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언제나 말리는 기분이다.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자 노아가 또 시원하게 웃었다. 산책을 나가는 차림이 맞는지 의문이 갈 정도로 그는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를 쳐다보았다.
“어딜 가시려고요?”
“봄이 끝났잖아.”
“…….”
“늦었지만 전에 말했던 대로 꽃구경이라도 다녀오자.”
“업무가 많이 밀리지 않으셨어요? 안드로 님이 요즘 바쁘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안드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엘의 방문을 두드리던 늑대들 중 하나였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무튼 일이 많다며 빨리 몸 회복하라고 한 소리 하고 나가기 일쑤였다. 잔소리처럼 느껴졌지만 딱히 싫진 않았다. 안드로의 말처럼 차라리 일에 매진해 모든 걸 잊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니까.
“내가 왕인데 저가 뭘 어쩌겠어.”
가끔 보면 폐하는 참 무서운 상사예요. 이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노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안드로는 일중독자라 상관없어. 노아의 말에 이엘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의한다. 그 사람은 정말 일중독자다.
“아, 그리고 네가 주었던 꽃 말인데.”
“네.”
“어제 다시 폈어.”
“그래요? 무슨 꽃이었어요?”
“시클라멘이라던데. 붉은 꽃이고 테두리가 예뻐. 온도를 조절해 줬더니 다시 개화했어.”
“보고 싶어요.”
“언제든. 보러 와.”
“폐하께서 주셨던 장미는 이제 영영 못 보겠죠.”
“아, 그 장미 말인데.”
노아가 살짝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전쟁으로 정원은 쑥대밭이 되었다. 지금이야 다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그땐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그곳에 자랐던 장미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불탔다. 심지어 이엘이 노아에게 받았던 그 한 송이마저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아마도 이제 붉은 장미는 영영 보지 못할 테지. 원래 붉은 장미는 황족의 상징이었고 황실에서만 자라던 꽃이었으니, 이제 평생 보지 못할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만간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네? 가져온다니요?”
“호랑이와 사자의 영지에 아직 남아 있어.”
“남았다구요? 정말요?”
“그래. 그쪽 왕 취미가 정원 가꾸기거든.”
레온은 어릴 때부터 노아의 어미를 잘 따랐다. 온화한 성정의 그녀와 비슷한 취향을 추구했다. 정원도 일종의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원체 레온이 사는 땅이 비옥하기도 했고. 육식동물인 그들의 땅이 농업이 발달했다―발달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한참 모자라지만, 이종족치고는―는 건 꽤 우스운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쪽 왕의 취미가 그랬다.
“아마 장미 종자도 남아 있을 거야.”
“그럼 제가 또……,”
“가서 또 훔치려고?”
그가 피식 웃자 이엘은 입술을 깨물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맞아. 나 그거 훔친 거였지. 왕의 창고를 뒤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꽤 절박하긴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엘타의 일로 그쪽 왕이 자신의 방문을 허락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훔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받아 오면 되잖아요.”
“글쎄. 이번엔 내가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만 보내긴 좀 안 내켜서.”
“어째서……,”
“약이 얼마 남지 않았지?”
그의 물음에 이엘은 말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였다. 얼마 남지 않은 약으로 꽤 긴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아서 아껴 먹는 중이었다. 결국 나중엔 약이 없는 상태로 견뎌야겠지. 어차피 처음부터 이 약은 보너스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몸을 사리라는 뜻인가요?”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지.”
“…….”
“되도록 쓸데없는 곳엔 힘쓰지 말란 의미기도 하고.”
“네.”
맞는 말이다. 앞으로의 일을 타개하려면 쓸데없는 곳에 힘을 써선 안 된다. 두 사람은 대화를 하는 동안 어느새 성문 앞에 도착했다. 둘을 알아본 위병이 문을 열었고 노아는 그녀를 끌어 밖으로 나왔다. 늦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었다.
“좀 걸을까?”
노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영지만 나오면 늑대 등에 올라탔기 때문에 제대로 땅을 밟아 본 적이 없었다. 폭신폭신한 흙을 지나 너른 들판을 건넜다. 노아는 갖고 왔던 양산을 펴 주려 했지만 이엘이 웃으며 거절했다. 그의 말처럼 정말 햇빛을 쐬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세잔티노는 그 뒤로 어떻게 됐어요?”
“예상대로. 완전히 무너졌지.”
“하이에나와 뱀도 마찰이 있었다던데. 괜찮을까요?”
“어차피 두 종족은 언젠가 부딪칠 일이었어. 전쟁 이후로 말이 많았으니까. 굳이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다른 우논 님들이 하는 이야길 들었어요. 아예 싹을 잘라 내자고 하시는 말.”
방 안에만 있었지만 큰 소리는 흘러 흘러 들었다. 세잔티노에서 돌아오는 날부터 늑대들은 심각하게 편이 갈렸다. 지금처럼 특별하게 굴지 말자는 입장과 아예 인간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자는 입장. 이번 원정으로 여론이 극심하게 들끓었다.
그걸 막고자 떠났던 원정이었는데. 그 누구도 더는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떠났던 원정이었는데. 결국 장작에 불만 지핀 꼴이 되었다.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네 판단이 가장 현명했다. 인간들이 뱀과 오래전부터 손을 잡았을 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보호석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으며 그 뱀이 인간들을 몰살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폐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딱히 이종족의 편에 선 게 아니에요.”
