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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7화 (117/488)
  • 117화

    지난 두 차례의 뱀의 습격이 그러했듯 이곳도 화마를 피할 순 없었다. 한번 피어난 불꽃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섭게 내달리는 노아의 등에 올라타 자꾸만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완벽했던 성벽이 아지랑이에 휘말려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로스티 숲. 그 숲은 말이 많은 나무들과 보이지 않는 첩자들이 숨어 사는 곳이었다. 남자와 일부러 그 숲에서 만났던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정보가 뱀들에게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도박. 뱀이 본거지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도박.

    그 부분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어쩌면 그로 인해 더 큰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단 기대도 했다.

    하지만 뱀이 역으로 인간들을 습격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원하는 대로 내부 분열은 이루어졌군.”

    노아의 말에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뱀들이 저런 태도를 취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들의 목표였던 인간의 내부 분열은 반쯤 성공했다.

    황자의 반지를 가지고 도망쳤던 남자의 이름은 렉토스 리히만. 그자와 턱수염이 그들의 눈앞에서 대립한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 편을 꽤 만들었던 건지 렉토스의 곁으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인간들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인간들은 분열됐다.

    ‘이…… 이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가!’

    적당한 타이밍에 스완은 환각을 거두고 옆으로 빠졌다. 광장 밖에서 먼저 돌아왔던 이엘은 스완과 노아의 손에 이끌려 기둥 뒤에 숨어 인간들을 지켜보았다. 분노한 턱수염이 렉토스에게 달려들기도 전에 렉토스 일당들은 품에서 총을 꺼내 서로를 겨누었다.

    ‘버러지만도 못한 건 네놈이지. 감히 어디 천한 피가 귀족에게 함부로 눈깔을 돌려?’

    한참의 대치가 이어지는 듯했다. 머릿수로는 렉토스가 한참이나 밀렸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 터라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턱수염과 나머지 일당들은 급하게 귀빈을 맞이하느라 제대로 된 무기를 챙기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뒤통수에 눈을 부라리며 흉흉한 기세만 보일 뿐이었다.

    균열이 생긴 인간들은 서로를 불신하며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엘은 그들을 지켜보며 서둘러 빠져나갈 궁리를 마쳤다. 둘 중 하나가 공격하면 스완은 능력을 완전히 거두고 무리를 챙겨 다시 땅 위로 도망칠 것이다. 목표는 전원 무사 귀환. 그게 최우선이다.

    그러나 사건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누가 땅 아래에서 커다란 뱀이 기어 나올 줄 알았겠는가.

    “로빈이 왜 우릴 풀어 준 걸까요.”

    “변덕일 수도 있고, 그냥 심술일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마라.”

    노아와 하트는 숨이 벅차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네 사람이 성벽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곳까지 달리는 동안, 도망쳐 나온 늑대들이 하나둘 곁으로 모여들어 함께 달렸다. 일일이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잘된 모양이었다. 우논 몇 마리는 입에 보호석을 문 채로 뛰어왔다.

    들어왔던 입구는 무너져 버렸고 대신 공중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독수리들이 억지로 뚫어 버린 듯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적갈색 독수리가 순식간에 날아와 이엘을 발로 낚아챘다. 그리고 뒤를 이어 다른 독수리들이 달려오는 늑대들과 하이에나를 움켜쥐어 지상을 향해 날아올랐다.

    “오헬!”

    밖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절부절못하던 피시가 이엘을 부르며 달려왔다. 르네는 이엘을 안전하게 땅에 내려 주었다. 귀가 온통 먹먹했다. 오헬! 거듭 제 이름을 부르는 피시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러나 피로가 묻은 새파란 낯은 가릴 수 없었다.

    달려온 피시는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괜찮아? 응? 걱정이 잔뜩 묻은 물음에 이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엘은 돌아온 무리의 수를 파악했다. 잿더미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그녀의 주의대로 몸을 사렸던 건지 다친 개체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빠진 개체도 없었다. 모두가 무사히 귀환한 것이다. 게다가 납치되었던 타 종족의 새끼들까지 모두 안전하게 돌아왔다.

    이엘은 그제야 진이 다 빠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드가 이엘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수고했어, 엘.”

    “응. 다녀왔어, 오드.”

