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저와 피시는 늑대들의 일 따위 관심 없습니다. 인간의 안전만 확보된다면 말씀하신 대로 오늘의 일을 묵인하겠습니다.”
끝까지 기가 찬 말만 하는군. 역시 하이에나는 엮이면 골치 아프다니까. 그를 귀찮은 혹쯤으로 생각하던 노아가 혀를 차곤 두 사람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익숙하게 하트와 이엘의 사이를 갈라 자신이 마주 보고 섰다.
“그렇다면 나까지 포함해 넷이 가도록 하지.”
“폐하, 그건……!”
“그만. 더 이상 타협 안 해.”
이엘의 간곡한 말에도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고집불통인 하이에나를 설득할 재간은 없었다. 끈질긴 종족 특성상,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반드시 할 것이다.
물론 이엘을 설득할 마음도 없었다. 고집 세기론 하이에나와 비등하니, 뭐. 그녀는 어떻게든 스완과 함께 저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불필요한 갈등을 차단하는 것뿐.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미 네 동생을 통해 세잔티노 습격을 예고했고, 네 동생은 허락했다. 그러니 네가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아라. 또한 오헬을 무슨 물건인 것처럼 취급하는 말 자제하도록. 이건 경고야.”
노아의 한마디에 늑대들이 동의하며 몸을 잔뜩 부풀렸다. 어쩌다 동맹관계가 되기는 했지만 늑대들은 하이에나를 몹시 싫어하는 종족 중 하나였다. 금세 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관계에 마음이 불안한 건 이엘뿐이었다. 늑대들은 이깟 관계 깨져도 그만, 안 깨져도 그만이었으니까.
목표는 무사 귀환. 적어도 여기 모여 있는 이종족들이 다쳐선 안 된다.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과 감정을 소비해서도 안 돼. 이엘은 잠시 제 이마를 짚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피시가 순순히 땅 위에 남겠다고 하더니, 이러려고…….
그러나 현명한 이엘은 늑대와 하이에나의 신경전을 끝내는 쪽을 택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가는 수밖에.
결국 이엘이 먼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걸음을 향했다. 웅성거리며 그녀의 뒤를 바라보던 늑대들도 앤디의 지시를 따라 얌전히 정렬을 마쳤다. 노아는 커다란 늑대로 변해 빠르게 이엘의 뒤에 따라붙었다. 스완은 허여멀건 하트의 낯짝을 쳐다보다 코웃음을 치곤 마찬가지로 이엘의 뒤로 쪼르르 달려갔다. 하트는 뒤에 서 있는 늑대들에게 건조한 시선을 주다가 이내 긴 다리로 세 사람을 쫓았다.
점점 어둠에서 벗어나 밝아지는 것 같다. 음습하고 추웠던 공간에도 차차 온기가 찾아들었다. 저 멀리 인영이 좌우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르네가 말한 경비병인 듯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엘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은 또 다른 왕성이었다. 마치 이종족의 영지처럼, 과거의 제도처럼.
거대한 성벽이 본거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래서는 또 다른 세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문명을 무너뜨린 이종족에게 보란 듯이, 인간은 새 문명을 만들고 있었다.
“기다려. 여기서부턴 내게 맡겨.”
스완이 혀로 입술을 축이곤 날랜 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뛰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인간 남자를 향해 무언가 지시를 했다. 남자는 잽싸게 움직이며 성벽에 붙어 있던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지이잉― 굉음이 들리더니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그리고 스완이 이엘을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내 반쪽. 나를 만난 건 신의 축복이야. 내가 우리 종족 중에 이쪽으로는 가장 뛰어나거든.”
겨우 목표물 하나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우리 선조들과 달리, 난 꽤 많은 수에도 가능하거든. 스완이 어깨를 쫙 펴고 그녀를 향해 으스댔다. 그 모습이 다소 얄밉긴 했지만 과연 기고만장할 만한 실력이었다. 경비병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는데도 능력은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경비병은 혼비백산한 채 성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마 예고치 않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들의 보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을 테지. 노아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엘을 등에 태웠다.
“하트. 백조를 태우고 따라와.”
“저런 것을 태우고 싶지 않습니다.”
“오헬이 다치지 않길 바란다며. 저 녀석의 목숨이 오헬과 엮여 있다.”
“…….”
“그러니 넌 네 목숨을 걸고 백조를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생각보다 그게 썩 기분 좋진 않겠지만. 노아의 조롱을 무시한 하트는 군말 없이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멀뚱멀뚱 서 있던 연분홍빛 머리카락의 남자를 머리로 받아 제 등 위에 태워 버렸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지르던 스완이 벼락처럼 화를 내려던 차였다. 저 멀리 안쪽에서 누군가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이엘은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다급히 스완을 불렀다. 하트의 등 위에 올라탄 스완은 그녀가 부르기도 전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를 향해 능력을 쓰고 있었다.
보통 고니는 하나의 생물에만 능력을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스완은 제 능력이 그 이상이라 자랑했다. 하지만 역시 불안하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가까워지는 턱수염 일행에게서 시선을 놓지 못했다.
자칫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예상하고 준비하긴 했지만…….
“어서 오십시오, 로빈 님.”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그는 자신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이엘이 싫어하는 그 능청맞은 웃음을 보이며 제 수하들을 소개하더니 스완을 향해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 재촉했다. 스완은 이엘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쉿. 이제 아무도 입 열지 마.”
늑대와 하이에나가 말없이 인간들을 따라 성 안으로 진입했다. 이엘은 고개를 뒤로 돌려 성문이 닫히기 직전, 안으로 들어오는 늑대와 독수리들을 확인했다. 이엘과 눈이 마주친 앤디의 지시하에 여러 무리로 흩어져 사라졌다.
