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잽싸게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마친 이엘은 집무실을 성큼성큼 걸어왔다. 레온은 펼쳐 놓았던 서류에 마저 사인을 마치고 나머지는 전부 책상 귀퉁이로 밀어 버렸다.
감기 때문에 며칠을 앓느라 얼굴이 반쪽이 됐다. 생각보다 좋지 않은 혈색에, 레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약은 먹었나? 누가 보면 내가 쉴 새 없이 일만 시키는 줄 알겠네.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하려 입을 열었다가, 기침을 꾹 눌러 참는 그녀의 모습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냥 하루 푹 쉬게 하는 쪽이 낫겠다 싶어서 대충 업무 확인만 하고 돌려보내려 했다.
“일전에 말한 영지 일에 관해 진행이 어느 정도 됐나 해서 불렀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영지 개발이 전혀 안 됐다. 호랑이는 단체 생활을 싫어하고 사자는 수컷끼리 뭉쳐 사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늑대처럼 제대로 된 집단생활 자체가 불가했던 것이다. 개발은 고사하고 영지 내에 그 흔한 수로도 없을 정도였다.
“역시 수로를 우선으로 뒀군.”
“네. 아무리 필요하지 않다고 하셔도 수도는 기본입니다. 위생과도 직결되고 식수와도 연결됩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농업까지 염두에 두고 계신다면 수로 공사를 하는 게 우선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아마도 다 반대할 것이다.”
귀찮아서 안 하려고 하겠지. 두 종족은 정말 귀찮음의 정점을 찍는 종족들이었다. 먹이사슬의 최상위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닌데, 이들은 한없이 게을렀고 뭉쳐 살면서 그게 더 심해졌다.
배가 고플 때만 영지를 나가 대충 사냥해서 배를 채우고, 오는 길에 목만 축이고 돌아와 또 늘어져라 잠만 잤다. 다른 종족들이 영지를 수호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과 달리 이들은 성벽 자체를 텅텅 비워 놓고 있었다.
오히려 누구 하나 쳐들어오면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냥할 수 있을 거란 게으른 생각까지 할 정도니. 레온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큰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새끼들이 있지 않습니까?”
“새끼들?”
“수로를 이용해 인공 호수를 하나 파는 건 어떻습니까? 아마 새끼들이 좋아할 거예요.”
특히 호랑이들은 좋아할 법하다. 사냥을 나가서도 곧잘 물놀이를 즐기곤 했으니까. 사자들은 별로 내키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닐 테지. 호수를 하나 파 준다고 하면 의욕은 생길 것이다. 게다가 새끼들이 원한다면 그걸 마다할 아비들이 아닐 것이고. 다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덧붙여 조경 사업도 함께 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조경이라…….”
“선대 후작이셨던 레브란토 후작께서 조경에 조예가 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정무는 후작 부인께서 하시고 후작께선 영지 발전에만 심혈을 기울이셨다고요. 아마 폐하께서 수로를 이용해 조경까지 고려하신다면 사자들도 충분히 동의할 것입니다. 선대를 떠올릴 테니까요.”
레온의 외조부, 그러니까 당시 후작이었던 레브란토는 오히려 작위를 부인에게 넘겨주다시피 떠맡기고 자신은 영지 사업에만 몰두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사자들의 영지는 언제나 북적거렸다. 의외로 심미안이 뛰어난 후작 덕분에 교역이 제법 잘 되었던 것이다.
레온은 그녀의 제안을 곱씹으며 주저했다. 선대라고 해도 레온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외조부. 모친과 마찬가지로 제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남자였다. 레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답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며 이엘이 나긋한 목소리로 첨언했다.
“폐하.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
“폐하의 말씀이라면 우논들은 기꺼이 따를 겁니다. 폐하는 왕이시잖습니까.”
레온은 자신이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건 아주 옛날이야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네 종족은 자신의 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 면에서나 지략 면에서나 자신들의 왕은 뛰어났다. 오합지졸인 네 종족을 이끄는 왕이다. 레온이 무능한 왕이었다면 이렇게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원치 않는 동거 생활을 하느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거지, 왕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자신들에게 보여 준 긴 시간의 노력을 모두 무시하지 않았다. 그건 정성을 넘은 헌신이었으니까.
“일단은 고려해 보지.”
“수로 공사를 마치는 대로 바로 조경 사업으로 이어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틈 없이 빠듯하게 확장 공사를 하는 쪽으로요.”
“일단은 일에 투입이 가능한 우논을 몇 추리겠다. 로를 통해 명단을 적어 줄 테니, 공사 배치는 네가 맡아서 하도록 해.”
“우논 몇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 모두 공사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전부는 어려울 텐데. 애당초 늘어져라 잠만 자며 허송세월을 보낸 이들이다. 갑자기 공사를 하겠다고 하면 저 몸 누울 곳 없어진다고 투덜거릴 텐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일을 하라고 닦달하라니. 잠재운 민심이 또 들끓을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젓는 레온을 향해 이엘이 꽤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은 외람되고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만 꼭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이지?”
“폐하의 백성들은 살이 너무 쪘습니다.”
갑자기……? 가면 너머로 레온의 금회안이 일순 흔들렸다.
“움직이지 않으니 살이 찌고 둔해지는 거예요. 지금이야 최상위 포식자끼리 뭉쳐 살고 있으니 아무도 덤비지 않겠지만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작은 틈이 보이면 누가 됐든 물고 늘어질 겁니다. 당장 늑대와 독수리의 영지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러했으니까요.”
인간인 자신이 주제넘게 충언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솔직히 이건 꼭 말해야겠다 싶었다. 살이 쪄도 너무 쪘잖아! 이엘은 살이 찌고 마르고, 이런 외적인 부분을 걸고넘어지는 게 아니었다.
