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꿋꿋한 매까지 동맹으로 포섭했다. 매는 확신이 없으면 직접 나서지 않는다. 그런 종족까지 제 편으로 끌어들일 정도면 실험이 어느 정도 진척됐다고 보는 게 맞다. 연구소를 반파하긴 했지만 전부 무너뜨린 건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파괴했는데도 별다른 응수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박살 난 쪽은 중요한 건물이 아니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지금으로선 직접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다. 어찌나 꽁꽁 숨기고 있는지. 사실 노아는 뱀들이 뭘 하든 관심이 없다. 어차피 죄를 지으면 그 죄는 부메랑처럼 돌아올 테니. 다만 그녀가 여전히 거기에 매달리고 있어서…….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에서야 왜 그렇게 뱀의 연구에 연연했는지 알 것 같다. 제 아비가 저지른 일에 죄책감을 갖고 사는 거겠지. 이엘에게도 말했지만 그녀가 연좌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정체를 숨기고 산다면 누가 그녀에게 책임을 묻겠는가. 그래서 노아는 이엘이 그 일에서 제발 손을 떼길 바랐다.
들을 고집도 아니지만.
“아무튼 저번 원정은 소득이 꽤 많았습니다. 오헬이 계획한 대로 아무도 다치지 않은 데다가 상당수의 보호석까지 파괴했습니다. 또 뱀의 습격으로 의도치 않게 피라미들을 처리하게 되었으니 수확이 큽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확실히 인간은 똑똑하네요.”
“겉으론 그렇지.”
겉으론 수확이 많겠지만 그녀의 속은 말도 못하게 문드러졌다. 그 아이는 정말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다. 그저 동족이란 이유로 마치 제 일인 것처럼 숨죽여 울었다. 황족답지 못한 황족이고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제 목숨 챙기는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마련인데. 인간의 일에도, 이종족의 일에도 언제나 마음을 쓴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여.”
“…….”
“빨리 데려오고 싶은데.”
빨리, 안아 주고 싶은데. 애가 탔다.
*
“나드! 너무 빨리 뛰지 마!”
이건 뭐 누가 산책을 시키고 누가 산책을 하는 건지. 마치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나드를 쫓기 위해 이엘은 거의 목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너른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여기 영지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은데, 이러다 나드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녀는 다급했다.
“그냥 둬. 그렇게 따라가지 않아도 돼.”
“저, 저러다가 잃어버리면 어떡해요!”
어느새 이엘의 곁으로 온 레온은 그녀와 달리 평온한 안색이었다. 확실히 우논은 우논이구나. 체력적인 면에선 자신 있었는데도 우논인 그는 큰 보폭으로 가볍게 자신을 따라잡았다. 숨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로.
“그래서. 장미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아, 참. 맞다. 레니 님은 그 이야길 폐하께 왜 하셨어요?”
덕분에 꽃이 필 때까지 볼모 기간이 길어졌잖아요. 이엘이 볼멘소리를 내며 미간을 좁혔다. 레온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 하자, 재빨리 손바닥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언젠가부터 이 시간이 즐거워졌다. 평온한 제 영지에서 나드가 뛰놀고 그 뒤를 헥헥거리며 달리는 소년의 모습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지루하던 일상에 찾아온 작은 변화였다. 그리고 레온은 그 작은 변화가 싫지 않았다. 실없이 터지는 웃음을 막는 게 한계란 사실을 인정한 뒤로 웃음은 더 자주, 여러 이유로 터졌다.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낸 이엘은 햇살처럼 반짝였다가 금세 사라진 그의 미소를 몰래 훔쳐봤다. 웃으면 인상은 참 좋은 사람인데…….
“평생 잡혀 있는 것보단 그편이 낫잖아.”
“제가 왜 평생 잡혀 있어요? 전 돌아갈 건데요.”
입을 열면 부정적인 소리만 하니까 문제다. 이엘이 이맛살을 구겼다.
