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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20화 (120/488)
  • 120화

    뒤따라 들어온 앤디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쨌든 밀로의 보호자는 이엘이니 소식을 전해 준 모양이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실내용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이었다.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구석에 둔 슬리퍼 하나를 집어 들고 그녀의 앞에 내려 주었다.

    “일단 진정하고 앉아. 머리는 또 왜 그렇게 산발이야.”

    습관처럼 그녀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노아의 손을 치우고 이엘이 다급하게 매달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이렇게까지 걱정이 섞인 얼굴은 정말 처음 본다. 괜히 질투 나게 하네. 노아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들은 대로. 그쪽 영지에 붙잡혔어.”

    “분명 미르는 고향에 다녀온다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내가 알기론 걔네 고향이 그쪽은 절대 아니거든.”

    워낙 신출귀몰해서 정확히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모여 사는지는 알려진 게 전혀 없었지만 적어도 레온의 영지와 무관하다는 것쯤은 확신한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길 기어들어 간 건지 노아도 모르겠다.

    “그럼 거기 왕께서 미르를 어떻게 하신다고……,”

    “사형시키고 싶다는데.”

    “맙소사.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그리고 당연히 불가능하다. 밀로 놈이 순순히 목을 내놓을 놈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그쪽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까지도 가능한 종족인데, 뭐. 오히려 사형시킨다고 나서면 그쪽이 곤란해질 것이다. 웬만해선 용은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종족이니.

    아무튼 이엘은 놈의 정체가 뭔지 모르니 저렇게 걱정을 하는 것일 테지만 노아가 보기엔 쓸데없는 걱정이다. 레온을 적당히 타일러 돌려받는 쪽으로 생각해야지.

    “안 그래도 장미 종자 때문에 다녀올 생각이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기다려.”

    “제가 가겠습니다.”

    “또. 쓸데없는 곳에 힘쓰지 말라니까.”

    “쓸데없지 않아요. 제 동생이에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오헬. 넌 그게 뭔지는 알고 감싸는 거야?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한 게 아냐.”

    “편지에 제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서요.”

    그 말에 노아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앤디를 쏘아보자, 앤디는 겸연쩍게 웃으며 왕의 시선을 피했다. 쓸데없는 말까지 싹 다 말했군. 노아가 혀를 차며 집무실에 있던 자들을 전부 내쫓았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겨지자 노아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달랬다.

    “그건 그냥 아무 뜻 없이 한 말이야. 넌 여기 있도록 해. 약도 얼마 안 남았잖아.”

    “금세 다녀올 수 있어요. 제가 가면 바로 풀어 주신다고 하셨다면서요.”

    “…….”

    “폐하, 제발……. 미르는 제 소중한 동생이에요.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순 없습니다.”

    레온의 편지엔 이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체 밀로 놈이 그녀와 엮여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그리고 왜 이엘을 굳이 지목한 건지. 이번엔 노아도 레온의 속마음을 모르겠다. 설마 관심을 가진 건 아닐 테고.

    노아는 레온과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레온의 아버지가 연구실을 습격해 어린 레온을 빼돌려, 자신의 친구였던 노아의 부모에게 그를 맡겼다. 그 이후로 레온은 이 영지에서 노아와 함께 자랐다. 때론 형제처럼, 때론 친구처럼. 눈만 마주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였다.

    그러나 그게 종족을 넘어서진 못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계일 뿐, 그 안에 종족이 묶여 있으면 다 부질없는 관계다.

    노아는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레온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걸 무시하고 자신이 가 봤자 밀로를 쉽게 돌려받긴 어려울 것이다. 한번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정말 하는 놈이니.

    게다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왔다면 밀로가 무언가 건드려선 안 되는 걸 건드렸다는 뜻인데…….

    “좋아. 그럼 같이 가지.”

    “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았다. 함께 가려던 노아의 발목이 잡힌 것이다.

    “뭐? 턱수염이 도망쳤다고?”

    “네. 세잔티노에서 목숨을 부지한 인간들은 하이에나가 모조리 처리했는데, 턱수염은 중간에 놓쳤다고 합니다.”

    “위치는?”

    “릴프 강에서 사라졌답니다. 분노한 넷째 왕자가 병력을 끌고 샅샅이 뒤지는 중인데 좀처럼 쉽지 않답니다. 폐하께 도움 요청을 보냈습니다.”