“폐하. 어린 새끼들이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어제는 렌이 뜀박질을 멈추려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졌어요. 육중한 몸이 바닥에 닿았을 때 대지가 울리고 땅이 꺼질 정도였습니다. 물론 몸이 워낙 포동포동해서 충격이 흡수된 덕에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요.”
렌은 새끼 호랑이 테르들 중에서도 어린 편이라 모든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개체였다. 사냥하러 나가면 어른들이 대신 사냥해서 먹여 주었기 때문에 사냥할 줄은 전혀 모르고 먹을 줄만 알았다.
그렇게 사육되듯 길러져서 이젠 아주 퉁퉁한 호랑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말이 퉁퉁이지, 사실상 뚱뚱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저러다 스스로 사냥하는 법도 잊어버릴 거예요. 이런 식이면 큰일이 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영지를 지키는 위병 하나 없지 않습니까? 폐하. 이건 성체인 우논분들부터 바꿔 나가야 합니다.”
“…….”
“어떻게든 이번 수로 공사에 모든 종족이 다 참여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살을 빼는 것도 중요하지만 게으른 습관부터 고쳐야 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엘타를 제외한 나머지 새끼들은 전부 과체중에 가까웠다. 물론 이종족은 덩치가 클수록 서열을 높게 쳐주었지만, 이런 물렁살은 먹이사슬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에 왔을 때보다 더 심각한 비만이 되어 있었다. 이건 명백하게 어른들이 교육을 잘못 시킨 탓이다.
진지한 그녀의 간언에 레온은 침음했다. 그간 너무 무심했어. 스스로 반성한다. 근위대는 반란민들을 잠재우기 급급했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게 입을 틀어막기만 했지, 제대로 들어 볼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독재는 아니었으나 모두에게 불편함을 떠안기기 싫어, 모든 걸 제 손에서 해결하려 했다. 제 안에 있는 백성들이 되도록 편하게 살도록, 힘든 일은 레온이 스스로 해결했다. 그랬더니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짐승들이 되어 버린 셈이다. 오히려 인간들이 있던 시절보다 지금이 더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부덕함이 이런 식으로 드러날 줄이야. 레온은 짧은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알겠다. 충언 고맙군.”
“감사합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제가 엘타의 글공부를 도와도 될까요?”
“엘타의 글공부라면 다른 우논이 하고 있을 텐데.”
“다른 테르들도 같이 배우고 싶다고 해서요.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습니다.”
테르가 인간의 글자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엘타는 이빨이 뽑히고 이엘과 대화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정말 온 힘을 다해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겨우 몇 단어 정도였고.
“가능하겠나?”
“그냥 놀이처럼 배우는 거니까요. 글자를 익히면 좋고,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됐든 하루하루 의미 있게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새끼들은 제게 맡기십시오, 폐하.”
“덧붙여 운동도 시킬 생각이로군.”
“맞습니다.”
글자도 가르치면서 운동도 시키겠다? 저런 생각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다. 붙잡다시피 이곳에 가둔 게 신경 쓰였는데, 그래도 조금은 제 영지를 좋게 생각해 준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아졌다.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화단은 어떻게 되어 가지?”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성미가 꽤 급하신가 보네. 분명 오래 걸릴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심지어 씨앗을 어제 뿌렸다. 기후가 온난하니 늑대들의 영지보다는 빨리 자라겠지만 그래도 하루 만에 싹이 나올 리가 없질 않나. 물론 이엘도 하루빨리 꽃이 피어 무탈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오히려 꽃이 피길 간절히 기도하는 건 자신이었다.
“음. 그럼 더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해.”
“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감기에 걸린 건 괜찮나?”
“네? 어떻게…… 아, 레니 님이 말씀하셨군요.”
하여간 그 남자는 정말 입이 왜 그렇게 가벼운 건지 모르겠다. 쓸데없이 감기 이야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사촌지간이라지만 저런 얘기까지 다 오고 가는 걸까? 아니면 레니는 왕이 제게 심어 놓은 스파이라도 되는 걸까.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던 이엘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기침만 조금 할 뿐이고, 몸살은 이제 다 나았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한 것은 아니다.”
“네.”
이제 이엘은 까칠한 왕의 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수준이 됐다. 그럴 법도 한 게 벌써 이곳에 온 지 2주나 된 것이다. 그러니까 검은 가면을 쓴 남자와 어색한 식사 시간을 매번 함께 한 것도 벌써 2주나 됐다는 소리다.
그리고 늑대들과 소식이 끊긴 것도 벌써 2주째. 괜히 씁쓸해지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오늘은 나드 산책을 나가지 마라. 나드에게 감기가 옮을지 모르니.”
“그러겠습니다. 식사도 제 방에서 따로 하겠습니다. 폐하께 옮길지도 모르니까요.”
나드와 자신은 다르지 않나? 몸이 비리비리하다고 우논인 자신을 허약한 취급을 하는 듯해서 살짝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레온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손을 홱홱 저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엘이 나가자마자 레온은 가면을 벗고 다이닝 룸으로 향해 뜨겁게 데운 염소젖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안에 꿀을 조금 탔다. 살다 살다 내가 인간들의 시장에서 이런 것도 구해 오는구나. 아까 아침에 란트 경에게 시장에 다녀오란 소리를 했다가 그의 굵은 비명 소리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에?! 인간들의 시장이요?!’
‘란트 경. 목청이 너무 크다.’
‘아…… 아니, 폐하……. 시장에 다녀오라니…… 아니, 그보다 염소젖이요? 염소가 아니라 염소젖이요? 그냥 가서 제가 염소 한 마리 잡아 오겠습니다. 뭐 하러 인간들의 시장엘 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