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8화 (118/488)

118화

“피시 님.”

이엘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피시의 고집은 꺾기 어려웠다. 결국 선물을 받겠노라는 답을 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새벽이었다.

늑대와 독수리들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엘은 여전히 시끄러운 땅 아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노아의 등 위에 올라탔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왕자님. 그럼 이만……,”

노아는 그녀가 인사를 제대로 끝마치기도 전에 릴프 강에 첨벙 뛰어들었다. 그를 신호로 늑대들은 스완을 챙겨 하나둘 릴프 강에 몸을 맡겼다. 연신 인사를 하는 하이에나를 무시한 채 노아와 늑대들은 고요한 릴프 강을 빠르게 건넜다.

“오헬.”

“네, 폐하. 말씀하세요.”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네 작전. 이루어지지 않았어.”

“앞으로는 제게 일을 맡기기 싫단 말씀이시군요.”

“약속했잖아.”

노아는 더 이상 이엘이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록 계획이 틀어져 다른 쪽에서 피를 흘리긴 했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다. 그는 억지를 부려 그녀를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엘은 대답 대신 다른 것을 털어놓았다.

“광장이 피바다가 되었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오헬.”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다 죽인 거야.”

뱀의 난입을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의 침입도 계획의 범위 안이었다. 뱀의 출현으로 인간과 뱀의 관계가 겉으로 드러날 거란 기대를 했으니까. 모호하게 밝혀진 정보가 더 정확해질 거라고만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그 뱀이 인간을 습격할 거라곤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그 광장이 피바다가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노아는 제 등에서 숨죽여 우는 이엘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동족이다. 아무리 악랄해도 인간은 그녀의 동족이었다. 이엘은 진심으로 이 현실이 비통해서 감히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비록 과거이나 자신은 분명한 황족이었다. 어느 황족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단 말인가. 자신의 스승 중 어떤 스승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제가 배신자예요. 같은 종족을 버렸어요.”

“나타니엘. 제발 그런 말은……,”

“저를 바라보며 살려 달라고 외치던 남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요. 충분히 구해 줄 수 있었는데도 저는 도망치는 걸 택했어요. 11년 전처럼 또…… 저만 살아남았어요.”

“네 탓이 아니야.”

“제 탓이에요. 제 아버지 탓이에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끔찍해진 건 다 제 잘못이에요.”

한순간, 11년 전 전쟁으로 인간이 모두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모두에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 누구도 남을 탓할 자격은 없는데. 나도 무죄하지 않은데 남을 정죄했다. 그래서 신께서 벌을 내리신 거야. 저들에겐 목숨을, 내겐 죄책감을.

인간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아득하게 남았다. 이엘은 제 귀를 틀어막으며 한참이나 숨죽여 울었다.

*

“몸은 좀 괜찮나?”

“네, 폐하. 살펴 주신 덕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침 예배를 마친 노아는 그를 배웅하는 오드의 안색을 살폈다. 이틀 전, 세잔티노에서 돌아오자마자 보호석을 파괴하느라 기운을 썼던 오드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망할 보호석은 나자르인들에게 여러 가지로 끔찍한 존재였다. 만드는 것도 문제고, 파괴하는 것도 문제고.

어쨌든 오드 덕에 가져왔던 보호석을 전부 파괴할 수 있었다. 노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오드는 빙그레 웃으며 넌지시 운을 뗐다.

“폐하. 엘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

오드가 금세 건강을 회복한 것과 달리 그녀는 오늘도 두문불출이었다. 오드가 쓰러지고 꽤 충격을 받았던 건지 이엘은 말없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지친 모양이지. 그날의 습격이 이래저래 그녀에겐 괴로웠을 테니.

“폐하께서 걱정하시니 금방 기운을 차릴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노아는 무능력한 자신을 자조하듯 힘없이 웃었다. 오드의 말대로 그녀는 자신의 출입만 허락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기운 없는 것도 여전했고 끼니를 굶고 잠만 자기를 이틀째였다. 여러모로 그날의 습격이 좋지 않은 결과만 가져온 것 같아, 노아도 슬슬 불안해지던 차였다.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면 어떠십니까?”

“산책? 뜬금없이.”

“폐하께서도 바쁜 일정으로 쉬지 못하셨으니 여독을 풀 겸 해서 다녀오십시오. 오헬도 함께요.”

오드가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거듭 권했다. 여독을 풀기 위해 산책을 다녀오라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뜻은 알겠다. 노아는 가만히 성전 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견이 좋은 네 말이니 들어 보도록 하지.”

*

커튼으로 커다란 창을 죄 가린 탓에 작은 빛도 들지 않았다. 이엘은 무겁게 내려앉은 몸을 그대로 이불 속에 파묻고 눈만 뜬 채로 숨만 쉬었다. 침대 옆에 있는 협탁이 일순 반짝였다. 정확히는 협탁 위에 놓인 얇고 긴 화살이. 이엘의 시선이 화살과 그 옆에 가지런히 올려 둔 손수건에 닿았다.

‘난 네가 늘 그리워.’

그 전쟁 통에 누군가의 애틋한 마음을 받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르네가 날 마음에 두었던 건. 호감 정도라고 생각했다. 밀로도, 노아도. 모두가 다 그냥 그 정도의 감정이라고. 이엘이 그들에게 갖는 감정의 정도라고. 너무 쉽게 치부했다.

