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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10화 (110/488)

110화

앙칼지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노아는 익숙하게 제 귀를 틀어막고는 화분을 들어 볕이 잘 드는 곳에 올려 두었다. 개화기를 마치고 충분한 휴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장소가 바뀐 탓에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너그럽게 꽃의 투정을 받아 주기로 했다. 어쨌든 선물 받은 것이니 죽어도 버릴 마음은 없어서.

“이게 이름이 뭐라고?”

“시클라멘입니다.”

“시클라멘이라고…….”

어머니 루나는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그 정원은 자신과 레온에게만 열려 있던 공간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었다. 어느 늑대라도, 설령 테르라 할지라도 상관없이 오갈 수 있던 곳. 그 정원을 가득 메운 꽃밭에 이런 꽃도 있었을까? 그는 화분에게서 시선을 떼, 창 너머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루나의 정원이 아닌, 나타니엘의 정원이 된 그곳에.

얼마나 정성을 들여 정원을 가꿨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내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레온의 성으로 잠입해 씨앗까지 훔쳐 왔던 그 아이가, 저 정원을 얼마나 끔찍하게 아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정원은 다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마치 몇십 년간 폐허로 버려졌던 때처럼.

그녀에게 정원을 하사한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거였다. 내가 가진 것들 중 네 손을 가장 많이 탄 것. 네가 스스럼없이 만져 네 향을 잔뜩 묻힌 것들 중 내가 가지고 있던 것. 우리가 함께 공유한 것.

너와 내 시간이 오래 머문 것.

“주드의 묘도 정원 안으로 옮겨.”

“네, 폐하. 일러 놓았으니 며칠 내로 옮기겠습니다.”

“안드로.”

“네, 폐하. 말씀하십시오.”

“만약에. 만약에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어떨 것 같나.”

“…….”

“그냥 잠을 못 잔 탓에 왕이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답해 봐.”

그런 것치곤 노아의 낯이 좋지 않았다. 영리하지는 못하더라도 본능은 인간보다 강한 종족이다. 위험이 닥쳐오면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몸이 나서는 것처럼. 안드로는 보던 서류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종족의 명예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 겁니다.”

“…….”

“그게 폐하의 뜻 아니십니까?”

뱀들과 손을 잡지 않았던 것. 그 연구에 대놓고 나서서 반대하는 것. 그리고 인간들의 목숨을 살리는 편으로 의견을 제시했던 것. 이미 거기서부터 종족은 자존심을 지키기로 못을 박은 셈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작위를 받았던 귀족이라고……. 노아는 자조하며 안드로를 향해 나가 보라는 턱짓을 했다. 안드로는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마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화롯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테르들이 제 왕의 불안함을 느끼고 끼잉끼잉 소리를 냈다. 테르 중 하나가 노아의 곁으로 다가오자 그는 습관처럼 털을 쓰다듬으며 그들을 달랬다.

“염려 마라. 그런 참사는 다시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폐하…….”

“벌을 받는 건 나로도 족하다. 너희들까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 나를 믿고 평화를 지키도록 해.”

참 이상하지. 분명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하등 상관없는 삶이었는데. 분명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지나가는 시간에 불과했는데. 왜 이렇게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애틋해진 건지 모를 일이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썰렁하지만 조금씩 채워져 가는 그녀의 정원으로 향했다.

*

“혼자 오셨습니까?”

“당연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반지 내놔.”

“가져오신 것을 먼저 확인하고요.”

쓸데없이 치밀하긴. 남자가 혀를 차며 짜증을 부렸다. 그는 가지고 온 배낭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냈다.

“자, 몇 가지를 담아 왔으니 네가 말한 놈의 것이 있는지 봐.”

“네.”

“대체 그 눈깔을 갖다 뭐 하려고? 뭔 놈의 실험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딴 실험을 하다가 멸망한 인간들을 생각한다면 너도 애초에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확인했습니다. 여기 황자의 반지입니다.”

