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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6화 (116/488)
  • 116화

    *

    “그것이 말입니다. 저희가 좀 곤란해져서요.”

    주절주절 전부 쏟아 내는 턱수염을 보니 확실히 뱀과 진득한 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마치 곤란한 상대라도 만난 것처럼 난감한 얼굴로 주저했다. 스완이 재차 물었지만 턱수염은 그저 허허 웃으며 제 턱을 쓸 뿐이었다.

    “아직 발동되는 게 몇 없습니다.”

    “장난하나?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이거군.”

    “아이고, 폐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이 모든 게 폐하의 은덕인데요. 저희는 왕의 보살핌이 없으면 이만큼 살 수 없잖습니까. 부디 하해와 같은 은혜로 부덕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덜덜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곳에 모인 자들이 하나같이 스완―정확히는 로빈인 줄 아는―의 눈치를 보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엘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며 노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역시 뱀의 뒷배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언제부터 연관되어 있었는지는 알아보도록 해야겠군.”

    “보호석이 거래 조건일 줄은 몰랐습니다.”

    “로빈이 알고 있다면 꽤 골치가 아파지겠어.”

    뱀과 인간의 결탁에 보호석과 생체실험이 연관되어 있었다니. 끔찍한 건 생체실험에 필요한 인간들을 납치하는 것에 앞장섰던 게 턱수염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종족은 물론이고 동족인 인간들마저 물건 취급하는 저 행위에 진저리가 난다.

    로빈이 어떻게 보호석의 존재를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굳이 빼앗지 않고 거래 조건으로 여겼다는 건 뱀들도 지금 확보된 보호석의 수를 모른다는 의미였다. 이 거대한 땅을 짓는 것을 눈감아 주고 심지어는 필요한 재정까지 뱀이 도와주었다. 인간을 끔찍하게 여기는 뱀이, 직접 나서서 인간을 도와주었다고…….

    “그럼 저희는 언제쯤 여자를 받아 볼 수 있습니까……?”

    그때 납작 엎드려 있던 턱수염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스완은 대충 얼버무리며 힐끔 이엘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떠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분명 거의 완성되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생체실험이 부족하십니까? 저희가 다시 매음굴에서 데려오면 될까요?”

    “그 전쟁으로 잠깐 실험이 멈췄다. 너희가 쓸데없이 나서는 바람에 엉망이 되었다는 걸 모르진 않았겠지.”

    “아이고, 폐하.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려만 주십시오.”

    “네놈의 숨통을 쥐고 있는 게 누군지 제대로 알고 있도록.”

    “예, 폐하.”

    이엘은 달달 떨리는 손을 어쩌지 못했다. 실험이 거의 완성된 걸까? 조금 전의 대화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이래서는 직접 뱀의 소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로빈의 성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나저나 황자의 반지가 네놈의 손에 들어왔다는 말이 들렸는데.”

    “네? 그게 무슨…….”

    “며칠 전, 늑대들의 영지에서 도망친 네 수하가 황자의 반지를 훔쳤다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나.”

    저 멀리 엎드려 있던 인간 하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턱수염은 처음 듣는 소리였던 건지 눈을 크게 치뜨며 스완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네게 허락한 권위, 그 이상을 넘보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딴 반지 하나에 황실이 건립될 거란 우매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와, 왕이시여.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그 황자의 반지라는 것도 잘 모릅니다.”

    확실히 그때 늑대의 영지를 습격하기 위해 뱀과 연합했던 것은 여러 거래 조건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턱수염이 흔쾌히 승낙했던 건 뱀들 몰래 황자의 반지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늑대의 영지에 그때 봤던 그 꼬마 놈이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해서든 황자의 반지를 확인하려 했다. 때마침 뱀 쪽에서 제안을 해 왔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턱수염은 그 꼬마 녀석을 잡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뱀의 목표가 그 인간 소년이었다는 걸 뒤늦게라도 알아차려 다행이었다. 만약 그때 꼬마를 죽였더라면 일에 차질이 생길 뻔했다. 간신히 뱀의 뒷배로 이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뱀의 눈에 거슬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

    그나저나 대체 황자의 반지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턱수염이 수상한 눈을 제 건너편으로 돌렸다.

    렉토스.

    저놈의 이름은 렉토스 리히만. 리히만 백작의 사생아라며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더니 나서서 제 발닦개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그래서 받아 주었건만. 저놈이 며칠 전 늑대의 영지에서 도망쳐 이곳으로 돌아왔다. 턱수염은 렉토스의 곳곳을 살폈지만 고문당한 흔적 외에는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목숨만 겨우 부지해서 살아남은 줄 알았는데…… 설마 반지를…….

    렉토스는 부들부들 떨며 제 눈을 피하고 있었다. 턱수염은 놈을 주시하던 시선을 돌려 다시금 로빈을 향해 아부를 떨었다.

    “왕이시여.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황자의 반지라니……. 그런 게 어디 있답니까? 저희는 아는 게 없습니다. 황자라면 이미 11년 전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걸 저희가 어찌 탐을 내겠습니까. 노여움을 푸십시오.”

    “흐음. 믿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폐하.”

