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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25화 (125/488)
  • 125화

    “그게 아니라 어제 제 말대답이 생각나 부끄러워졌을 뿐입니다.”

    “부끄러운 건 아나 보지.”

    레온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 먼저 1층 대리석을 밟았다. 이엘은 여전히 마지막 계단 위에 서서 주저하다가 레온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냥 어제처럼 방에서 아침까지 먹고 내려오는 게 좋으려나. 몸을 돌려 다시 위로 향하려던 차였다.

    “뭐 해.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건가?”

    “네?”

    “식사는 시간을 놓치면 나오지 않는다. 따라와.”

    설마 같이 식사하자는 건 아니겠지. 어제저녁처럼 방에서 따로 먹고 싶은데. 불편한 기색을 숨기며 별수 없이 레온의 뒤를 따랐다.

    노아의 성에 있는 만찬실만 한 크기의 다이닝 룸이 나왔다. 대체로 레온의 성은 뭐가 됐든 다 큼지막했다. 영지도 이엘이 본 곳 중 제일 넓고 성벽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높았다. 심지어 그녀가 머무르는 방 역시 손님방인데도 노아의 침실보다 더 컸다.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위용에 기가 눌린 이엘이 식당에 들어서자 저 멀리서 로가 쪼르르 달려와 그녀를 맞아 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헬 님!”

    “응. 좋은 아침이야.”

    “여기 앉으세요. 식사는 곧 대령하겠습니다.”

    “아, 아니…… 내 건 내가 알아서 할게.”

    “됐다. 그냥 앉아 있어. 늑대의 사절로 온 네게 일을 시켰다가 무슨 욕을 먹으라고?”

    어젠 저보고 일을 도우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엘은 속으로 레온을 탓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도무지 가까워질 수가 없는 왕이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재상의 일을 겸했다고 했나?”

    “네. 안드로 님을 도왔습니다.”

    이 거대한 테이블에 단둘만 앉아서 식사를 하려니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나마 저쪽에 있는 왕이 제겐 관심이 전혀 없어서 식사 자체가 거북하거나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레온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귀족 중에서도 아주 잘 배운 귀공자 같았다. 검은 가면을 쓴 채로 식사를 하는데도 어긋남 없이 자연스럽고 완벽한 자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불편해 보일 따름이다.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는 게 싫어서 가면을 쓴 건지, 아니면 무언가 가리기 위해서 쓴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연히 제가 다 불편했다. 아무래도 식사는 따로 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듯한데.

    그럼에도 레온은 평온하게 또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 갔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가면이 들썩이며 살짝 드러난 턱선이 가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보니 레니와 좀 비슷한 것도 같고.

    “어제 레니를 만났다면서.”

    “네? 아, 네. 뒤뜰에서 나드와 함께 만났습니다.”

    갑자기 레니의 이름이 나와 이엘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레온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다가 식사를 마저 이어 갔다.

    “그는 내 사촌이다. 여러모로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지.”

    혹시나 제 정체를 눈치챌까 쓸데없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이엘은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리며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레니 님이 더 다정하시지 않나……? 도무지 어디가 비슷한 구석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조금 전에 턱선이 닮았다고 생각했던 건 잊어버리고 떨떠름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너도 할 줄 아는 게 있다고?”

    “네?”

    “뭐…… 꽃을 잘 피운다면서.”

    ……근데 입이 참 가볍구나. 그걸 그새 말한 거야? 갑자기 레니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이엘은 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아니면 고개를 저어야 할지 몰라 답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딱히 꽃을 잘 피우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니다. 르네에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허세를 부렸지만, 그건 정말 말 그대로 허세였다. 노아의 정원은 오랜 시간 버려져 있었지만 토양 자체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냥 그 정원의 터가 좋았던 거지, 결코 제 재주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주저하며 답을 하지 않는 이엘을 레온은 가면 너머로 가만히 쳐다봤다.

    “그럼 레니가 내게 거짓을 고했다는 건가?”

