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렇게 불렸어.”
돌아선 레온의 얼굴엔 슬픈 기색이 아주 잠깐 머물다가 떠났다. 찰나의 표정을 마주한 이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드는 내가 실험실을 습격해 데려온 마지막 타이곤이야.”
“…….”
“그 애는 드물게 사랑에 빠진 사자 모친과 호랑이 부친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반복된 실험으로 비정상인 상태로 태어났어.”
어느새 나드가 색색 고른 숨을 쉬며 잠에 빠져 있었다. 이엘이 처음 보는 가장 예쁜 얼굴로. 천사라고 불리는 존재를 볼 수 있다면 마치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장 예쁘고 가장 평온해 보였다.
“우논이지만 단명할 거고, 더 성장할 수 없으며, 말도 못 할 거야. 평생 대소변도 못 가리는 아기로만 살 테지.”
“…….”
“전혀 귀엽지 않은 인생이야. 나드는…… 평생 저렇게 살아야 하니까.”
실험실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이엘은 제 목구멍이 무언가로 막힌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그렇게 악명 높았던 실험실의 산증인이었다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이렇게 되었다고……. 이엘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팔로 나드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죄송해요.”
“뭐가?”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런 마음 가지라고 말한 거 아냐. 신경 쓰지 마.”
레온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새근새근 잠든 나드를 건네받았다. 이엘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도 같은 인간이라 죄책감이라도 드는 걸까. 레온은 이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단을 지나치니 너른 밭이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져 있다. 가꾼다고 가꿨는데 역시 인간들의 일은 손에 익지 않는다. 엉성한 밭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루나의 정원이 떠올랐다. 레온에게도 의미가 있는 장소였던 그곳은 어떻게 됐을까. 종족회의 땐 제법 이전의 모양새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고 보니 정원은 어떻게 됐어? 뱀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
“오헬.”
“…….”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레온이 다시 몸을 돌렸다. 아직도 저 멀리 멍청하게 서 있는 이엘이 보였다. 단순히 동족을 대신한 죄책감이라기엔 낯이 더 나빴다. 마치 자신이 나드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듯 손끝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레온은 성큼성큼 걸어 그녀의 앞에 섰다.
“이봐.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안 들려?”
“아……. 죄, 죄송합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넋 놓고 있다간 호랑이한테 잡아먹힐걸.”
“네…….”
안쓰러운 얼굴이었지만 레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 부분에 관해서는 자신이 관대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까. 어쩌면 인간들 중 하나쯤은 저런 얼굴로 죄책감을 갖고 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물론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해 버린 것 같아 제 기분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뭐라고 말씀하셨죠?”
“정원 말이야. 여기서 훔쳐 간 장미는 잘 있냐고.”
“아…… 잘 자라다가 죽었어요. 습격을 고스란히 받았거든요.”
“그래? 아쉽게 됐네. 그거 때문에 몰래 왕의 창고까지 숨어들었으면서.”
“남는 종자는 없을까요?”
“또 훔치게?”
“아니요. 이번엔 폐하께 정당하게 허락받고 가져가려구요. 노아 님께서 아마도 여기에 있을 거라고 하셨거든요. 폐하께서 허락해 주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갖고 있던 종자 중 일부는 남겨 두었다. 그리고 또 일부는 화단에 심었고. 안타깝게도 개화하진 못했다. 꽃을 피우는 건 의외로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로운 일이었다. 어릴 적에 어깨 너머로 루나의 정원을 보고 자라, 그녀의 흉내라도 내고 싶었지만 만만치 않았다.
캥! 캥! 별안간 레온의 품에서 쿨쿨 자던 나드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재채기를 몇 번 했다. 이엘이 쪼르르 다가와 어깨에 걸쳤던 로브를 풀어 나드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도닥도닥, 그녀의 다정한 손짓에 나드가 다시 눈을 감았다. 파르르 몸을 떨던 새끼는 다시 포근한 레온의 품 안으로 낑낑거리며 파고들었다.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감기 걸릴 것 같은데.”
“장미 말이야.”
“네?”
“어떻게 피웠어?”
뜬금없이 장미 이야기를 꺼내는 레온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해가 지니 슬슬 기온이 내려간다. 이러다가 정말 나드가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걱정이 묻은 얼굴로 나드를 한 번 내려보고 다시 레온을 올려봤다.
“우선은 나드를 안으로 데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 폐하께서 장미에 관심이 많으시거든.”
“그래요? 의외네요. 그런 건 전혀 관심 없게 생기셨던데.”
“가면으로 가려서 얼굴도 못 봤으면서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제가 폐하를 알현하는 걸, 레니 님도 보셨어요?”
“…….”
“뭐, 그렇죠. 제대로 보진 않았으니까.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데.”
“아무튼 내일 아침이 되면 폐하께 말씀드려 봐.”
“뭘요?”