    “요청이 아니라 강요겠지.”

    하트와 피시가 묵인했지만 넷째 패티스는 늑대들의 침입을 뒤늦게 알았을 것이다. 두 왕자의 허락하에 진행된 일이니 그걸 걸고넘어질 순 없다 이거지. 그러니 괜히 별일 아닌 걸로 트집 잡는 셈이다. 그깟 인간 하나 처리 못할 정도도 아니면서. 노아는 골치가 아팠다. 여기나 저기나 사고 치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오헬을 혼자 보낼 순 없어.”

    “오드를 함께 보내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냐. 오드는 성전에 남는 게 나아. 보호석 때문에 힘을 너무 많이 썼으니 성전에서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앤디를 보낼까요? 아니면 제가 가겠습니다.”

    “형을 어떻게 보내?”

    어이가 없어서 오랜만에 웃음이 터졌다. 안드로와 오헬이라니. 말만 안 할 뿐이지, 둘은 상극이었다. 일을 하는 것엔 제법 호흡이 맞는 것 같았으나 그 외의 것은 전부 엉망이었다. 실소하듯 웃던 노아가 짧게 한숨을 쉬며 손을 흔들었다.

    “앤디를 함께 보내. 이전에 레온이 오헬을 직접 초대한다고까지 말했으니 크게 걱정은 안 되지만, 문제는 밀로야. 대체 뭘 건드린 거야.”

    “용이 다 그렇죠.”

    결국 노아 대신 앤디가 함께 가게 되었다. 가벼운 짐을 챙겨 나온 이엘은 홀에 찾아온 오드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몸이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아직 많이 움직이면 안 될 텐데. 그녀의 걱정에도 오드는 빙긋 웃었다.

    “그쪽으로 이동시켜 줄게, 엘.”

    “안 돼. 아직 몸이 다 나은 것도 아니잖아. 거리도 여기서 꽤 먼데. 무리하면 안 돼, 오드.”

    “괜찮아, 이 정도는. 시간을 단축하는 게 좋아. 그렇게 하자, 엘.”

    오드도 슬슬 약효를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그녀가 억지로 날짜를 늘리며 약을 아끼고 있단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드 역시 노아처럼 이엘이 레온의 영지로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걸 최대한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안쓰럽게 웃으며 앤디와 이엘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쨌든 전령으로 가는 것과 다름없으니 노아는 이것저것 잔뜩 챙겨 앤디에게 건넸다. 전에 빈손으로 떠났던 것에 비하면 꽤 귀빈으로 가는 셈이다. 끝으로 노아는 친서를 이엘에게 주었다.

    “분명 널 초대한 적이 있었으니 그 말을 무르진 않을 거야. 전처럼 함부로 무시하진 못할 테지. 그럴 성격도 아니고. 앤디가 있으니 여차하면 밀로를 데리고 도망쳐 와. 괜찮으니까.”

    “그러면 동맹관계가 깨지지 않을까요?”

    “이런 이유로 깨질 얄팍한 관계는 아니니 걱정 말고.”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왜 레온은 이엘을 콕 찍어 지명했을까. 예전부터 이상한 방향 쪽으론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노아는 피곤한 듯 깊은 한숨을 쉬다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라도 같이 가면 좀 좋을까. 왜 하필 이런 때 하이에나들은……. 도움이 되질 않는다니까.

    이엘은 노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저 멀리 서 있던 스완에게 시선을 돌려 손짓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 끝에 이엘의 곁으로 다가왔다.

    “넌 왜 자꾸 사서 고생하는 거야?”

    스완은 미간을 잔뜩 좁힌 얼굴로 괜히 툴툴거렸다. 인간들은 제 목숨을 가장 아낀다고 들었는데 대체 쟨 왜 저렇게 나서는 건지 모르겠다. 호랑이와 사자는 먹이사슬의 상위 중에서도 최상위였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스완도 함께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엘은 미안한 듯 스완의 손을 토닥토닥 다독거렸다.

    “금방 올게. 걱정 마. 목숨 하난 꼭 부지할 테니까.”

    “그냥 내가 환각을 써서 홀리면 안 돼? 그사이에 밀론가 뭔가, 걔 데려오면 되잖아.”

    “그쪽은 늑대와 동맹관계야. 그런 식으로 속이는 건 안 돼. 미안, 스완. 금방 올게.”