    아주 아름답게 생긴 뱀의 왕이 미심쩍게 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턱수염은 그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렉토스 자식, 뱀의 왕이 떠나면 그때 보지. 벌벌 떠는 렉토스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의 곁에 있던 충복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뱀들의 눈을 피해 렉토스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엘은 턱수염과 일당들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광장을 빠져나왔다. 스완이 인간들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었지만 지금 광장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직 신호가 떨어지지 않아 불이 나진 않았지만 저 멀리 흙먼지가 잘게 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독수리들과 늑대들이 계획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너희가 떠나면 세잔티노는 우리가 멸망시키겠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하트가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과묵하고 초연해 보였지만, 이엘은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큰 분노를 느꼈다. 하트는 하이에나 네쌍둥이 중 둘째였다. 그러니 첫째 조이나를 잃은 슬픔은 피시만큼이나 컸을 테지.

    “처음엔 목적만 이루고 떠날 생각이었어요. 피시 님께만 허락을 구했던 것도 같은 의미였습니다. 세잔티노가 하이에나의 소유라는 걸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말 조용히 왔다가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목표는 무사 귀환.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저 내부 분열 정도만 일으키고 떠날 생각이었다. 인간들의 결속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체계적인 관계일 줄은 솔직히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계산 착오였다. 이엘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짧은 한숨을 쉬고 이어 말했다.

    “어느 한쪽의 복수가 끝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의 용서가 없으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은 반복되겠죠.”

    자신이 떠나고 하이에나들이 이곳을 습격해 완전히 소탕한다고 해도 이 끔찍한 악의 굴레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엮여 있는 뱀들이 나서게 될 수도 있고, 도망친 끄나풀들이 또 다른 세력을 키울 수도 있고. 복수라는 이름 아래 또 다른 결속이 계속해서 이어지겠지.

    결국 어느 한쪽이 용서하지 않는 한, 반복되는 악순환이 될 것이다.

    “세잔티노를 향한 당신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 인간인 저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 영원히 모를 거예요. 이곳을 멸망시킨다는 말씀에 제가 반대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죠. 다만, 당신도 한 종족의 왕자니까 깊게 생각해 보시길 바랄 뿐입니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적어도 예상은 하시길 바라요.”

    그 말을 마친 이엘은 하트를 남겨 두고 먼저 광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자신 역시 이곳을 짓뭉개고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악의 근원이었던 황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인신매매까지 행하는 곳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정말 고쳐 쓸 수 없는 종족이다. 어쩌면 2차 전쟁으로 모두 죽어 버려야 했던 건 아닐까. 자조하며 돌아섰다.

    하트는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 소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저 멀리 먼지가 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잔티노. 분노의 땅. 그의 소중한 손위 누이도 이곳에 끌려와 죽었다. 유린당하고 짓밟혀 허망하게 죽어 버린 곳이 이곳이었고, 동기를 죽여 버린 인간도 세잔티노인들이었다. 황제의 명령하에 가장 잔인하고 더러운 이 도시 인간들이 조이나를…….

    복수가 끝나? 용서를 해? 우습다. 너는 인간이니 쉽게 그런 소리가 나올 테지. 결핍된 것처럼 감정이 없던 하트의 안면이 작게 일그러졌다. 조이나만 생각하면 무너질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는 내 가족, 내 누님. 자신들의 전부였던 핏줄이었는데.

    그때 광장 안에서 총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걸 신호로 저 멀리 흙먼지가 일던 곳들이 하나둘 무너지는 게 눈에 보였다. 곧 독수리들이 지폈을 불이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하트는 인간 소년을 지키기 위해 광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광장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습격이다!”

    “반란이다!”

    인간들은 정신을 잃고 혼비백산이었다. 턱수염과 렉토스가 대립하던 것까진 확인했는데, 갑자기 난입한 뱀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엘은 나부끼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쳐다보며 탄식을 삼켰다.

    진짜 뱀이 쳐들어왔다.

    “오랜만이구나, 오헬.”

    그가 그녀를 향해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이엘의 앞을 가로막듯 지켜선 노아와 하트를 힐끔 쳐다보던 로빈이 그녀를 향해 손을 홱홱 저었다.

    “어서 나가도록 해라. 지금 나가지 않으면 네 사지를 잘라서라도 데려가 줄 테니.”

    귀찮은 것을 치워 버리듯 로빈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갑자기 몰려든 뱀 떼가 광장에 모여 있던 인간들을 잡아먹고 죽이기 시작했다. 진하고 붉은 피가 파도처럼 울컥울컥 퍼졌다. 노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넋이 나간 이엘을 제 등에 태웠다. 그를 신호로 스완도 빠르게 하트의 등 위에 올라탔다. 네 사람은 엉망이 된 광장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역시…… 로스티 숲에서 누군가 엿들었어요.”

    “그래. 지금은 그런 생각 집어치우고 떠나자.”

    저 멀리 대지를 향해 날개를 퍼덕여 구멍을 뚫는 독수리들이 보였다. 이엘은 고개를 뒤로 돌려 비명이 난무하는 광장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너무 끔찍해 기억에서조차 묻어 버렸던 11년 전의 그날이 겹쳐 보였다. 아스라한 기억이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또 도망을 친다. 동족을 버려두고 나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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