“장미. 네가 피울 수 있다고.”
뜬금없이요? 이엘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갑자기 왕을 뵈러 가서 ‘저 장미를 피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보다는 나드가 더 걱정인데.
이엘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나드를 보았다. 어느새 코까지 골며 속 편하게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터졌다.
레온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땐 고집스럽고 생기 하나 없더니, 저렇게 웃음이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엘타 때도 그렇고, 새끼들을 좋아하나. 레온은 그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또 누가 알아? 폐하께서 너그럽게 널 보내 주실지.”
“장미를 피웠다고 보내 주신다고요? 설마요.”
“우리 폐하는 의외로 너그러우셔.”
“그건 레니 님과 같은 동족에 한해서 아닐까요?”
레온이 살짝 기분이 상한 건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의 말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제 품에 안긴 나드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물론 나드는 평생 자라지 못할 새끼이긴 했지만 우논은 우논이다. 감기에 쉽게 걸릴 리도 없고, 설령 걸린다고 해도 인간보다 더 빨리 회복할 텐데. 게다가 이 정도 기온에 감기가 걸리는 건 인간처럼 약한 종족밖에 없을 것이다.
“오헬. 내 말 듣고 있어?”
“그럼요. 레니. 저한테 나드를 주실래요?”
레온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꼬박꼬박 ‘님’ 자를 붙이면서도 이따금 허물없이 제 이름을 부를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루나가 죽고 나선 아무도 그렇게 불러 준 적이 없는데……. 그래서였나. 레온은 아무 말 없이 이엘에게 나드를 건네고 말았다.
아이구, 자는 모습도 사랑스러워. 이엘이 오물오물 입을 벌리며 잠꼬대를 하는 나드를 보더니 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따뜻한 봄바람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석양을 등지고 선 이엘이 나드에게서 시선을 좀처럼 떼지 않았다. 레온은 문득 저 작은 새끼가 부러워졌다.
……아니, 왜……?
“레니 님?”
“…….”
“레니 님? 안 들어가세요?”
당황한 레온이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자, 이엘이 그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녹색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얼비쳤다.
검은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처음 봤을 때부터 기분 나쁜 조합이었다. 레온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조합. 인간 중에서도 제일 끔찍한 황족과 더러운 뱀의 피. 그 둘만 갖는 조합이었으니까.
“너, 뱀의 혼혈이야?”
“네? 아…… 아뇨. 뱀의 혼혈도 아니고 황족도 아니에요. 그런 오해를 많이 받지만요.”
여태 아무 말 않다가 갑자기…… 가까워져서 그런가. 황급히 이엘이 눈을 돌렸다. 녹색 눈동자가 희귀한 건 아니었지만 황족 직계의 에메랄드빛은 확실히 보기 드문 색이다. 괜히 의심을 사기 싫어 눈을 피해 버렸다.
“잠깐만.”
레온이 긴 손가락을 뻗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그는 검지로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조금 걷어 주었다.
“정말 혼혈이 아니라고?”
“네. 아니에요. 그냥 인간이에요, 전.”
“…….”
“들어가요, 레니 님. 나드가 감기에 걸리겠어요, 정말.”
눈에 띄게 자신을 피하는 모습이다. 레온은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상하다. 그 머리색, 그 눈동자 색.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데, 왜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건지. 오히려 그림처럼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제정신이 아니네. 빠르게 생각을 덮어 버렸다.
*
새벽 일찍 눈을 뜬 이엘은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왔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노아의 성과는 달리 이곳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변함없이 고요한 것 같다. 르네의 왕성처럼 밤엔 아무도 머물지 않는 건지, 이른 새벽까지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1층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계단 하나를 앞두고 멈춰 섰다. 이대로 허락 없이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왕이 나오라고 말할 때까진 방에 있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제법 일찍 일어났군.”
위층에서 낮은 미성이 들렸다. 고개만 위로 쏙 쳐든 이엘이 검은 가면을 발견하곤 예법에 맞춰 인사를 했다.
“왕을 뵙습니다.”
“잠자리가 불편했나.”
“아닙니다. 편하게 머물렀습니다.”
어제 알현실에선 밀로와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던 터라 의도치 않게 무례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밀로가 훔치려던 게 기껏해야 보석 정도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뭣하면 피시에게 받은 걸로―물론 피시에겐 조금 미안하겠지만―충분히 보상하려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 목숨을 운운하며 트집 잡는 레온에게 다소 무례하게 말대답을 했다.
하지만 밀로가 훔치려던 게 타이곤의 갈기라면……. 레온이 예민하게 구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목숨을 거론한 것 역시. 오히려 제 말투를 지적하지 않은 레온이 너그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온 검은 가면의 남자는 그녀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제처럼 단정하고 깔끔한 제복 차림으로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제 등장으로 어깨를 옹송그린 이엘을 보며 레온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네 목숨으로 장난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나를 못 믿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