    그러나 이엘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깨물고 오들오들 떨었다. 이엘은 자꾸만 제 귓전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에 밭은 숨을 토해 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모두 무사하잖아. ……이쪽은 다 무사하니까 괜찮아. 스스로를 위로하며 애써 눈을 꾹 감았다.

    르네는 가만히 이엘을 바라보다가 무심한 시선을 땅에 박았다. 저 아래선 여전히 총격전과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호석이 해제되었기 때문에 뱀의 은신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능력으로 은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독수리들은 제 종족의 눈알을 챙기느라 다른 것에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뱀이 왜 그녀를 풀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르네는 로빈이 이엘에게 집착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녀를 잃을 뻔했다. 그 사실에 가슴이 선뜩했다.

    뱀의 습격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광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난 뒤였다. 급하게 불을 질러 모조리 태우고 르네는 서둘러 이엘을 소재를 파악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엘이 노아의 등에 올라타 광장을 빠져나오고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뭐야? 뱀이 왜 쳐들어와!”

    스완은 재로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마구 털면서 소리를 바락 내질렀다. 놀랄 만도 했다. 스완이 조금만 꾸물거렸다면 환각 능력을 쓰는 도중 뱀들과 조우할 뻔했으니까. 그랬다면 이번 작전은 엉망이 됐을 것이다.

    “일단 보호석은 몇 개나 수거했지?”

    “모두 열두 개입니다.”

    “전부 수거했나?”

    “우리가 파악한 개수는 모두 열네 개였다.”

    “뭐? 그럼 두 개는 실패한 거야?”

    노아의 벼락같은 고함에 앤디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두 개는 놓쳤습니다.”

    “놓쳤다니?”

    “뱀의 왕이 가져갔습니다.”

    “…….”

    “로빈 님께 빼앗겼습니다.”

    앤디는 처음부터 모든 보호석을 전부 수거해 갈 작정이었다. 이 계획은 이엘이 세운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가뜩이나 여론이 좋지 않은데 괜히 나쁜 시선이 이엘에게 쏠릴까 걱정이 앞섰다. 무조건 이 계획을 성공시켜야 돼.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앤디는 성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독수리들과 합을 맞춰 본거지를 샅샅이 뒤졌다. 전부 찾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악바리 근성으로 끝끝내 열두 개의 보호석을 전부 발견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내에 보호석을 모두 수거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보호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공중을 배회하던 독수리가 광장에서 두 개의 보호석을 마지막으로 발견한 것이다. 광장엔 인간들이 몰려 있었고, 출발 전 이엘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엔 되도록 관여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스완의 능력이 방해받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앤디는 나머지 두 개를 반드시 수거해야만 했다.

    결국 주저하다가 광장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터져 나온 총성과 비명 소리에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앤디 님! 폐하와 오헬이 나왔습니다!’

    수하의 말대로 저 멀리 노아가 이엘을 태우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그만 돌아가자며 늑대들이 성화를 부렸다. 하지만 앤디는 나머지 보호석 두 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오헬의 계획을…… 실패해선 안 돼. 결국 저를 붙잡는 늑대들을 뿌리치고 광장 안으로 무리하게 진입을 시도했다.

    아수라장이 된 광장 안엔 인간은 보이지 않았고 거대한 뱀들만 우글거렸다. 주춤, 자리에 멈춰 선 그의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바닥을 죄 적신 새빨간 피 웅덩이 위에서 검은 뱀 한 마리가 앤디를 향해 교활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로빈은 보란 듯이 긴 혀로 보호석 두 개를 낚아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 잘못입니다!”

    “로빈이 들고 갔다고?”

    “예. 두 개를 가져갔습니다. 그 외의 보호석은 전부 수거했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확인했으니 그 부분은 확실합니다.”

    ……목표는 역시 보호석이었나.

    이미 보호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 영지 습격의 거래 조건이 그 보호석이었다고 했다. 아까 턱수염의 말을 반추하면 인간들은 거래를 차일피일 미루며 보호석을 건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번 습격은 보호석을 목적으로 왔을 수도 있겠군. 찝찝하지만 이 정도면 됐다. 어차피 이종족이 보호석을 가져가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이번엔 이엘에게 향했다. 여전히 다친 개체가 없는지 확인하기 바쁜 이엘의 앞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앤디 님?”