“알아.”
“하지만 인간들의 편에도 설 수 없죠.”
결국 모두가 평등하고 평온하길 바라는 멍청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간극이 점점 더 벌어져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겠죠.”
반란을 꿈꾸는 게 어디 턱수염 일당뿐일까. 천성이 위에서 군림하며 살았던 인간들이다. 그들이 아니어도, 지금도 어디선가 반란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동족이 짓밟히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더는 무력하게 목도할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종족을 외면하는 것 또한, 할 수 없었다.
“어쩌면 폐하와 다른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지?”
“그냥요. 그냥 제가 인간이고 폐하는 늑대이시니. 생각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엘이 빙긋 웃으며 다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노아는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제 손에서 사라진 온기를 가만히 움켜쥐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넓은 꽃밭에 들어왔다.
수만 가지 꽃들이 한데 엉켜 만개했다. 그 속에 폭 내려앉은 이엘이 고개 돌려 노아를 보며 생긋 웃었다. 힘없는 미소였다.
“정원에 옮겨 가도 될까요?”
“물론.”
노아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녀의 옆에 따라 앉았다. 말 못 하는 생명조차 소중하게 다루는 이엘을 쳐다보며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너와 우린 너무 다르군. 노아는 바닥에 떨어진 꽃 하나를 발견해 주워 들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은, 어제 막 핀 그 꽃과 똑 닮은 꽃이었다. 그는 그 꽃을 이엘에게 건넸다.
“같이 하자.”
“네?”
“네 뜻대로, 같이 하자고.”
“폐하.”
“네 생각을 닮고 싶어. 그렇게 할 테니, 떠날 것처럼 굴지 마.”
“…….”
“넌 정말 나비 같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나비 같아.”
“노아 님.”
“그럼 내가 기꺼이 꽃이 될 테니, 머물러만 줘.”
꽃을 건네받고 한참이나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도 노아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듯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엘의 목 뒤를 받치듯 단단하게 감싼 그의 손이 조금씩 그녀의 얼굴을 앞으로 당겼다.
노아가 고개를 틀어 가까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이엘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붙였다. 허락을 구했다. 제발 열어 달라고, 입술을 맞부딪친 채 야트막한 숨을 보냈다. 그의 간절한 애원에 녹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네가 원하는 대로, 그게 무엇이든 해 줄 테니.”
그러니 제발……. 입술이 맞닿은 채 낮게 속살거리는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내가 뭘 원하는 줄도 모르면서. 그게 누군가에게 화가 될 거고, 누군가에겐 벌이 될 수도 있는데. 머뭇거리는 그녀의 마음에 노아가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붙였다. 끝내 포기한 듯 눈을 감고 그녀가 입술을 열어 화답했다.
짧은 신음 소리가 입술을 타고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갈증이 난 것처럼 성마르게 달려들던 노아가 그녀의 입술을 깨물어 버린 탓에 언뜻 비린 피 맛이 느껴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모조리 흡입하기라도 할 요량으로 입 안을 샅샅이 헤집어 놓았다.
“함께 해.”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제 대답을 두려워한 남자가 빈틈이 생길 때마다 입술을 채워 먹어 버린 탓도 있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뜨겁고 열렬하게 헤집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며 이엘은 그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건 일시적인 감정일 것이다. 르네도, 노아도……. 나를 사랑해선 안 돼. 그건 너무 불우하잖아. 우리의 위치가 서로를 너무 불행하게 만들잖아. 힘에 밀려 꽃이 깔린 흙 위로 넘어가면서도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골치가 아프다. 이 망할 용은 끝까지……. 노아는 지끈지끈 아픈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가며 애써 화를 삭였다. 안드로는 잔에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네며 동시에 화근이 된 하얀 봉투를 왕의 시선에서 치워 버렸다.
“레온 님이 드물게 화가 나셨군요.”
“걘 원래 제 종족 아니면 가차 없어.”
목을 축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쩐다. 안드로의 말처럼 레온이 꽤 화가 난 모양이다. 대체 그 미친 용은 무슨 생각으로 거길 숨어든 거지? 그나마 정체를 안 들켜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밀로가 용이란 걸 알았더라면 레온은 단번에 놈의 목을 잘랐을 것이다. 2차 전쟁 때 워낙 많은 개체가 용들 때문에 죽어 버렸으니 그를 살려 둘 레온이 아니지.
모든 게 예민하니 밀로가 인간이 아닌 건 눈치챘겠지만.
아침부터 집무실이 시끄러웠던 것은 갑자기 날아든 레온의 편지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터놓을 수 있는 동맹관계인 늑대들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보낼 정도로 레온은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당연했다. 밀로가 레온의 영지로 함부로 찾아가 다짜고짜 무언가를 강탈하려 했다는데, 어느 왕의 눈이 안 뒤집히겠는가. 그것도 제 종족의 일엔 물불 안 가리는 레온인데.
“폐하!”
다소 흐트러진 차림으로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나 예의 바른 그녀가 오늘은 무례하게 문부터 벌컥 열어 버렸다. 안드로가 살짝 인상을 썼지만 달리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왕의 빈 잔에 물을 따라 줄 뿐이었다.
“미, 미르가 붙잡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