    “아닙니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니에요. 말씀대로 이전에 폐하의 창고에서 가져…… 훔쳤던 씨앗은 노아 님의 정원에서 잘 피었습니다. 다만 그건 제가 잘해서가 아니고 정원의 토양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래저래 늑대분들의 도움이 크기도 했고요.”

    “그럼 같은 토양, 같은 도움을 주면 내 땅에서도 그 장미가 자랄 수 있단 것이냐.”

    “일단은…… 그럴 것 같습니다, 폐하.”

    “좋다. 네가 꽃을 피우면 널 노아에게 돌려보내지. 장미 종자도 덤으로 주고.”

    “저…… 폐하. 꽃은 피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렇게 오래 머무는 건 조금 곤란합니다. 부디 싹이 나면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싹은 나도 틔웠다. 그 이후가 문제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드는 레온을 보며 낙심했다. 혹시 몰라 약을 가져오기는 했는데……. 남은 날수를 세어 보던 이엘은 저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정말 한계까지 왔다.

    그런 이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레온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나? 노아가 얼마나 잘해 줬길래. 그의 부드러운 금안에 묘한 기색이 돌았다. 내 영지가 그렇게 형편없진 않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엘타와 새끼 테르들이 널 찾던데.”

    “아, 어제 제대로 인사도 못 해서…….”

    “식사 후에 다녀오도록 해. 허락할 테니 새끼들은 자유롭게 만나도 좋다.”

    그때 보니 새끼들과 제법 잘 지내던 것 같다. 이걸로 조금 마음이 열렸으려나. 잘 모르겠다. 그래서 레온은 또 쓸데없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나드의 산책도 네가 담당하도록 해라.”

    “네? 제가요?”

    “왜. 꺼려져?”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맡겨 주실 줄 몰랐습니다.”

    나드는 특별한 새끼였다. 영원히 성체로 자라지 못할, 평생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할 새끼인 탓에. 불현듯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이엘이 입술을 깨물자, 레온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뭐, 레니도 함께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도 조금의 신의를 얻었다는 생각에 이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레온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뭐? 대신 붙잡혔다니 뭔 소리야!”

    노아가 고함을 버럭 지르자 귀퉁이에서 뒹굴거리던 테르들이 화들짝 놀라며 집무실을 빠르게 뛰쳐나갔다. 이 망할 용 새끼가, 진짜. 노아는 아직도 하늘 위에 떠 있는 밀로를 생각하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애당초 저렇게 용으로 변해서 돌아오면 될 일 아니었나. 이엘과의 관계는 또 어떻게 걸린 거냐고.

    “죄송합니다, 폐하. 레온 님이 너무 강경하셔서…… 화가 단단히 나셨습니다.”

    “갈기를 훔치려 했다고? 미쳤군, 제대로 미쳤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모른다는 건가? 용들은 다 저렇게 멍청하고 어리석나? 빌어먹을!”

    드물게 흥분해서 욕설을 내뱉는 왕을 보며 앤디가 우그러들 듯 어깨를 말았다.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질 것처럼 화가 난 노아가 퍽 낯설었다.

    사실 앤디가 별 걱정 하지 않고 돌아왔던 건 상대가 레온이었기 때문이다. 노아와 레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고 동맹관계를 우선으로 여기는 이성적인 왕들이었다. 로빈도 아니고 레온에게 잡혔으니 이엘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물론 처음부터 다짜고짜 이엘의 목숨을 운운하던 게 못내 걸리긴 했다마는.

    “그래서 넌 멍청하게 오헬이 남겠다는데도 저 빌어먹을 용만 챙겨서 돌아왔나?”

    “폐하. 공작은……,”

    “시끄러워.”

    안드로의 입까지 다물게 만든 노아가 한참이나 씨근덕거렸다. 레온이 제 편지를 읽고 태도를 누그러뜨렸다는 이야기에 이엘의 목숨 자체가 걱정이 된 건 아니었다. 다만 노아는 지금 이엘의 상황이 걱정돼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약이 얼마나 남았을지 자신도 잘 모르는데……. 오드에게 전해 듣기론 간신히 버티며 약을 아끼고 있단다. 그 상황에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인질 신세가 되었다니.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노아는 착잡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꽤 긴 침묵이 흘렀다. 앤디는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여 왕의 노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노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짧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말없이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교적 따뜻한 바람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노아는 가만히 하늘을 가린 무언가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밀로는 지금 반성 중인 거야? 아니면 항명하는 건가?”