“네가 우리 폐하 성격을 몰라서 그런 말을 자꾸 하는데, 우리 폐하께선 한번 손에 잡으면 절대 안 놓으신다니까.”
“레니 님. 폐하께선 절 싫어하세요. 인간인 저와 한곳에 있고 싶으시겠어요? 폐하께서도 제가 여기 머무는 게 싫으시니까 먼저 장미 얘기를 꺼내신 거겠죠.”
“널 왜 싫어해? 안 싫어해.”
“그걸 레니 님이 어떻게 알아요. 싫어하신다니까요.”
“안 싫어한다니까?”
“싫어하니까 제 앞에선 가면을 쓰시는 거겠죠. 얼굴도 보기 싫어서.”
“그건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레온 때문에 이엘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레온은 잠깐 멈칫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얼굴 보기 싫어서 가면 쓴 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 그는 답지 않게 한참이나 말을 고르다가 조심히 운을 뗐다.
“폐하 얼굴에 상처가 있으셔서 그래.”
“아…… 몰랐어요. 실례가 되는 말을 했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널 싫어하는 게 아니야. 오해하지 마.”
“네. 그럼 다행이고요.”
어쩐지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저 멀리 뛰쳐나갔던 나드가 다시 꼬리를 살랑거리며 이쪽으로 되돌아오는 게 보였다. 지치지도 않는 건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에 이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보며 레온은 그녀를 슬쩍 떠봤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노아 님이 잘해 주시나 보지?”
“그분은 다정하시잖아요. 언제나 배려해 주시고, 절 생각해 주세요.”
노아가 다정해? 글쎄. 절대 다정한 타입은 아닐 텐데. 레온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장담한다. 과거 암컷이 있던 시절에도 노아는 그 암컷들에게조차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다.
“또 제 집은 그곳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있을 곳은 그곳이라서 저는 돌아가야 해요.”
“넌 참 희한해. 왜 그렇게 삶과 생에 집착하는 거야?”
“레니는 아니에요?”
“…….”
“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많거든요.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요.”
예전엔 이온 하나 때문에 생을 버리지 못했다. 그를 살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억지로 생을 이어 갔다. 그가 생의 유일한 미련이었다.
하지만 웃기게도 그를 위해선 제 목숨을 버리는 게 어려웠다. 그토록 아끼면서도 내 목숨은 또 소중해서……. 그래, 맞다. 살고 싶었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살고 싶었던 거다, 자신은.
단 한 번의 삶에서, 단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제 꿈에 레니 님이 나오신 적이 있어요.”
“……나?”
“네.”
무슨 꿈이었냐고 물어보기엔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악몽이었나? 한참 생각에 젖어 있던 이엘이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미소 지었다. 억지웃음 같아서 마음엔 안 들었지만.
“레니 님은 폐하의 사촌이라고 하셨죠?”
“어. 사촌 동생이야.”
“그러면 폐하의 아버지 쪽인가요? 호랑이 맞죠?”
제법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냈는데도 이엘은 아직도 레온의 종족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때 봤던 조용한 움직임을 떠올려 보면 아마도 호랑이 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호랑이와 사자는 인간의 모습일 때 외관이 굉장히 흡사하다. 쓰는 능력도 똑같기 때문에 웬만해선 구분이 어려웠다.
그러나 레온은 대답 대신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넌 타이곤을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시면……. 글쎄요. 달리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거짓말이다. 이엘은 타이곤이란 단어만 나와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저 앞에서 흩날리는 나드의 미세한 갈기를 계속 외면하고 있지 않던가. 그녀는 그 종족이 매우 불편했다.
“우리 폐하께선 타이곤이시니까, 그냥 한번 물어봤어.”
“그냥……. 그냥 다른 종족들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
“기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불량품도 아니고요.”
“…….”
“신께서 허락하셨기에 태어난 거예요. 마땅히 귀한 존재가 되어야죠.”
