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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1화 (111/488)

111화

황족이나 귀족들에게 으레 있는 일이었다. 잠을 자는 새에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할까 두려워 방 안에 병사들을 배치하는 자들도 왕왕 있었다. 이엘도 잠시 인간들과 지냈을 때 그러지 않았던가. 누군가 집에 몰래 들어와 자신을 끌고 갈까 두려워서.

“네가 날 지켜 준다는 건가?”

“네. 그럼요.”

그녀가 작게 웃자 노아의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퍼졌다. 못 미더운 것은 아니나 그녀를 세워 두고 자신만 편하게 자라고 하니,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노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 폐하.”

그는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서 몰려오는 노곤함에 잠이 들 법도 한데 역시나 눈만 뻑뻑할 뿐이었다. 눈을 비비며 피로를 억누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그의 말에 문이 열리더니 무언가 한가득 들고 이엘이 들어섰다.

“차도 함께 내왔어요.”

“고마워.”

차라면 안드로가 지긋지긋하게 내오고 있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몸이 녹진해지는 게 전부였다. 노아는 그녀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마셨다.

“레몬밤이에요. 숙면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신경이 예민해져 있으니 불면증이 더 심해질 수밖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피로함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일단 침대로 가라는 그녀의 재촉에 별수 없이 누워 버렸다.

그녀는 갖고 왔던 것들 중 하나를 꺼내 태엽을 감았다. 저택에서 노아가 가져왔던 축음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노아는 흐리게 웃었다. 저걸 또 언제 가져왔을까.

그때 들었던 그 음악이 커다란 방 안을 천천히 울린다. 이엘은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카펫 위에 모로 누워 침대에 누운 그를 올려봤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추운데 왜 거기 누워. 네가 여기 누워라.”

“제가 어찌 왕의 침대에 눕겠습니까.”

“누우라면 누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오늘은 폐하께서 주무셔야 제가 나갈 수 있어요.”

“…….”

“제가 방으로 돌아가길 원하신다면 어서 눈을 붙이세요.”

그도 불안해하는 걸까.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고 완벽하던 남자가 어느 순간부터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인다. 숨겼던 것을 이제야 드러낸 건지, 그게 아니면 무언가가 그를 불안하게 만든 건지.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그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정원은 잘 마무리되어 가고 있나?”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의 배려 덕분에 주드의 묘도 무사히 이장했다. 앤디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을 뿐이었다. 테르들은 신이 나서 잔뜩 뛰어다녔고 이엘은 그제야 주드를 마음 편히 보내 줄 수 있었다. 그녀의 정원은 이제 모두의 정원이 되었으니까.

“폐하.”

“응, 말해.”

“걱정 마세요.”

“…….”

“저는 제 목숨을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 노아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어느새 이엘의 손이 침대 위에 올라와 노아의 손등을 살포시 덮었다. 그녀는 토닥토닥,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그를 다독거렸다. 일정한 박자로 찾아드는 온기에 노아는 마음을 착잡하게 하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제가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별말을 다 하는군. 걱정 안 해.”

“그럼 다행이지만요.”

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가려고 하자, 노아는 눈을 뜨며 빠르게 그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들어오고도 남는 그 작은 손을 움켜쥐며 오늘도 습관처럼 그녀의 두 번째 손가락을 가만히 문질렀다.

“무슨 이야기라도 해 줘.”

“이야기요?”

“이대로는 또 못 잘 것 같아서.”

“그럴까요?”

이엘은 제 손을 한없이 만지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러면. 어릴 때 어머니께서 해 주신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선황후께서?”

“네, 언제나 저와 황자를 곁에 두시고 잠들 때까지 이야기해 주셨거든요.”

노아는 어렴풋하게 자리하고 있는 황후를 떠올렸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얼굴이 이엘의 얼굴 위에 덧대어 그려졌다.

르네의 여동생이 데뷔탕트를 하던 날, 어떤 귀족의 영애였던 그 여자도 데뷔탕트를 치렀다. 당시엔 관심이 없어 선황, 그러니까 당시 황태자와 그 여자가 춤을 추는 것도 곁눈질로 보는 게 전부였다. 그 뒤로는 황후를 직접적으로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성품이 온화하고 반듯하며 선황과는 달리 옳고 그름을 확실히 분별한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다.

“제 어머니는 후작가의 장녀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비롯한 예술을 좋아했다고 하셨어요. 실제로도 어머니의 피아노는 정말 아름다웠고요.”

저랑 다르게 말이에요. 조곤조곤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 여태 안드로가 타 오던 차가 효과가 없던 걸까, 아니면 이 목소리가 편안해서 그런 걸까. 노아는 가만히 그녀의 음성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첫사랑은 아주 근사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원치 않는 결혼이었던 건 그쪽도 같았겠군.

노아도 선황제의 혼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원래 예정되었던 황태자비는 이엘의 모친이 아닌 러셀가의 영애였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았던 그 영애는 약혼을 확정 짓기도 전에 명을 달리했고, 그 당시의 황제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빠르게 론 후작가와 혼약을 맺어 버렸다.

황제와 황후 사이에 감정이 없다는 이야기는 유명했으나 황후마저 따로 품었던 사람이 있다는 건 노아도 몰랐던 이야기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면 그분은 노래를 불렀대요. 그 자리에서 지어낸 음률이어도 시문을 곧잘 붙이셨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그분의 눈부신 백금발이 사랑스러웠다고 늘 제게 말하셨어요. 그런 머리색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면서요.”

아비인 선황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시엔 퍽 이상했다. 아버지가 아니에요? 이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버지는 머리색이 나처럼 검은색인데……. 이엘이 중얼거렸다. 황후는 너른 품에 두 아이를 가득 껴안으며 얼굴을 맞댔다.

