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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28화 (128/488)
  • 128화

    인간을 잡아 오라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의 시장에 다녀오라니? 란트는 당황해서 멍청하게 눈만 끔뻑거렸다. 염소 한 마리 잡아 오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당장 열 마리도 잡아다 드리겠습니다! 그가 큰소리를 치자 레온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염소는 필요 없어. 젖이나 얻어 와.’

    ‘이, 인간들에게서요……?’

    ‘그래. 아니면 그대가 염소를 잡아 젖을 짤 텐가?’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란트는 다소 당황해서 제 왕의 명령을 머릿속에 되새기고만 있었다. 그냥 내가 염소젖을 짤까……. 인간들의 시장에 가서 인간들은 잡아먹지 말고 젖만 사 오라는 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자, 여기 금화. 다녀오시오, 란트 경. 또 여기 적힌 것들도 다 사 오고.’

    레온이 내민 종이에는 몇 가지 약재들이 적혀 있었다. 란트는 미간을 좁히며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지만 도무지 모르는 것들뿐이었다. 이걸 사 오려면 인간들에게 물어물어 사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인간들의 시장엘…… 다녀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인간들의 시장을 박살 내라는 게 아니고요?

    ‘본체화로 휘젓고 다니지 말고, 지금 모습으로 사 오도록.’

    ‘진심이시군요, 폐하.’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나? 한 시간 안으로 다녀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사 온 염소젖과 약재다. 솔직히 레온은 란트의 반응으로 보아, 염소 한 마리를 홱 낚아 와 젖이라도 짤 줄 알았다. 그래도 왕의 명령이라고 인간들의 시장까지 다녀온 모양인데…… 도중에 인간을 잡아먹지는 않았겠지? 이런 것에 늘 방관을 고수하던 자신이었는데, 왠지 마음에 거슬린다.

    “폐하! 오헬 님께 전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내가 다녀올게.”

    “오헬 님이 많이 아프신가요? 어제도 새벽 늦게까지 화단에 계시던데.”

    “그새를 못 참고 밖에 나갔어?”

    어지간히 돌아가고 싶나 보군. 자꾸 돌아가고 싶단 이야기를 하니 괜히 심술이 난다. 대체 뭐가 부족해서 돌아가겠다는 거야. 새끼들이랑도 잘 지내고 자신과도 잘 지내면서.

    솔직히 자신이 다정한 편은 아니지만 노아도 다정한 성격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면에선 별 차이 없을 테고.

    ……그럼 영지가 많이 썰렁한가? 하긴. 인간이 살기엔 좀 척박한 편이지. 이엘의 말처럼 레온의 영지엔 생활에 필수인 수로조차 없었다. 그러니 거주하기엔 썩 불편했겠지. 저렇게 감기에 걸린 것도 목욕을 하겠다며 영지 밖에 나갔다가 비를 쫄딱 맞아서 그렇게 된 건데.

    애초에 수로만 좀 잘 되어 있었어도 이엘이 감기에 걸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공사를 서둘러야겠네.

    그 생각을 하는 새에 레온의 발길은 어느새 그녀의 방문 앞에 닿아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기침 소리가 대답처럼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며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한 이엘이 그를 맞아 주었다. 조금 전에 마주할 때완 달리 웃는 낯이라 심술이 났던 레온의 마음이 저도 모르게 죄 녹아 버렸다.

    “레니 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늘 나드 산책은 못 간다고 폐하께 말씀드렸는데 못 들으셨어요?”

    “비켜 봐. 좀 들어가게.”

    무작정 방 안으로 들어서는 레온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을 닫았다. 레온은 들고 온 트레이를 협탁에 올려 두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손을 뻗어 이엘의 이마 위에 얹었다. 아직 미열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레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침대 시트를 걷어 주었다.

    “누워, 어서.”

    “괜찮아요. 열은 다 내렸는데요.”

    “말 좀 들어. 네가 나드 산책을 안 시켜 주면 내가 다 떠맡아야 한다고.”

    그 안에 걱정이 묻었다는 것쯤은 알겠다. 이엘은 웃음을 참으며 못 이기는 척 슬리퍼를 벗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폭신한 침대 위에 몸을 완전히 맡기고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내려놓았다가 들었다. 더운 숨을 내뱉는 그녀의 앞에 레온이 뜨거운 잔을 내밀었다.

    “따뜻할 때 마셔.”

    “염소젖이에요?”

    “그래.”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여긴 시장이랑 꽤 멀잖아요. 아니면 염소를 잡으셨어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마셔.”

    레온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이엘에게 잔을 내밀었다. 호호― 바람을 불어 열기를 식힌 이엘이 꿀꺽꿀꺽 잘 마셨다. 기특하게도 거절하지 않고 끝까지 다 마신다. 레온은 빈 잔을 받아 다시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녀는 레온의 눈치를 보며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레니 님께 옮길 수도 있으니까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떠세요?”

    “내가 나갔으면 좋겠어?”

    “좋겠다기보다는 그게 낫지 않을까요?”

    “나는 우논이야. 인간처럼 허약하지 않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은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에 괜히 머쓱해진 이엘은 헛기침을 하며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자, 잠이 안 와서 그러는데 이야기 아무거나 해 주시면 안 돼요?”

    “너 이제 내가 편하구나?”

    “네. 이 영지에서 제일 편해요. 레니 님이 없으면 솔직히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솔직한 그녀의 말에 레온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별 얘기 아닌데 왜 귀가 뜨거워지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한 레온은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이불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알았으니까 눈이나 감아.”

