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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09화 (109/488)

109화

다소 무례한 언사에도 늘 그랬듯 노아는 넘어가 주었다. 잠시간 딱딱하게 노아를 보던 밀로가 다시 평소처럼 헤실거리는 얼굴로 돌아왔다. 나의 엘, 부디 위험한 일엔 나서지 말아 줘. 그의 칭얼거림이 섞인 장난에 이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넌 정체가 뭐야? 아무 냄새도 안 나고. 인간은 영― 아닌 것 같은데.”

“보면 몰라? 나 인간이잖아.”

“흥, 거짓말도 유분수지. 네가 어딜 봐서 인간이니? 내가 인간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호오, 그래?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면 뭐겠어? 잘난 조류의 머리로 어디 한번 맞혀 보시든지.”

“뭐? 이게 정말!”

“그렇게 가냘픈 몸뚱어리로 어디 나한테 상대나 되겠냐?”

스완은 얼굴이 새빨개져 씨근덕거리다가 주먹으로 밀로의 머리를 한 대 때리곤 이엘의 뒤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물론 큰 키가 가려지지 않아 몸을 잔뜩 웅크려야 했지만.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밀로는 혀를 쯧쯧 차며 스완을 향해 달려들려던 몸짓을 죽였다. 뭐 저런 약골이 다 있담? 저래서 오헬을 어떻게 지켜. 늑대들이 죄 저놈만 지키기에 급급할 정도로 약해 빠졌다.

“그만해, 스완, 미르. 지금 그런 장난이나 칠 때가 아니야.”

“그래. 제발 폐하 앞에선 좀 자중해, 둘 다!”

보다 못한 앤디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앤디는 노아의 눈치를 보랴, 안드로의 눈치를 보랴, 아주 눈이 열 개여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는 지금 모든 우논들이 저 두 사람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혼자 좌불안석이었다. 이러다 저 화상 둘을 데려온 이엘에게 불똥이 튈까, 그는 그게 걱정이었다.

“또 누구 하나 죽어야 정신 차릴 건가?”

“…….”

“그게 아니면 입 좀 다물어. 지금 전쟁을 코앞에 두고 희희낙락할 땐 아니지 않나? 내가 또, 너희 중 누굴 잃어야 하는 건가?”

노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말과 함께 주먹을 바르쥘 뿐이었다. 이제 모든 평화는 깨졌다. 뱀이 인간과 손을 잡은 그 순간부터, 위태롭게 유지되었던 평화는 사라졌다. 이젠 누가 먼저 치고 빠지느냐의 눈치 싸움만 남았다.

이엘은 노아의 불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전쟁을 치르고 오랜 시간을 침상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전쟁을 피해 영지로 돌아왔으나 연이은 업무로 밤엔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저택에선 늘 그녀의 자는 모습만 바라보다가 새벽에 나갔으니, 아마 잠을 자지 못한 지 꽤 되었으리라.

이엘은 이 모든 일이 제 탓 같아서 고통스러웠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해야 해. 이번 일은 그녀에게 그런 의미였다.

“폐하, 아무리 백조가 있다곤 해도 본거지를 찾는 게 가능할까요? 차라리 그 인간 놈을 빼돌리지 말고 환각으로 알아내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환각은 깨어나면 환각에 걸렸단 걸 알게 됩니다. 그럼 저희는 그 남자를 더는 이용할 수 없게 되죠. 남자에게서 고작 본거지의 위치 따위나 알고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엘의 말에 우논들이 웅성거렸다. 그럼 뭘 더 알고자 하는 건데? 이엘은 노아를 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

“말도 안 돼! 분명 우리가 전부……!”

“폐하! 사실입니까?!”

웅성거림을 지나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이종족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게 있다면 바로 보호석이었다. 총도 아니요, 대포도 아니요, 겨우 자그마한 돌덩어리 하나였다. 자신들의 모든 발목을 옥죄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돌덩어리.

2차 전쟁 때도 그 보호석들을 처리하는 게 핵심일 정도로 모든 종족이 경계하는 물건이었다. 물론 그러기까진 꽤 많은 수의 희생이 필요했지만.

절망하며 소리를 지르는 늑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엘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나마 비교적 이성적이라고 생각한 우논들도 이렇게 난리인데. 혹 다른 이종족들이 알게 된다면……. 암시장을 들켰을 때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살육의 현장이 펼쳐지게 될지도 모른다. 또 죄 없는 존재들만 무수히 죽어 나가겠지.

그건 3차 전쟁과 다를 바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그녀의 꿈과 다른 게 없다.

“그러니 제가 파괴하려고 하는 겁니다.”

“네가 무슨 수로!”

“오드가 파괴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반드시 파괴할 테니까.”

“…….”

“그 남자에게 전해 줄 물건에 추적 및 해제 결계를 걸어 둘 생각입니다.”

“그런 결계가 가능해?”

“물론 알려지지 않은 방식이에요. 그건 모두 나자르인에게 좋지 않은 결계식이니까요.”

이엘이 씁쓸하게 답하며 건너편에 서 있는 오드를 보았다. 오드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그녀는 이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수확을 거두려면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보호석을 만드는 것처럼 보호석의 기능을 해제하는 방식 또한 나자르인들에겐 해로운 일입니다. 금서에서나 나올 내용이에요.”