이엘은 갖고 왔던 이온의 반지를 내밀었다. 남자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잽싸게 그녀의 손에서 반지를 홱 낚아채 갔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물건으로 반지를 감정하기 시작했다. 이엘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제 손에 들린 여러 개의 눈알을 건조하게 내려보았다.

이 안에 메이슨의 눈알이 있다. 그녀로서는 어떤 게 진짜 메이슨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르네를 통해 건네주면 자신의 것을 알아보지 않을까? 메이슨의 것을 제하고도 꽤 많은 양의 눈알이었다. 일순 이엘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충동질을 느꼈다.

하나만 가져가면 안 될까? 라는.

“……봐. 이봐!”

“네, 네?”

“정신을 어디다 두는 거야?”

“어떤 건지 확인 좀 하느라. 왜 그러시죠?”

“근데 너. 이걸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게냐?”

“훔쳤다니까요.”

“이건 황자가 끝까지 갖고 갔을 텐데. 황자는 황성이 불타기 전에 탈출했다고 들었어.”

확실히 이쪽에선 저희끼리 도는 소문이 있나 보군. 이엘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열어 놓은 상자를 덮었다.

“그럼 누가 황자님을 죽이고, 또 누가 그 사람을 죽이고, 또 누가 죽여서 제 손을 들어왔나 보죠.”

“…….”

“그리고 이젠 제 손을 떠나 아저씨의 손에 갔네요.”

남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엘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아주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남자는 반지를 넣던 주머니에서 순식간에 총을 꺼내 이엘을 향해 겨누었다.

탕―!

놀란 새들이 푸드득 날아 도망쳤고 일부 나무들이 소리를 질렀다. 숲은 언제나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곳이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지켜볼 테고, 또 누군가는 옆으로 훔쳐본 것을 전할 테니까.

“왜 또 이런 허튼짓을 하죠?”

“으, 윽……! 이거, 놔!”

“제가 당신의 머리에 총이라도 쏴 줘야겠어요?”

나는 당신을 살려 줬는데, 나는 당신들을 최대한 살려 놓으려는데 대체 당신들은 왜 이러는 거야. 이엘은 이를 악물며 남자의 머리에 겨누었던 총을 뗐다. 그녀가 목을 조이고 있던 팔을 풀자, 그제야 숨통이 트여 막혀 있던 숨을 토해 낸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꺾고 주저앉은 남자가 희게 질려 있었다.

“총소리를 들었으니 늑대들이 올 겁니다. 가세요.”

“왜…… 왜 나를 풀어 주는 거지?”

“…….”

“안 죽여?”

그녀는 남자에게서 빼앗은 총과 들고 있던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부질없어요. 죽고 죽이는 건.”

“너…….”

“부디 그 반지로 황위에 오르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소 비꼬는 어조였으나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량을 얻어 살길을 찾은 건 자신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로스티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 중이던 늑대들은 별안간 들려오는 총소리에 깜짝 놀랐다. 노아는 이미 늑대로 변하여 이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몇몇 우논도 왕의 뒤를 따랐다. 물론 그 늑대들 속엔 스완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봐! 내가 따라가라고 했잖아!”

“시끄러워. 네가 살아 있으니 오헬이 죽은 건 아닐 거야.”

“너네 자꾸 걔 위험한 곳에 배치할 거야?!”

순전히 제 목숨 걱정하는 주제에. 앤디가 비죽거렸으나 스완은 그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소리를 높였다. 사실 스완은 슬슬 후회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닐까. 그렇게 비실비실하게 생긴 놈과 계약을 맺다니. 지옥 문턱 앞에 제 목숨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조우한 이엘은 상처는커녕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고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약하지 않다던 앤디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아, 솔직히 스완은 내심 안도했다.

“역시 총을 쐈나?”

“네. 뭐…… 그렇네요.”

