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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4화 (114/488)

114화

“너무 많은 인원이 가는 건 오히려 독입니다. 환각은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게 효과가 오래가니까요. 목표는 본거지 소탕이 아닙니다. 보호석의 수거와 파괴예요.”

“우리도 보호석을 찾는 쪽과 눈알을 찾는 쪽으로 나누겠다.”

“네.”

본거지 소탕을 주장하던 독수리들에겐 빼앗겼던 눈알을 되찾는 것으로 협의를 보았다. 보호석만 없으면 본거지를 찾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 오늘 이후의 일은 서로 모른 체하기로 했다.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눈이 되어 줄 르네와 노아, 이엘이 먼저 은밀한 입구로 숨어들었다. 마치 깎아지른 듯한 절벽처럼 비탈진 지하 계단이 허술하게 끝도 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층이 가벼워 자칫하면 그대로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앞서 걷던 르네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보호석을 다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알아요. 오늘 다 파괴한다고 쳐도 또 어디선가 보호석이 나타나겠죠.”

“…….”

“중요한 건 이거예요. 보호석이 파괴가 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

“나자르가 모두 사라졌으니 보호석을 만들 순 없겠죠. 그런데 그 보호석을 파괴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다면, 저들도 쉽게 사용하진 못할 거예요.”

애초에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무분별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세상의 순리를 자꾸만 거스르려 했던 인간들의 무지와 죄로 이 끝나지 않는 전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깊고 깊은 곳까지 내려와 축축한 바닥에 발을 붙였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독수리의 눈을 횃불 삼아 세 사람은 숨죽여 걷기 시작했다. 암시장은 언제나 이 정도에서부터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는데 본거지는 한없이 조용했다.

르네는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엘이 제 로브 자락을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풀어 제 손으로 잡았다. 커다란 손 안에 그녀의 마른 손이 감겨 와, 그는 또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아주 작은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 사람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거대한 기둥 앞에 익숙한 돌이 박혀 있었다. 보호석이었다.

“정말로 있을 줄이야.”

노아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보호석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그는 무리에게 신호를 주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둘만 남겨진 곳엔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이엘은 옆에 선 르네를 힐끔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꽃은 잘 있습니까?”

“아니.”

“…….”

“말하지 않았나.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여전히 마른 손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소중하게 감겨 있다. 르네는 시선을 부드럽게 내렸다. 희미한 불빛이 고작 형체 정도만 비춰 줄 뿐인데도 르네는 그 안에서 그녀의 존재를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두려웠어.”

“…….”

“네가 날 보지 않을까 봐.”

날 찾지 않을까 봐. 이제 영영 나 따윈 눈에 두지도 않을까 봐.

몇 번을 생각해도 정말 우스운 걱정이었다. 자신은 그녀가 황녀란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단 것을 알면서도, 르네는 그 사실이 계속해서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마자 곧장 날아왔다. 그녀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라도 해야 너를 볼 수 있는 면이 설 테니까. 하지만 또 막상 그녀를 눈앞에 두니, 기쁨보다는 다른 감정이 더 북받쳤다.

“널 죽여 버렸던 내 과거를 후회한다.”

“르네 님.”

“네게 그 큰 상처를 만든 내 과거를 저주해.”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다. 르네는 너무나도 간절했다.

“오헬.”

르네가 그 낮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엘은 자책 어렸던 그의 말을 곱씹으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가 자신을 더없이 부드럽게 내려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

“매일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언제나, 늘.”

아마 넌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이종족에게 사랑이란, 아니. 독수리에게 연정이란 그런 것이다. 단 하나의 반려를 갖는 독수리가 마음에 누군가를 품었다면, 그건 인간과 비교할 만한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난 네가 늘 그리워.”

“……르네 님.”

“내 마음을 다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당황한 이엘은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었다. 붉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저를 바라고 좇는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자꾸만 벌어져.

“단순히 피할 곳을 찾아 늑대에게 의탁하는 거라면.”

“…….”

“내 곁으로 와. 나의 둥지는 네게 궁전이 되어 줄 것이다.”

르네는 제 사랑을 인정하게 된 시점부터 그녀를 놓지 못했다. 아니. 놓지 않을 것이다. 저질러 버린 과거는 평생을 헌신하며 갚아 나갈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나는, 네게서 그 어떤 모멸감을 당하더라도 감당할 것이다.

“이런 때에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비겁한지, 잘 안다.”

“…….”

“하지만 비겁하게라도 네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그걸로 족해. 그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렸다. 이엘은 죄책감과 애정이 뒤섞인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엔 거짓이 없었다. 물기 젖은 녹안이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르네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폐하를 곡해하는 것은 아니나, 일시적인 감정일 거예요.”

“…….”

“제가 유일한 암컷이라…… 그런 거겠죠.”

그게 아니라며 화를 내기엔, 그녀의 얼굴이 다소 어두웠다. 르네는 제 감정을 쏟아붓는 것보단 여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이엘의 다음 말을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보란 듯이 거절당했고, 그 감정의 존재마저 부정당했지만 그는 그녀를 배려했다. 어떤 모멸감이라도 감당해야 했기에.

“제가 유일한 암컷이기 때문에 그런 거겠죠.”

“오헬.”

“그냥…… 본능으로 끌리는 거예요. 깊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여자고, 폐하는 남자니까…….”

아무리 본능에 충실한 이종족이라지만 자신을 그렇게 치부하는 게 좋을 리 없다. 르네는 끝까지 차갑기만 한 그녀의 대답에 속상하고 서운했지만 그녀의 두려움 서린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모든 걸 또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입니다. 유일한 암컷이에요. 누구나…… 절 보면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질 거예요. 제가 유일한 암컷이니까요. 그런 것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진심일 리 없습니다.”