어릴 때부터 황궁에 숨어 살던 오드에게 이온과 이엘은 줄 수 있는 모든 책이란 책은 전부 전해 주었다. 아마 그때 섞여 들어갔던 책에 금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이런 결계식이 있다고 귀띔해 준 사람도 오드였다. 그는 괜찮다며 달랬으나 솔직히 이엘은 오드의 생명을 갉아먹는 이런 방식 따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오드의 성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오드는 현재 하나의 성력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 물건에 주입한 결계식이 지속되는 한, 다른 성력은 불가합니다. 설령 누군가 다치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해도 우린 오드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반드시 다치지 말고 돌아오는 게 제 목적입니다.”

오드는 이미 땅 아래 이온에게 거대한 결계로 하나의 성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잘게 쪼개진 성력은 당연히 하나에만 집중하는 성력보다 효율과 지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번 사냥에서 오드의 도움을 바라면 안 된다. 그의 도움은 어디까지나 추적과 해제에만 집중되어야 하니까.

“늑대들은 사냥을 함께 한다고 하셨죠. 무리가 함께 몰아서 사냥을 한다고.”

“그래.”

“그러니 합이 중요합니다. 제가 설명드린 대로 몰이를 하는 몰이꾼과 마지막에 일격을 가하는 리더가 합을 맞춰야 해요.”

“…….”

“몰이꾼은 무리에서 가장 어리거나 약한 개체가 하는 것이니 제가 하겠습니다.”

“안 돼! 네가 왜 해?!”

난데없이 소리를 지른 건 가만히 듣고 있던 스완이었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네가 몰이꾼을 하면 어떡해! 너 죽고 싶어서 그래? 나 참, 늑대들은 대체 뭐 하는 종족이야? 왜 어리고 약한 개체가 몰이꾼을 하는 건데!”

“스완. 미안한데 여기에서 내가 가장 약한 게 아냐.”

“뭐?”

“제일 약한 건 너야, 스완.”

“…….”

그녀의 말에 스완은 열을 내던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다. 제일 약한 건 자신이지. 하지만 그건 둘째 치고, 네 목숨이 나랑 이어졌단 생각은 안 하니?! 다시 열변을 토해 내는 스완을 보며 앤디가 히죽 웃었다.

“어이, 백조. 뭔가 착각하나 본데 몰이꾼이 제일 위험한 게 아냐.”

“뭐?!”

“어리고 약한 개체가 앞에 나선다는 건 뒤에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즉, 경험을 쌓게 해 주려는 거라고.”

하지만 넌 그런 경험이 필요 없을 텐데. 그가 뒷말을 덧붙였다. 이엘은 불안한 표정으로 스완을 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우논들에게 강조했다.

“부디 이번 습격에선 스완을 지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둬 주십시오.”

“알고 있어.”

“저는 제 스스로 어떻게든 살 수 있지만, 쟤가 죽으면 저도 죽거든요.”

마치 자신이 짐 덩어리가 된 것 같아 스완은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그러나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독설에 차마 대꾸할 말이 없었다. 풀이 죽은 스완을 뒤로하고 이엘은 빠르게 무리의 구성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직 남자의 뒤를 몰래 쫓는 우논이 돌아오지 않아 구체적인 계획은 다 말할 수 없었으나 간략한 시나리오를 설명하며 차근차근 틀을 잡았다.

앤디는 그런 이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설핏 웃음을 터뜨렸다. 사냥 계획은 무리의 리더가 짜는 건데, 그 어떤 늑대들도 지금 이 상황에 불만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게……. 심지어 노아마저 뒷짐을 진 채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즐거움을 숨기지 않고 자신도 자세를 고쳐 앉아 주의 깊게 설명을 들었다.

*

“뱀들은?”

“연구소를 복구하느라 영지는 뒷전입니다.”

앤디가 습격한 연구소가 반파되었다. 연구에 사활을 건 뱀이니, 영지 일보다 그쪽에 신경을 쏟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반격의 낌새도 보이지 않다니. 마치 이번 전쟁이 저희와는 관련 없다는 듯이 구는 것 같아 구역질이 났다.

“영지나 연구소 내부로 습격은 불가능할까?”

“네. 일전에 매복해 있던 뱀들에게 저희 병사 하나가 크게 당했습니다.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삼엄합니다.”

“이번 일로 뱀과 인간의 사이가 흐트러지길 기대하는 수밖에.”

“원래도 원수 같은 사이였으니 오래 지속될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대체 무엇 때문에 그 둘이 손을 잡았던 걸까.”

“지금으로서는 백조의 능력을 믿을 수밖에요.”

분명 로빈과 그 턱수염이라는 자,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아주 은밀하게 이루어진 뱀과 인간의 만남이라. 노아는 탁자 위에 놓은 화분의 꽃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 야! 만지지 마!

바락 소리를 지르는 꽃 때문에 안드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하다 하다 저런 꽃 따위도 폐하를……. 솔직히 말하자면 안드로는 요즘 꽤 예민하고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주군에게 버릇없이 구는 타 종족의 몇몇 놈들 때문이었는데, 거기엔 저 꽃도 포함된다.

“버릇이 없군요. 당장 내다 버리십시오, 폐하.”

― 뭐?! 날 왜 내다 버려!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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