게.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 그렇게 아픈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왜 네가 울어?”
“죄송해요…….”
나를 위해 울어 주는 건지, 아니면 내 동족을 위해 울어 주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레온은 그 울음소리가 싫지 않았다. 그는 등을 돌려 제 옷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 대신 잡아 주었다. 고개까지 숙이고 바닥에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고 있었다. 새하얀 발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때문에 빨갛게 변하는 게 보였다.
“네가 죄송할 일 아냐. 말했잖아. 그런 마음 가지라고 하는 얘기 아니었다고.”
“레니. 전…….”
“너 그렇게 울지 마.”
“…….”
“진짜 늑대들한테 돌려주기 싫어져.”
레온은 허리를 숙여 이엘의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댔다. 순식간에 품에 안아 올려 다시 따뜻한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 주었다. 감기 걸리는데 맨발로 돌아다니지 마. 부러 핀잔을 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엘은 붉게 물든 눈동자로 레온을 가만히 보았다.
이온 하나 살리자고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타이곤에게서 갈기를 뺏어야 하는데, 그건 사실 그들의 생명 줄이었다. 영존하는 우논조차 갈기가 다 빠지면 죽고 만다. 빠지는 순간부터 생명의 빛이 꺼져 간다. 그런데 심지어 그들이 태어난 배경조차 행복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걸 가져가.
내가 그걸 어떻게 빼앗아.
내 아버지, 내 선조의 욕심으로 당신이 불우하게 만들어졌다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욕심을 내. 내 오빠 살리자고 똑같은 짓을 내가 어떻게 해.
“너 때문에 이제 이런 걸로 인간들한테 화풀이도 못 하겠네.”
그녀가 운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레온은 복잡다단한 마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울어 주었다는 게 말도 못할 정도로 기쁜 것도 같고. 또 막상 우는 걸 보고 있으니 조금 짜증이 나는 것도 같고. 이상한 감정이 제 속에서 제멋대로 나뒹굴며 뒤섞였다.
“기형 주제에 처음으로 인간의 관심을 받아 봤네. 좋은 의미로.”
“기형 아니에요.”
“…….”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에요. 신께서도 허락하셨어요. 당신의 탄생을 축복하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태어난 거예요. 당신은 태어났어요, 레니.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떨리는 손이 레온의 손등을 덮었다. 그 작은 온기에 온몸이 녹는다. 레온은 저도 모르게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이엘의 손등 위에 제 뺨을 대고 말았다.
어쩐지 저 따뜻한 말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 정말 신께서 축복이라도 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왜 그렇게 예쁜 말을 하는 걸까. 넌 말도 정말 예쁘게 하는구나. 그 생각을 하며 맥없이 웃었다.
믿기지 않게도 자신은 지금, 인간에게 마음을 열어 버렸다. 마지막 보루로 꼭꼭 닫아 놓았던 곳까지, 전부.
“레니.”
“꼭 늑대에게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
“가지 마.”
“레니.”
“가지 마. 내가 더 잘해 줄게. 네가 더 편하게 지내도록 내가 노력할게. 폐하께도 잘 말씀드릴게.”
축축하게 젖어 있던 녹안이 두어 번 깜빡이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려워요. 저는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고 싶어요.”
“…….”
“꽃만 피우면……,”
“내가 핀 꽃을 전부 훼손하면?”
“…….”
“그럼 넌 못 돌아갈 텐데.”
내용은 협박이었지만 무섭진 않았다. 협박보다는 떠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네 약점이라도 잡으면 어떡할래?”
“레니 님.”
“그럼 돌아가지 않고 여기 머물러 줄래?”
“저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 손님이에요. 폐하께서 명령하신 일만 마무리되면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 의견을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레니 님.”
감정에 휩쓸려 판단력이 흐려지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강경한 말투에 레온은 차분하게 침묵을 지켰다. 억지로 붙잡고 협박하고 으르렁거리는 짓은 성미에 안 맞는다. 사냥할 때처럼 단숨에 낚아채서 숨통을 뜯는 게 낫지.