부디 아무 일 없이 무사 귀환하기를. 그녀가 뒤를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였다.
“어…….”
“쉿.”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 이엘이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환각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엘은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그들의 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검은 머리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는데……. 우리를 따라, 들어온 것 같았는데.
*
“이렇게 누추한 곳으로 직접 오실 줄이야. 놀랐습니다, 뱀의 왕이시여.”
“이전에 말했던 것. 그 계약 건으로 왔다.”
짐짓 위엄이 실린 스완의 말에 인간들이 잔뜩 움츠렸다. 백조의 능력으로 인간들은 그를 로빈으로 착각했고 뒤따라온 이엘과 노아, 하트의 존재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움에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눈을 피하느라 바빴다. 반면 스완은 이 상황이 꽤 재밌던 모양인지 로빈 행세를 하며 연신 주절거렸다. 이엘은 불안한 듯 그를 지켜보며 괜히 주먹만 바르쥐었다.
고니의 환각 능력은 대개 목표물에게 환각을 걸어 놓고 도망치는 수단이었다. 사용자가 저렇게 직접적으로 관여할수록 환각이 깨질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전에 이엘에게 스완이 다가왔을 때 그녀가 금방 깨어났던 것처럼. 그래서 이엘과 노아, 하트는 스완의 능력이 깨지지 않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꽤 인원이 많았군.”
“그러네요. 이 정도면 마을 하나쯤 되는 수예요.”
애초에 모든 인간이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노아는 광장에 가득 모인 인간들을 헤아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독수리와 늑대가 이곳을 소탕하기 위해 인간들을 한데 모을 필요가 있어 스완이 능력을 썼다. 그렇게 모인 인원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공간……. 밖에서 볼 때도 놀랐지만, 성내는 더 놀라웠다. 광장 같은 공간까지 갖춰져 있을 줄이야.
노아도 이엘의 생각에 동의한다. 결속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노아는 착잡한 얼굴의 이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결속을 무너뜨리자고 말했던 건 이엘의 제안이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동족이라 고통받는 모습을 견딜 수 없다면서, 대체 왜 이런 제안을 한 걸까.
아직도 그 꿈에 연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노아는 짧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
“폐하, 이건…….”
“…….”
보안이 풀리며 막혀 있던 공간이 죄 뚫렸다. 독수리들은 르네를 필두로 지하 창고까지 쳐들어왔다. 백조의 능력이 허풍은 아니었던 건지 본거지 안이 텅텅 비었다. 심지어 지하 창고마저 경비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거대한 성벽을 볼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곳은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지하 창고가 작은 마을 하나와 맞먹을 정도였으니까.
독수리들이 울분을 터뜨리며 침음했다. 한쪽 공간을 가득 메운 건 수두룩한 독수리의 눈알이었다. 그 옛날 독수리의 눈알이 황금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부터 납치와 수탈은 왕왕 있었다. 심지어 2차 전쟁 때 연구소를 박살 낼 때도 보지 않았던가. 그들의 눈알을 전시장에 늘어놓았던 모습을.
‘이게 뭐지?’
‘메이슨과 다른 새끼들의 눈알이에요.’
‘…….’
‘아마…… 본거지엔 더 많은 눈알들이 있을 거예요.’
‘…….’
‘죄송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이렇게 돌려주는 것밖에는.’
떠나기 전 이엘은 자신에게 새끼 독수리의 눈알 몇을 돌려주었다. 빼돌린 것이라고 했다. 이엘은 마치 자신이 그 눈알을 뺀 것처럼 죄책감으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으윽…….”
무리 중 하나가 전시장 유리창에 덜덜 떨리는 손을 대며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그의 소중한 아들이었던 새끼 독수리의 눈동자가 그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새끼는 이제 이곳에 없고 눈알만 남아 있다. 그 사실에 우논이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화를 내기엔 너무 처참했고 너무 괴로웠고 너무 익숙했다. 독수리들은 분노를 멈추고 말없이 진열장을 부숴 눈알을 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진열장을 벗어나면 제 기능을 못 하게 되겠지만……. 그들은 그저 흔적이라도 갖고 가려 했다. 르네는 참혹한 광경에 헛숨을 쉬며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렸다.
인간이란 종족이 끔찍하게 싫다. 환멸이 나고 구역질이 난다. 대체 언제까지 우릴 이렇게 괴롭게 만들 것인가. 나는 인간을 쓸데없이 학살한 내 백성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너흰 여전히 변하질 않아.
여전히 너희에게 우린 그저 생명을 가진 물건에 불과하군. 그 사실이 괴롭고 허망했다. 2차 전쟁 때, 정말 너흴 모두 죽여야 했던 걸까. 그랬다면 좀 나았을까.
‘르네 님.’
그때 그의 귀에 웃음이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춤은 역시 어려워요. 못하겠어요, 정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와중에 또 널 생각하는 내 마음이 너무 우스워서. 대놓고 무시당하고 거절당했는데도 왜 아직도 난 널 이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풋사랑이라 치부하기엔 감정의 깊이가 너무 깊었다.
네 종족이 이렇게 혐오스러운데도 넌 항상 예외라는 게, 참 웃겼다.
“폐하. 다른 종족의 것은 어찌할까요?”
“살아 있는 개체는 너희가 직접 데리고 땅 위로 올라가라. 나머지는 신호가 오는 대로 불로 태워.”
“예.”
곳곳에 갇혀 있는 이종족의 울음소리가 제 귀를 어지럽혔다. 이 혼란은 언제쯤 잠재워질지 도무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3차 전쟁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