    “저 나름대로 반성 중인 듯합니다. 레온 님의 영지를 나오자마자 용으로 변해 저를 물어 이곳에 떨어뜨렸거든요. 영지로 돌아오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용으로 돌아가는 걸 택한 것 같습니다. 오헬이 한 소리 한 덕분에 기가 많이 죽었어요.”

    “가서 놈에게 전해. 할 일이 있으니까 날 따라오라고.”

    “설마 하이에나의 일에 밀로를 데려가시려고 합니까?”

    안드로의 물음에 노아는 대답이 없었다. 물론 하이에나의 앞에 용 자체를 데리고 갈 순 없다. 거듭 말하지만 이종족들은 용이 아직도 여기 남아 있다는 걸 알면 제 종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다짜고짜 공격부터 퍼부을 것이다. 자칫하면 용을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늑대들도 그 복수 대상이 될 수 있고.

    “하늘 위에서 수색하라고 전해. 밀로도 턱수염을 본 적이 있다며. 얼굴쯤은 알고 있겠지. 구름에 숨어서 하이에나에겐 들키지 않되, 최대한 빨리 찾아내라고 해.”

    “예.”

    앤디가 고개를 숙이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여간 일이 참 복잡하게 됐다. 하필 건드려도 그걸 건드려. 레온은 자신에 비하면 온화한 편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 종족에 한해서였다. 타 종족, 그것도 인간에겐―밀로를 인간으로 알고 있을 테니―자비라는 단어를 쓸 줄 모르는 왕이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의 안부보다는…… 아, 됐다. 이런 생각은 하질 말아야지. 노아는 마른세수하듯 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문득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정원에 시선을 박았다.

    장미 종자. 그게 뭐라고 그녀도 저도 이렇게나 집착하는 건지.

    노아는 되도록 그녀의 정원이 화려하고 아름답길 바랐다. 소박한 걸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녀에겐 좋은 것만 주고 싶었으니까. 붉은 장미는 그런 의미였다. 왜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붉은 장미겠는가. 그토록 아름다우니 보통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꽃이 되었지.

    과거 늑대가 공작이던 시절, 황실로부터 충성을 인정받아 장미 종자를 선물로 받았다고 했다. 붉은 장미는 오직 황가의 정원에만 피는 꽃이므로 늑대들이 받기 전까진 평민은 절대 상상도 하지 못할 존재였다. 그런 장미를 선물로 받았다는 건, 당시 늑대와 인간이 꽤 깊은 관계였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기어이…….

    ‘노아.’

    ‘어찌 고귀한 인간께서 이종족 따위에 관심을 두십니까.’

    ‘…….’

    ‘먼저 가겠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절친한 친우였던 루시우스 러셀 후작과는 그 이후로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그도 결국 인간이었다. 청렴하고 곧은 성품이라 명성이 자자했으나 그 역시 인간일 뿐이다. 이종족에 관해선 역시 인간답게 행동했다.

    생각해 보면 1차 전쟁이 있기 전에도, 그러니까 그가 떠났던 토벌전도 그랬다. 차라리 그때 너와의 우정을 저버렸다면……. 일찌감치 연을 끊었어야 했나. 그래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도.

    “폐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불면증이 다시 도지셨습니까?”

    “그러게. 며칠 안 봤다고 그새 도졌군.”

    “…….”

    “뱀들의 동태는 어때.”

    “여전합니다. 여전히 경비는 삼엄하고 움직임은 조용합니다. 세잔티노 사건은 없었던 것처럼 작은 동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분명 인간 여자를 들먹였어. 언제쯤 받아 볼 수 있냐는 소리까지 했지.”

    “역시 실험을 포기한 게 아니군요.”

    “아마도 반쯤은 성공한 게 아닌가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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