그러나 그런 짓도 하기 싫었다.
이상하게 이엘 앞에만 서면 온갖 감정이 한데 섞여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돼 버린다. 레온은 찌푸려진 이엘의 미간 위에 검지를 올려 부드럽게 문질렀다.
“일단 자. 감기 또 도지면 나만 피곤해져.”
“…….”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는데.”
“…….”
“나는 생각보다 예민해. 성격도 예민하지만 모든 감각과 본능이, 다른 개체들보다 예민하거든.”
이엘은 알 수 없는 말만 빙빙 돌리는 레온에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정하지 못한 동작으로 이불을 정리해 주곤 완전히 일어섰다.
“네게 다른 냄새가 난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
“그동안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 이엘은 저도 모르게 이불 안에서 손가락을 접어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이 며칠째였지…….
고개를 돌린 레온은 차게 식어 버린 한 인간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려 주던 녹색 눈동자가 온기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푹 자 둬. 언제나 곤했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레온은 완전히 방을 떠나 버렸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묘했다. 그러나 그땐 그 오묘함이 기분 나쁜 흑발과 녹안에 가려져 미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두 번째 만났을 땐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접어 버렸다. 그랬다면 노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그리고 제 영지에 또 찾아와, 짧지만 긴 시간을 지내며 반 정도 확신했다. 소년은, 소년이 아니다.
“폐하?”
“어. 그래. 무슨 말을 했지?”
“말씀하신 공사에 관하여 모든 권한을 오헬이란 인간에게 넘기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후작이 걱정이 담긴 얼굴로 물었다. 그는 용맹한 사자 종족으로, 제 어미의 방계쯤 되는 존재였다. 만약 레온의 능력이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왕위에 올랐을 터였다. 그는 간언과 간섭 사이를 묘하게 오가는 자였다. 조카뻘 되는 자신에게 충언을 하다가도 고개를 내저으며 비웃을 때가 많았다.
“불만인가?”
“아닙니다, 폐하. 다만 그 인간의 무엇을 보고 선택하셨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빙그레 웃으며 물음을 던졌다. 무엇을 보고 선택했냐고? 후작의 물음에 레온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 쳤다.
“그대들은 종종 나의 명령에 의문을 던지더군.”
“…….”
“내가 그대들에게 한 말은 협조가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나?”
왕은 언제나 자비로웠다. 집권 초기 흉포한 근위대가 두 종족의 반란 세력을 보란 듯이 처형하기는 했으나 정작 왕은 언제나 자애롭고 너그러웠다. 귀족들의 간언에 충분히 귀를 기울였고,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꼭 필요하다면 왕은 제 손으로 해결하여 귀족들에겐 귀찮은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게 자신들의 왕이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제 종족에겐 한없이 온순했던 왕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작은 웃는 낯을 고수했지만 속으로는 마른침을 삼키며 진땀을 뺐다. 왕이 조금쯤 달라지셨다.
“가타부타 말을 듣고자 하여 이 자리로 부른 게 아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수로 공사는 빠른 시일 내에 돌입하기로 한다. 이 부분은 공작이 오헬과 함께 진행하도록 하게.”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공작은 호랑이 종족으로 비교적 온순한 편이었다. 게다가 그는 엘타와 친척관계라 이엘에게 큰 반발이 없는 쪽이기도 했다. 레온은 대충 그들을 훑어보다가 다시 시선을 후작에게 돌렸다.
“후작.”
“예, 폐하. 하명하십시오.”
“그대는 다른 일을 좀 맡아 주었으면 하는데.”
“무엇입니까?”
“조경 사업을 그대가 총괄하여 진행해 주게.”
“……조경 사업 말씀이십니까?”
“그대의 가문이 선대 후작을 도와 영지 개발에 앞장섰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니 이 부분은 그대가 맡는 것이 좋겠군.”
조경 이야기에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왕이 영지 개발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군. 즉위하고 줄곧 영지를 내팽개쳐 폐허가 되는 것을 방관하더니. 후작은 속으로 조금 놀라며 레온을 쳐다보았다.