    “받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앤디가 속삭였다. 얼결에 그의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자 앤디는 은밀하게 그녀의 손 위에 무언가를 올려 주고 빠르게 등을 돌렸다. 이엘은 제 손에 담긴 그 물건이 무엇인지 보지도 않고 알아차렸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반지를 주머니 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걸 어떻게…….”

    “뱀의 왕이 내게 던졌어.”

    “…….”

    “네게 전해 주라며.”

    이로써 로빈에겐 더 큰 의심을 받게 생겼다. 황족을 닮은 외모에 황자의 반지. 로빈뿐만 아니라 반지를 가져온 앤디도 저를 의심할지 모른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속으로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이후의 일은 이제 우리와 무관하다. 세잔티노는 너희의 소관이니 알아서 처리해. 뱀들은 좀 귀찮게 되었지만.”

    노아는 떠날 채비를 마치며 피시와 하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의 인사에 하트는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피시는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굴었다. 소년은 노아를 지나쳐 이엘에게 다가가 그 손을 소중하게 붙잡았다.

    “내 영지에 들러. 응? 오기로 했잖아, 오헬.”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전하. 다음에 올게요.”

    “싫어. 지금 가면 또 언제 볼 수 있는데. 응? 싫어.”

    어린애가 칭얼거리듯 소년이 이엘을 품에 끌어안았다. 여전히 외관은 소년이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키가 아주 조금 자랐다. 그 악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어느새 소년의 품에 완전히 안겨 버린 꼴이 되었다.

    엉거주춤 끌려와 당황했지만 이엘은 그를 달래 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몹시 피곤했으니까. 피시는 부끄러움도 잊고 인간을 끌어안으며 애타게 매달렸다.

    “오헬.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제발.”

    “왕자님. 곤란해요. 저는 돌아가서 할 일이 많아요.”

    “네가 원하는 대로 성군이 되려고 노력 중이야. 하지만 내 영지에 네가 없으면 내가 성군이 되는 의미가 없어. 오헬. 가지 마.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노아는 제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 철부지 왕자가 끝까지. 이래서 내키지 않았다. 한번 얼굴을 보면 분명 붙잡고 놓지 않을 테니까. 집착이 심한 종족에게 붙잡히면 결과가 좋지 않다.

    보다 못한 노아가 억지로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그보다 이엘이 빨랐다. 그녀가 피시의 품을 벗어난 것이다.

    “고마워요, 왕자님. 오늘 이렇게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

    “왕자님이 제 편이 되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너무 좋았어요. 행복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행복한 건 왕자님이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하신다는 말씀이에요.”

    “오헬.”

    “제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시 님.”

    온화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더는 투정을 부릴 수가 없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입술을 꽉 깨문 피시는 한참 만에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저렇게 말해 주는데 내가 어떻게 붙잡아. 마치 의젓해졌다고 칭찬해 주는데 내가 널 어떻게 붙잡아. 정말 인간은 치사해. 그는 부루퉁하게 이엘을 쳐다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엘을 완전히 놓아주었다.

    “내 말 기억하지? 하이에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

    “네가 늑대에게 의탁하기 때문에 우리도 늑대와 손을 잡는 거야. 늑대가 널 버리면 우리도 가차 없이 늑대를 버릴 거야. 앞장서서 천적이 되겠어. 기억해. 오헬을 버리면 아무도 무사하지 못해.”

    소년의 차가운 눈동자가 종국엔 늑대들에게 쏟아졌다. 대놓고 경고하는 꼴이었다. 위태로운 두 종족의 연합이 인간 하나의 안전에 달려 있다는 게 우스웠지만 또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기 모인 두 종족, 아니. 세 종족의 최대 관심사는 이 인간의 존재였으니까. 독수리도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편지할게. 응, 또 편지할 거야. 내 선물은 잘 받았어? 너는 보석보다 귀중해서 어떤 걸 걸쳐도 네가 더 돋보이겠지만, 그래도 다 주고 싶었어. 그거 다 네 거야. 내 성엔 그것보다 더 좋은 게 많아. 전부 네 거야. 응, 다 네 거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과분해요. 선물은 돌려보내고 싶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싫어. 가져. 받지 않을 거야. 네가 돌려보내면 늑대와의 화친은 없는 일로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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