‘내 곁으로 와. 나의 둥지는 네게 궁전이 되어 줄 것이다.’

언젠가 그가 이곳을 찾았을 때 했던 말과 똑같았다. 내게로 왔으면 해. 그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마음일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심란함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르네의 마음은 절대 받아 줄 수 없다. 지금의 자신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되지 못한다.

다시 그날을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무자비하게 살육하던 뱀들에게서 자신만 쏙 빠져 도망쳤다. 정말 내 자신이 이종족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쉽게 외면했다.

물론 그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죽어 마땅하다는 잣대는 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세상에 죽어도 되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 그게 그녀가 이 땅에 올라와 뼈저리게 느꼈던 진실이니까.

똑똑― 길게 늘어지는 노크 소리에도 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노아라면 들어올 테고 다른 늑대라면 말없이 돌아가겠지. 역시나 문고리가 돌아가며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침대까지 가까워진 남자는 깊은 한숨을 쉬며 침대 끄트머리에 풀썩 앉았다.

“나타니엘.”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이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은 몹시 피곤하고 쉬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피곤해?”

토닥토닥. 노아는 일정한 박자에 맞춰 시트를 도닥거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행동에 이엘은 또 눈물이 삐져나올 것만 같아서 입술을 깨물고 꾹 참았다. 자꾸만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게 싫었다.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으니까.

“얼굴 좀 보여 주면 안 될까.”

한 종족의 왕이 이렇게 애원해도 되는 건지. 그 생각에 이엘은 작게 웃으며 끝내 이불을 잡아 내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더운 숨이 엉겨 엉망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오랜만에 마주한 그녀를 향해 더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다정이란 단어가 참 안 어울리는데도, 그는 늘 그녀의 앞에선 어울리지 않게 굴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엉망이 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머리, 많이 자랐네. 감상하듯 운을 떼던 노아가 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슥 훔쳐 냈다. 눈물을 모른 척 넘겨 주고 싶었다.

“잠깐 산책 다녀올까, 엘.”

“다음에 갈게요. 죄송해요. 몸이 좋지 않아서.”

“햇빛 하나 쐬지 못하는데 몸이 좋을 리가 있나. 부디 내 소원이니 잠깐 다녀오도록 하자.”

무슨 소원씩이나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소원이란 말에 마음이 동했다. 이엘이 힘없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노아는 준비하고 내려오라며 친히 문까지 닫아 주고 나갔다. 마련된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이엘은 오랜만에 커튼을 전부 걷어 냈다. 아침인지 밤인지도 몰랐는데, 열고 보니 뜨겁게 해가 내리쬐고 있었다.

어느새 봄이 끝나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가만히 창밖만 응시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또 한 번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그녀의 목소리에 문이 열리고 피터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침대를 나온 이엘을 발견한 소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짓했다.

― 나가시려구요?

“응. 같이 갈래, 피터?”

―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피터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잽싸게 거절했다. 소년은 아직도 늑대의 왕이 두려웠다. 제 주인이 왕성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자신도 따라 들어오긴 했지만, 피터는 여전히 늑대들과 마주칠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피터를 살펴보던 이엘이 서랍 안에서 사탕을 꺼내 피터에게 주었다.

“나 올 때까지 맛있게 먹고 있어.”

― 감사합니다!

“착하네.”

피터가 헤벌쭉 웃었다. 저렇게 다정한 사람이 제 주인이라니. 솔직히 피터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몹시 좋았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매음굴에 팔려 가나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주인을 만나 호의호식하고 있으니. 늑대들은 무서웠지만 이곳에서 제 주인의 위치가 꽤 되는 모양인지 아무도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인은 오늘도 기운 없는 얼굴이었다. 며칠째 침실에서 나오지 않더니. 피터는 걱정이 묻은 얼굴로 이엘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엘은 대충 옷을 껴입더니 애써 웃으며 그를 향해 손 인사까지 해 주었다.

“다녀올게.”

꾸벅 인사를 하는 피터를 뒤로하고 이엘은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내려왔다. 정말 몸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노아의 말대로 어두운 곳에만 있어서 몸이 안 좋아진 건지. 아무튼 지금 몸 상태가 엉망인 건 확실했다. 발 하나 떼는 것도 천근만근 무거웠으니까.

“오헬.”

1층 홀에서 기다리던 노아가 그녀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이목구비가 워낙 또렷해 잘생겼다는 인상은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으니 오늘따라 유독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부터 반듯하게 자리 잡은 굵직한 선은 콧대 위에서 절경을 이루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던 선이 입술 끝에서 정점을 찍었다.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 끝이 뒤에서 비친 햇살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웠다. 웃는 게 드문 편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제 앞에서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노아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이엘을 향해 또 한 번 웃어 주었다. 그러곤 빠르게 계단을 올라와 마치 에스코트하듯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엘은 물끄러미 그 손을 보다가 흐릿한 미소와 함께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많이 기다리셨죠. 옷을 좀 갈아입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또 격식 차리는군.”

이제 노아도 그녀의 홀대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랑곳 않고 그는 다시 이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이엘은 노아의 손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내 손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데.”

“어찌 감히 왕의 손을 잡겠습니까.”

“감히 황족의 손을 잡고 싶은데, 나는.”

“…….”

“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