다른 종족 간의 사이에선 번식이 불가능하지만, 호랑이와 사자처럼 드물게 그게 가능한 종족이 몇 있었다. 노새도 같은 유였다.
이런 식으로 태어난 종족은 생식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같은 이종족들에게도 ‘기형’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대체로 암컷과 수컷의 동의하에 ‘태어났다’기보다는 강제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 더욱 그러했다.
이를테면 레온이 그런 개체였다.
“무슨 죄가 있겠어요. 다 인간들이 잘못한 거죠.”
“…….”
“기형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건 외관이 아니라 내면이에요. 비뚤어진 사고, 이기적인 욕심. 세상을 어그러뜨리는 기형적인 마음 말이에요. 신께선 그런 걸 기형이라고 부르시겠죠. 그분 앞에 외형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
“인간도, 이종족도. 그냥 다 똑같아요. 모습만 다를 뿐, 결국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레온의 종족을 물었는데 어쩌다 이런 대화까지 이어진 건지 모르겠다. 때마침 나드가 이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기꺼이 몸을 낮추고 두 팔을 벌려 나드를 안아 주었다.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신이 나서 헥헥거리는 나드가 갸릉갸릉 배를 뒤집어 다리를 파닥거렸다.
“나드는 축복받았네요. 부모님이 서로 사랑해서 태어났다니.”
“…….”
“그리고 레니 님도 나드를 무척 사랑하시잖아요. 분명 나드는 행복할 거예요.”
귀족들의 결혼이 그렇듯, 이종족의 결혼도 비슷했다. 대부분 번식을 위한 관계일 때가 많았고 우논이라 할지라도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도 나드의 부모는 종족도 서로 다르면서 사랑으로 나드를 낳았다니. 이엘은 어쩐지 나드가 조금 부러워졌다.
“네 부모님은 어땠는데?”
레온의 목소리에 이엘이 쭈그리고 있던 몸을 세웠다. 그녀는 내려 달라고 발버둥 치는 나드를 땅에 내려 주곤 레온을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이익으로 결혼한 관계가 다 그렇죠, 뭐. 잘 모르겠어요. 행복했는지 아닌지. 제가 원치 않는 자식이었던 건 확실하지만요.”
그 순간 레온은 그녀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우울함을 발견했다.
“단 한 순간도 전 인정받지 못했어요. 아무도 제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았거든요.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도 언제나 무시당했죠. 공기만도 못한 취급이, 제겐 너무 당연했어요.”
“…….”
“나드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좀 이상한 거겠죠?”
이상하지 않다. 자신도 언제나 노아가 부러웠으니까. 그 감정…… 충분히 이해하니까. 레온은 말없이 손등으로 이엘의 앞머리를 톡 건드렸다.
“잘 자랐으니 됐어.”
“…….”
“너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존재야.”
“그럴까요.”
“잘 자랐어, 착하게. 기특하게.”
루나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말을 똑같이 해 주었다. 그 순간 보석처럼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물기로 젖어 가는 게 보였다. 레온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 작은 머리를 감싸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상하게도 기꺼웠다. 인간의 작은 머리통을 안아 달래 주는 게. 위로하는 게. 그리고 자신이 위로받았던 그 말을 누군가에게 똑같이 전해 줄 수 있다는 게.
착하지. 착하네. 기특해. 그건 이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이젠 이 땅에 없는 ‘그녀’를 대신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
편지 내용만 봐선 당장 쳐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늑대들 쪽에선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발 빠른 앤디라면 지금쯤 영지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늑대들은 고요했다. 레온은 서류에 사인을 하다가 말고 펜을 손으로 돌리며 생각에 빠졌다.
이대로 깜깜무소식이라면 이걸 빌미로 더 잡아 둘 수도 있겠네. 괜히 입가에 번지는 교활한 미소에 손바닥으로 제 입을 쓸며 가려 버렸다. 저가 생각해도 요새 심술이 더 늘어난 것 같다.
“폐하. 오헬 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