그녀가 씁쓸하게 답했다. 남자를 만나러 가기 전, 노아는 그녀에게 총이나 검이라도 가져가라고 말했으나 이엘이 거절했다. 이엘은 남자를 신뢰하는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길 바랐다. 그런 얕은 수를 쓸 정도로 멍청하지 않길 바랐다.

“미안, 스완. 다신 이런 위험에 휘말리지 않을게.”

“너…… 괜찮은 거야?”

스완이 걱정 어린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이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실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종족이거늘. 안드로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종족이라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너희나 우리나 마찬가지군. 그의 나지막한 말에 이엘은 씁쓸하게 웃어넘겼다.

왕성으로 돌아온 이엘은 문득 밀로의 방 앞에 걸음을 멈췄다. 열린 방 안은 한기로 가득 채워져, 사람의 온기라곤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지, 밀로는 돌아간다는 말을 했던 날 새벽에 영지를 떠났다. 한참 잠에 빠져 있던 이엘의 방에 몰래 찾아와, 그녀를 조심스레 깨웠다.

‘미, 미르?’

‘다녀올게, 나의 엘.’

‘벌써? 이 새벽에?’

놀란 마음에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밀로가 그 어마어마한 힘으로 꾹 눌러 그녀를 다시 눕혔다. 당황한 이엘을 향해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보여 준 밀로가 큰 손을 흔들었다.

‘다치지 말고. 위험한 일 생기면 바로 올 테니까.’

‘너야말로. 조심히 다녀와. 나쁜 사람 만나지 않게 경계하고.’

‘정말 형 같네.’

밀로는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뜸 이엘의 이마 위에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쪽 소리가 울려 퍼지자 당황한 이엘은 화도 못 내고 떠듬떠듬 말을 하다가 말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무, 무슨……,’

‘네가 위험해지거나 네게 누군가 화풀이를 하면. 가차 없이 여길 떠날 테니까.’

‘미르.’

‘오헬. 나는 네가 어떤 존재여도 변함없어.’

‘…….’

‘네가 사실은 노인이어도.’

뭐? 다소 황당한 가설에 놀랐던 이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밀로는 변함없이 생글생글 웃더니 제 입술이 닿았던 그녀의 이마 위를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네가 남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

‘뭐, 네가 사실은 늑대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그러니까 차라리 위험해져.’

그걸 빌미로 널 데리고 떠나 버리게. 이 지긋지긋한 개들의 소굴 따위. 뒷말을 삼키고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엘은 도무지 이해 못할 말만 늘어놓는 밀로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그녀는 밀로의 진솔한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다녀와, 미르.’

‘응.’

‘기다릴게. 꼭 돌아와.’

‘당연하지.’

‘나 역시 똑같아.’

‘뭐가?’

‘네가 어떤 존재라도 나는 변함없어.’

‘…….’

‘설령 네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때 보았던 그 푸른 눈동자의 생물이라 할지라도.

‘그러니까 꼭 돌아와.’

이엘의 말에 밀로가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새벽을 틈타, 도망치듯 밀로는 영지를 떠나 버렸다. 너무 갑자기 찾아온 이별에, 솔직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엘은 그의 방을 스쳐 지나가며 괜히 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타니엘.”

그녀의 앞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곤하니 들어가 자도록 해라.”

“폐하.”

“왜?”

“아직도 밤에 잠을 못 주무십니까?”

“오랜 습관이야.”

“그래도 저택에선 조금이라도 주무셨던 것 같은데.”

그때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긴 했지만 아주 잠깐씩은 눈을 붙였던 것 같다. 그의 불면증은 되레 이 왕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노아는 내색 않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제가 차를 좀 내려 드릴까요?”

“효과는 별로 없더군.”

“오늘은 제가 폐하 곁에 있겠습니다.”

“…….”

“늘 누가 옆에서 공격할지 몰라 잠을 못 주무시는 듯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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