    “네.”

    처음엔 루나가 해 주었던 동화들 중 하나를 이야기할까 싶었다. 밤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베갯잇을 적실 때마다 다정한 공작 부인은 탐스러운 레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흔해 빠진 이야기였지만 연구소에서 생을 보낸 어린 레온에겐 더없이 신기하고 행복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단 한 순간도 전 인정받지 못했어요. 아무도 제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았거든요.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도 언제나 무시당했죠. 공기만도 못한 취급이, 제겐 너무 당연했어요.’

    며칠 전에 그녀가 제게 했던 이야기가 갑자기 귀에 맴돌았다.

    동병상련. 뭐, 그런 건가. 인간 따위에게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불쾌했지만, 감정이란 게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상대가 너라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서 접점을 찾고 싶은 건지도 모르고.

    내가 느낀 감정을 너도 느꼈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그를 찾아왔다. 그는 원래 그렇게나 이기적이고 못된 남자였으니까. 레온은 이불을 다독거리던 손짓을 점차 죽였다.

    “그냥 듣기만 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별로 재밌는 얘긴 아니니까.”

    “…….”

    “나는 고아야. 아버지가 누구고 어머니가 누군지 몰라. 아니, 얼굴과 이름은 아는데 만난 적은 없어. 그분들도 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을 거고.”

    “…….”

    “나는 내 어머니가 죽여 버리고 싶었던 그런 존재였어. 원치 않은 임신이었거든.”

    그녀는 사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자다운, 늠름하고 뛰어난 암사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어미는 그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

    사실 레온도 정확히 자신이 어떻게 생기게 됐고 어떻게 태어난 건지는 모른다. 다만 ‘만들어졌다’는 것만 알 뿐. 그러니 뭐, 그 속에 끔찍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래서 어머니가 날 싫어하실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라도 자위하지 않으면 성체가 된 지금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러려니 싶었다.

    “그렇게 연구실에 태어나고 버려졌어. 나는 언제나 거기 있었는데…… 아무도 몰라줬어. 내가 숨 쉬는 생명체라는 것도, 고문과 실험에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것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았어.”

    레온은 감정적인 편이었다. 이성적인 왕이 되고 싶어서 그런 척하며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본성이 예민하고 감정적이었다. 그래서 한번 제 속 이야기를 꺼내니, 입술이 주저함 없이 무언가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휩쓸려 무엇이든 다 내뱉었다.

    “매일 몇 번씩 반복되는 실험에도 비명 한 번 질러 보지 못했어. 내 몸에 악랄한 짓을 꾸며도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했지. 그렇게 사육당해 자랐으니까. 날 때부터 그게 당연했으니까. 내 부모란 자들은 날 끔찍하게 여겨, 내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버렸어. 그들에게 난, 그냥 원치 않게 생겨 버린…… 그런 역겨운 존재였겠지.”

    “…….”

    “그래, 맞아. 나도 기형이야. 만들어졌거든.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강제로 만들어졌어.”

    “…….”

    “나드처럼 타이곤이야, 나도.”

    이엘이 눈을 홉떴다. 그녀의 눈앞엔 시트를 움켜쥐고 잘게 떨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 있었다. 어슴푸레 들어오는 달빛에 금발이 마치 은발처럼 빛났다. 어둑한 밤인데도 눈부실 듯한 그의 머리카락은 발광하듯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레온이 낮게 헛웃음을 흘리곤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별 얘기를 다 했네. 어쩐지 이 인간의 앞에만 서면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잔뜩 세워 놓은 장벽도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레온은 지친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곤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왜……?

    “왜 그런 표정이야?”

    자신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 알고 싶지 않은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레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레온은 턱 끝까지 차올라 있던 제 감정이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낯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서 보았던 그 눈빛이랑 다를 바 없었다.

    “너도 내가 돌연변이라 꺼려져? 끔찍해?”

    “…….”

    “나드는 괜찮다면서…… 나는 아닌가 보지?”

    다소 삐뚜름한 물음이 들려왔으나 그녀는 또 답하지 않았다.

    “됐어. 그런 시선 익숙해. 잘 자. 새벽에 약 챙겨 먹는 거 잊지 말고.”

    “레니. 잠깐만요!”

    다급하게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반사적으로 레온이 이엘의 손을 홱 내쳤다. 이엘은 허공에 뜬 제 손을 말아 쥐었다. 레온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갑기 그지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방문 앞에 도착하기 직전, 이엘이 맨발로 뛰쳐나와 다시 레온의 옷 끝을 꾹 잡았다.

    “안 꺼려요. 꺼린 거 아니에요. 끔찍하지 않아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그럼 왜 날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레온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이 싫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종 부정적인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네가 싫다. 끔찍하다. 잡종이다. 더럽다. 괴물이다, 등등. 자신이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만 쳐다보는 건지.

    그러나 억울함은 잠깐이었고 그는 차차 그들의 반응에 동화됐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스스로조차 구역질이 날 만큼 끔찍해 보여서.

    레온은 이제 자신이 본체화를 언제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아주 옛날부터 자신은 줄곧 이 모습으로 살았다. 끔찍하게 두 가지 종이 섞여 있는 제 모습이 싫어서, 본체화는 성체가 된 뒤론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남들에 동화되어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다는 건, 생각보다 참담한 감정이었다.

    “죄송해요.”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이엘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돌아선 레온의 옷자락을 붙잡고 추저분하게 눈물을 계속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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