‘너희들만은 사랑하는 사람과 혼례를 올려야 돼.’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했던 것을 제외하면 황가는 평온한 가정이었다. 황제는 무뚝뚝했으나 황후에게 예우를 다했고, 황후도 황제에게 언제나 깍듯했다. 단란한 가정이란 건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황가의 분위기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엘은 언제나 어머니가 해 주는 옛사랑 이야기가 사실은 불편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제 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어머니의 불편을 모른 척하려 했던 걸지도.

물론 어머니의 그 이야기는 어린 자식에게 좋은 교육은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가뜩이나 위태롭게 형태만 유지하던 가정에 날카롭게 금이 가기 시작했던 건 그 무렵이었으니까.

“어머니는 그분과 꼭 혼인을 하고 싶으셨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완강하게 반대하셨다고 했어요. 절대로 안 된다고. 그 남자와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왜지?”

“글쎄요. 그 이유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황가에 반하는 가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아무튼 완고한 집안의 반대에 도망까지 생각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순리에 굴복했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에서 혼담을 제안했죠. 어머니의 가문은 공신 가문이었으니 그 혼사를 마다할 리가 없었어요. 결국 본인들의 의견은 묵살된 채 억지로 혼례가 이루어졌어요.”

“…….”

“하지만 비교적 나쁘지 않은 황궁 생활이었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어요. 자신만 감내하면 모든 게 평화로운 나날이라고. 비록 우리를 얻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지만.”

노아는 완전히 눈을 감고 잠든 상태였다. 이엘은 손을 빼고 몸을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갔다. 이불을 들어 그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아무 걱정 없이 잠든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이엘은 그대로 그의 방을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담요를 들고 커다란 소파 위에 누워 버렸다. 아침마다 제 옆을 지키던 늑대가 없을 때 허전함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사랑은 부질없다. 그건 어머니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주 깊은 단잠에 빠졌던 것 같다. 노아는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다가 소파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왜 저기서 자고 있는 거지? 방이 꽤 추웠을 텐데.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이엘을 품에 안아 올렸다. 여전히 바싹 말라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기만 했다.

쯧. 체질이 이런 건가, 아니면 여전히 잘 못 먹는 건가. 몸에 좋다는 인간들의 음식은 죄 구해서 바치는데도 살이 찌질 않으니.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그래도 전에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쉽게 잠에서 깨곤 했는데 오늘은 몸을 안아 들어도 깨지 않는다. 자신만큼이나 그녀도 푹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푹신한 자신의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침대 끝에 앉았다.

“너도 네 아비가 마음대로 혼례를 정했겠지.”

아마도 내정된 약혼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노아는 물끄러미 잠든 이엘을 바라보았다. 누구였을까. 괜찮은 공작가의 영식이었을까. 후작가의 영식? 자식도 팔아 치울 네 아비 성정이라면 뭐가 됐든 끔찍한 혼사였을 건 확실하겠지만. 그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당겨 따뜻하게 덮어 주었다.

이기적이지만 그는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너를 만날 수 있게 된 이 빌어먹을 세상에게 조금은 감사하다고. 너는 괴롭겠지만, 나는 조금은 행복하다고.

너와 나의 신분의 차이에, 너와 나의 종족의 차이에 감히 널 꿈꿀 수도 없었을 과거가 사라져 주어서. 이기적이게도 나는 신께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난 네 선택을 간절히 바라. 모두에게서 너를 감춰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 하지만 역시 네 스스로 우리를 선택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네가 네 의지대로 나와 함께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

멀지 않은 미래에 분명 모두가 네 손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게 욕망이 되었든 희망이 되었든, 어떤 형태가 되었든.

너는 분명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휘두를 날이 올 테니까.

*

며칠 뒤 급하게 회의가 열렸다. 이엘의 지시하에 노아의 왕성에 모인 우논들은 그녀가 펼친 지도에 시선을 두었다. 지도 위엔 붉은색으로 동그라미 쳐져 있는 장소가 몇 보였다. 그리고 이엘은 그 동그라미들 중 어떤 장소들을 하나하나 제하기 시작했다.

“여긴 그 남자가 도망치고 바로 도착한 곳입니다. 늑대들을 따돌리고 곧바로 도착한 곳이니 안전한 곳은 아니겠죠. 의심이 많아 보였으니까요. 혹시나 추적을 따돌리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본거지가 아닌 곳을 택했을 겁니다. 실제로 이곳은 이전에 독수리가 소탕한 곳과 근접합니다. 아마도 전에 사용하던 곳이었을 거예요.”

이엘은 그곳에 X 자를 크게 그었다.

“다음은 이곳입니다. 두 번째로 도착한 곳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어요. 다만 몇 번에 걸쳐 오간 것을 보니 남자가 개인적으로 거주하는 곳인 듯합니다.”

그러니 이곳도 본거지가 아니다. 이엘은 마찬가지로 X 자를 크게 그었다. 남자를 추격하는 척하던 늑대들이 모두 영지로 돌아오고 단 한 마리의 우논만이 남아 그 뒤를 쫓았다. 그 우논의 말을 토대로 이엘은 지도에 본거지가 될 만한 곳을 추려 내고 있었다.

“그러니 다음 두 곳이 가장 유력합니다. 실제로 제가 알아 두었던 다음 암시장의 위치와도 근접하고요. 각 장소를 관리하기 위해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본거지를 세웠을 거예요. 아마도 이 일대에 본거지가 있을 확률이 큽니다. 이전에 인간들에게 듣기론 이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라고 했어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확인하지? 확실하지 않으면 섣불리 들어설 수 없다.”

“르네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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