    착잡한 얼굴로 스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원정으로 저 소년의 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짐작했고, 쉽게 죽을 성격이 아니란 것도 확인했다. 솔직히 지금은 이엘과 연결된 자신의 목숨이 염려된다기보다는…… 그냥 걱정이 앞섰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선.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편 이번엔 몰려들었던 새끼 테르들이 그녀의 옷자락을 이빨로 물며 저도 데려가 달라 아우성이었다. 개중엔 이제 새끼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다 자란 성체도 있어서 저가 도움이 될 거라며 이엘에게 매달리기도 했다.

    “폐하! 제가 같이 가고 싶어요!”

    “아니에요. 제가 갈래요!”

    “폐하! 이번엔 저희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네?”

    “야, 꼬맹이들. 너희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나서냐? 그쪽 종족이 얼마나 포악한데.”

    앤디가 적당히 꾸짖으며 말렸지만 새끼들은 막무가내였다. 저번 원정 때도 두고 가더니 이번에도 두고 가냐면서 이엘의 옷자락에 매달려 고집을 부렸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새끼들까지 난동을 부리니 슬슬 노아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직전이었다. 왕의 눈치를 보며 앤디가 테르들의 꼬리를 잡아당기려 손을 뻗을 때였다.

    “그만. 고집부리지 말고 물러나.”

    “…….”

    “어서.”

    제법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 새끼들이 꼬리를 내리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깨갱, 기가 죽은 울음소리까지 내며 울상을 지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정원을 잘 부탁해, 로니.”

    “그치마안…….”

    “얌전히 기다릴 거지?”

    다정하지만 또 냉정한 이엘의 목소리에 로날드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완전히 물러섰다. 착하네, 로니. 이엘이 웃으며 로날드의 털을 쓰다듬자 금세 기분이 좋아진 건지 하울링까지 했다.

    참, 기가 막히네. 앤디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된 테르가 우논인 내 말보다 인간의 말을 더 잘 듣냐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이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일일이 저를 붙잡고 칭얼거리던 늑대들을 안아 주며 다독거려 주었다. 마치 주인하고 떨어지는 개라도 된 것처럼 늑대들은 기운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겨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흔드는 것도 처량해 보일 정도였다.

    “다녀올게요, 폐하. 금방 오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늦어지면 데리러 갈 테니.”

    “아니에요. 폐하께선 하이에나들과 일 마무리하시는 것에 집중하세요. 미르는 제가 반드시 데려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엘이 앤디와 함께 오드와 나란히 섰다. 오드는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세 사람을 이동시킨 오드의 성력이 이번엔 다소 느리게 느껴졌다. 더부룩한 느낌을 한참이나 받고 나서야 마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역시 오드의 몸이 아직도 좋지 않은 걸까. 그녀의 걱정 어린 시선에 오드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할게, 엘.”

    “고마워, 오드. 걱정 말고 푹 쉬어. 미안해.”

    오드는 이엘을 한 번 끌어안아 주곤 마찬가지로 지팡이를 바닥에 찍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레온 님은 타 종족에 관해선 너그럽지 않으신 분인데. 어쩌다 밀로는 그런 레온 님한테 걸린 거야.”

    “역시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같이 갔어야 했는데.”

    “하여간 그 철없는 놈. 내 동생이었으면 진짜 주먹으로 벌써 한 대 맞았어.”

    주먹을 쥐고 허공에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하는 앤디를 보며 이엘이 작게 웃었다. 그녀는 앤디와 함께 붉은 성벽 근처로 다가갔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영지를 둘러싸고 있는 이 붉은 성벽은 그 위용도 대단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왔을 땐 비를 맞으며 허겁지겁 이 성벽에서 뛰어내렸지. 노아가 마중 나왔었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게 변했다. 노아도, 자신도.

    며칠 전 꽃밭에서 있었던 충동적인 입맞춤이 생각났다. 마음이 많이 흐트러진 탓에 그를 받아 주고 말았다. 가만히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이엘은 또 불쑥 제 머릿속을 찾아온 르네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모호한 관계는 세 사람 모두에게 불안만 안겨 줄 뿐이다.

    “계십니까!”

    앤디가 커다란 성문을 쿵쿵 두드렸다. 이엘은 상념에서 벗어나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전에 왔을 땐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았지. 그야말로 문전박대였다. 이번엔 어떻게 나오나 슬쩍 궁금했다. 그래서 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앤디의 옆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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