영민하기는 하나 쓸데없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어서 다소 불안하던 왕이었다. 그런 소년 왕의 변화는 여러 감정이 들게 했다. 놀랍고 기특하고 아쉬웠다. 이제는 정신적으로도 성장하여 완연한 성체가 된 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충분히 이행하겠습니다. 그밖에 필요하신 것들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명령에 충복하겠습니다.”
후작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못마땅한 듯, 늘 시작도 전에 반대하며 시시비비를 가렸다. 그래서 레온은 그가 자신을 마뜩잖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다.
“저를 기꺼운 곳에 배치해 주시니 큰 광영입니다.”
“…….”
“폐하께서 선대 후작님을 잊지 않으신 것 같아, 저는 무척 기쁩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자신이 먼저 나서니 우논들이 따라나선다. 레온은 이제야 눈을 가리던 껍질을 떼어 내고 제대로 된 시야를 갖게 된 것 같았다.
사자와 호랑이 모두 저희가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되어 상기된 낯이었다. 물론 모두가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결과가 썩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
후작 역시 비로소 미안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잘 자란 제 조카가 이제야 정말 완벽한 왕으로 보였다. 왕이라면 마땅히 명령을 내릴 수 있어야 하며, 제 백성과 그의 터전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간언과 간섭을 구별하여 마땅한 보상과 처벌을 내려야 한다. 그의 물러 터진 조카는 그런 부분에서 늘 미완성이었다.
후작은 문득 왕의 어미를 떠올렸다. 자신과는 피로 엮인 늠름한 여자였다. 그녀의 아래 새로운 프라이드(군집)를 이루고자 하는 암컷이 많았다. 그 안에 속하고자 하는 수컷들도 넘쳤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의 명령으로 잡혀 갔고 아무도 모르게 새끼를 낳아, 버리고 도망쳤다. 그 뒤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더 멋있고 당당한 삶을 살다가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
그러나 제 조카는 아니었다.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때에 버려져 정신적으로 결핍된 채 자랐다. 그 부채를 되레 자신이 느껴 미안함으로 곁을 보좌했다. 사실상 잔소리에 가까운 말들뿐이었지만. 후작은 이제야 왕다워진 왕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린다.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곱씹는다.
그리고 발레리안. 그 수줍고 잘생긴 청년의 이름도.
*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줄 거야.”
오늘은 왕이 아닌 레니와 식사를 하게 됐다. 그는 입맛이 없는 건지 그저 이엘의 맞은편에 앉아 와인 잔만 의미 없이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늘 식사하던 왕성의 다이닝 룸이 아닌 별채로 초대받았다. 레온은 자신이 사는 곳이라고 말했다. 으리으리한 별채를 보고 있으니, 노아가 선물로 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던 그 별저가 떠올랐다. 그곳도 이곳만큼이나 아름답고 고요했는데…….
“나 역시 그것에 관해선 묻고 싶은 것도 없고.”
“…….”
“어차피 그런 건 나랑 하등 상관없어.”
날짜를 넘긴 건 아니다.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을 후각에 예민한 늑대들과 보내면서 주기가 다가오면 이종족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약은 때마다, 그녀의 건강에 따라 주기가 짧아지기도 했고 길어지기도 했다. 대개는 곁에 있는 오드가 주기를 챙겨 주었지만 오드가 없어도 스스로 약효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독수리의 영지에서처럼 깨뜨려 바른 것도 아니기에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니 약효가 떨어지지 않은 지금, 그가 눈치챌 리가 없다. 그럼 이게 아닌가? 이것 말고 다른 걸 말하는 걸까. 자꾸만 타는 목을 축이려 물을 쉴 새 없이 입에 댔다.
“네 발목을 잡는 정도로만.”
그 정도면 되겠지. 레온은 괜히 손가락으로 잔을 톡톡 건드렸다. 손톱이 부딪칠 때마다 맑은 유리 소리가 큰 공간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