그렇게 만든 게 자신들이었다. 자신이 인간을 믿지 못하게 된 것처럼, 이엘은 누구의 감정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폐하의 마음은 그런 욕정이 아니란 것, 알고 있습니다.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안 돼요.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상처받은 독수리의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엘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어려워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감정이 복잡해졌다. 쏟아지는 누군가들의 관심과 애정이, 부담스럽다 못해 힘겨웠다.

“그 마음은 일시적일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저를 싫어하게 되실 거예요. 죽어야 했던 황족의 남은 씨앗이니까.”

“내 마음을 폄하하지 마라.”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마음을……,”

“함부로 널 평가하지 마!”

그가 소리를 질렀다. 숨어들어도 모자랄 판에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지르다니. 르네는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제 감정을 무너뜨리고 무시하고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다. 기분이 상했다.

“네가 내게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데. 왜 나의 마음을 자꾸만 무너뜨리는 거지?”

그가 이엘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주저하며 다시 거두었다. 제 감정을 외면당하는 것보다 두려운 건 이엘이 스스로를 책망하며 자조하는 행위였다.

그녀는 고귀한 사람이다. 모든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그러했듯, 그녀는 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스스로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저 인간 여자는 자신을 한없이 내려 깎으며 숨겨 버린다.

아닌데. 너는 그런 취급을 받을 존재가 아닌데. 너는 귀하고 귀한 존재인데.

그걸 우리가 망가뜨렸을 뿐인데.

“내 감정을 네게 억지로 떠안기려 한 것처럼 느껴졌다면 내가 미안하다. 그러려던 게 아냐. 다소 성급했다, 내가.”

르네는 깊은 한숨을 쉬다가 이엘의 젖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마음이 많이 조급했나 보군. 답지 않게 성마른 행동을 해 버렸다. 왜 나는 네 앞에만 서면 자제를 할 수 없는 건지. 왜 이렇게 안달이 나는 건지.

다신 인간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 따위,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그럴 일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나 제멋대로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그는 기꺼이 그녀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기로 했다.

“오늘 일은 그냥 잊어라. 그게 좋겠군.”

그의 말을 들은 이엘은 갑갑함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그녀의 첫사랑으로 배웠다. 그런 감정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것임을. 그게, 지금의 자신에게 얼마나 부질없고 사치스러운 건지.

받아 본 적 없는 사랑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다못해 가족으로부터 받아야 할 애정조차 받아 본 적이 없거늘. 이엘은 축축하게 젖어 버린 눈동자로 르네의 붉고 선한 눈동자를 담았다.

그의 마음이 일시적인 것이길 간절히 바란다.

“오헬. 왜 그래?”

어색하고 긴 침묵을 깨뜨린 건 무리를 끌고 돌아온 노아였다. 그는 이미 저 멀리서부터 두 사람 사이에 도는 긴장감을 눈치채고 예민해진 상태였다. 무리의 등장에 르네는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애써 돌려 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무리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끝까지 배려하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오헬.”

노아가 재차 이엘을 불렀다.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제게 잠깐 머물렀다가 떠났다. 르네처럼 이엘도 곧 늑대 무리 안에 숨어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적으로 피해 버렸다. 노아는 가만히 그녀의 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폐하. 들어갈까요?”

정렬을 마친 앤디가 슬쩍 운을 뗐다. 넋이 나간 것처럼 이엘의 뒤만 좇던 노아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데.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가 보군. 자조 섞인 말을 중얼거리더니 곧 정신을 차렸다.

능숙하게 그의 명령을 따라 늑대들이 움직였다. 르네는 빛이 아주 조금 새어 나오는 곳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바로 앞에 경비병이 하나 있다. 보안은 이전과 비슷한 수준이고.”

“그럼 저와 스완이 먼저 갈게요. 보안 장벽이 사라지면 작전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나도 너와 함께 가겠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하이에나가 뒤에서 휘적휘적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가뜩이나 날카롭게 생긴 얼굴에 표정 하나 없으니 서늘하기 짝이 없는 낯이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주춤했다. 하트는 무관심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만 옆으로 돌려 노아를 향해 허락을 구했다. 말이 허락이지, 통보나 다름없는 태도였지만.

“제가 인간을 보호하겠습니다.”

“피시면 몰라도 넌 안 돼. 널 어떻게 믿지, 내가?”

피시의 그림자처럼 줄곧 말없이 서 있던 하트는 늑대, 독수리와 함께 이곳까지 내려왔다. 아직 온전하지 못한 피시는 땅 위에 남는 대신 그를 보냈다. 그가 처음부터 세잔티노로 온 목적은 이것이었다. 피시가 원하는 대로, 이 인간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제 동생이 아끼는 인간이니 절대로 털끝 하나 다치면 안 됩니다. 저는 늑대들을 믿지 못하니 제가 인간을 지키겠습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핑계였다. 헛웃음을 터뜨린 노아는 회백발의 소년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럴 생각이었나? 관심 없는 척 굴더니, 결국 세잔티노의 주인이 너희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를 따라 내려온 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세잔티노는 분명한 하이에나의 것. 이 아래서 일어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허락하에, 당신들도 들어올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 때문에 살아 있는 존재 같지 않았다. 하트는 노아의 매서운 눈을 마주 응대하다가 다시 제 앞에 서 있는 인간 소년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보잘것없이 생겨서,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건 없었지만 제 동생이 원한다. 저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살던 제 동생이 처음으로 간절하게 원하는 게 이 인간이다. 하필 상대가 인간이란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피시가 원한다면.

“아니면 이 인간을 우리에게 넘기십시오. 그러면 순순히 물러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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