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스완은 천연덕스럽게 이엘부터 찾았다. 자신이 무리에게 다녀온 사이에 먼저 영지로 돌아갔다는 늑대들의 말을 듣고 어찌나 놀랐는지. 선대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보통 결속으로 계약관계가 되면 인간과 백조는 늘 붙어 다녀야 한다고 했다. 서로의 목숨이 서로에게 달려 있으니 적어도 눈에 보이는 곳에 항상 존재해야 안심이라고.
근데 먼저 떠났다고? 그 이야기에 빨리 인간을 따라가자고 소리를 빽빽 내질렀다가 노아에게 정말 죽을 뻔했다. 늑대의 왕이라는 자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혐오와 짜증이 가득한 눈이었으나 자신과 그 인간의 목숨이 이어졌기 때문에 억눌러 참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스완은 그따위 협박에 넘어갈 백조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영혼이 이엘과 연결되어 있는 한, 자신을 건드리는 늑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늑대의 왕이 인간 소년을 꽤나 각별하게 여기는 눈치니까.
“도대체 반쪽이란 게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오헬.”
“뭐?”
“뭐야. 너희 아무것도 몰라?”
이래서 멍청한 육지 동물들이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스완이 성내로 들어섰다. 안드로가 답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며 스완의 뒤를 쫓으려 했으나 앤디가 그를 잡아 말렸다.
“참으시죠, 안드로 님.”
“고작 백조 따위가……,”
“오헬과 목숨이 이어져 있습니다.”
“뭐?”
“영혼이 결속됐다나 뭐라나. 그걸로 목숨이 서로 이어졌대요. 젠장! 그런 건 줄 알았으면 오헬 녀석을 가둬서라도 절대 보내지 않았을 텐데.”
“……폐하께서도 모르셨나 보군.”
“도착하고 나서야 아셨다고 했어요.”
다른 자도 아니고 하필이면 오헬이라니. 저 백조가 안하무인이 되어 활개를 칠 게 눈앞에 선했다. 그런 위험한 짓을 노아가 허락했을 리 없는데. 안드로는 가만히 점이 되어 사라진 스완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서 밀로를 데려와라.”
“밀로요? 드디어 풀어 주신대요?”
“앤디. 너는 밀로를 어떻게 생각하지?”
“글쎄요. 용들은 원래 그런 성격이잖습니까. 제멋대로, 희희낙락. 생각 없이 사는 종족 아닌가요?”
밀로가 용이라는 사실은 아주 극소수의 우논들만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을 제한 나머지 우논들은 밀로의 행동거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애당초 이엘을 따라 영지로 들어온 떨거지에 불과한 존재였다. 같이 온 오드야 나자르이니 환영한다 쳐도, 밀로는 힘만 센―그마저도 원래 힘이 센 이종족들에겐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이점인―것뿐이니 반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의 관계는 잘 다져 놓아야 한다.”
“안드로 님은 11년 전 일을 잊으셨습니까?”
앤디가 눈가를 구겼다. 2차 전쟁 때 어떠했던가. 난데없이 들이닥쳐 무자비하게 보이는 족족 죽여 버렸다. 피에 굶주린 것처럼 실성하여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또 무책임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 종족과 엮이면 좋을 게 전혀 없는데요, 안드로 님. 앤디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맞아. 용들과 엮이면 곤란해질 테지.”
“근데 왜……,”
“용들은 원래 흥미를 잘 갖지 않거든. 네 말대로 제멋대로인 데다가 유희만 찾기 급급한 종족이라.”
“…….”
“근데 그 용이 오헬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할 정도로.”
“그게 오헬에게 해가 됩니까?”
그 대목에서 앤디가 살짝 흥분했다. 가뜩이나 제 가계에 입적시키려는 걸 노아가 허락지 않는 통에 예민했는데. 안드로는 앤디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건 그만두도록 해.”
“그게 아니라……,”
“그래 봤자 인간이다.”
“…….”
“무릇 인간이란 저밖에 모르는 종족이지.”
안드로는 그 어느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노아의 절친한 친우이기도 했지만 안드로 자신의 친우이기도 했던 그 남자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동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밖에 모르는 인간이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면, 용은 어떻게 나올지 안 봐도 뻔하다. 용을 적으로 돌리면 곤란해.”
“오헬이 왜 우리 뒤통수를 칩니까?”
“그건 상황이 닥쳐오지 않으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그건 압니다만, 그런 식으로 속단하여 말씀하시는 건 자제해 주십시오.”
앤디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안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손등 위로 푸르른 핏줄이 올라섰다.
“그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에요.”
“…….”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 앤디의 머리에 기름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왜 주드의 기름을 가져갔을까. 주드는 왜, 그 아이를 위해 기름을 내어준 걸까. 처음엔 기름으로 인해 주드가 더 빨리 눈감았음에 분노하여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드의 선택이었으므로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다. 그 뒤로는 아예 묻고 살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기에.
근데 왜 하필 기름일까. 그 많은 양의 기름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고?
늑대의 기름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죽기 전에나 나왔다가 다시 흡수되는, 별 의미 없는, 일종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에 불과했다. 다만 그의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 하나.
장례용.
“저…… 안드로 님.”
“왜? 말을 하다가 말고.”
“그게 아니라. 혹시 이전에 늑대의 기름으로 행해졌던 장례법 말입니다.”
“기분 나쁜 이야기는 왜 또 꺼내 놓느냐.”
“그건 그저 장례법에 불과한 것입니까?”
“그래, 맞아. 인간의 잔인하고 오만한 행동일 뿐. 왜 그러지?”
“아닙니다. 그냥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하하 웃으며 밀로를 데리러 가겠다고 말하곤 안드로에게서 등을 졌다. 돌아선 앤디는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젖어 들었다.
왜, 그 많은 양의 기름이 필요했을까. 그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장례법은 이제 와 사용하기엔 낡은 형식이다. 감히 인간들은 이제 꿈꿀 수조차 없는 장례법이었다. 아니. 모든 걸 다 떠나, 사용한다면 대체 누구를 위한 장례 기름인 걸까. 목적도 방향도 알 수 없다.
혹시 알려지지 않은 용도라도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걸 알아내야만 하는 걸까. 이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데. 나는 더 이상 영지에 소란이 일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냥…… 차라리 그냥 장례 용도로 가져간 것이었으면 좋겠다. 누구를 위한 장례용 기름인지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그냥 그런 오만한 행동이기를……. 기우이기를 바라며 주먹을 꾹 쥐었다.
*
“괴상망측하군.”
안드로가 혀를 찼고 앤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밀로는 그를 따라 나올 때부터 저런 상태였다. 머리 위에 웬 화관 하나를 올려놓고.
“왜? 진짜 예쁜데. 누가 만든 건지.”
밀로가 이엘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왜 화관을 쓴 건 밀로인데, 부끄러워지는 건 자신인지 모르겠다. 이엘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밀로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저건 왜 쓰고 온 거야?! 함께 나갔던 새끼 테르들이 없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 ‘괴상망측’한 화관을 만든 게 자신이란 걸 들킬 뻔했다.
“밀로의 것도 만들었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노아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아, 맞다……. 내가 폐하께도 드렸지. 이엘이 그의 옆에서 슬쩍 벗어나려 하자 노아가 그녀의 소매를 붙잡아 당겼다.
노아는 그 화관이 시들지 않게 얼음으로 얼려 자신의 서재에 올려 두었다. 근데 그 화관과 똑같은 걸 저놈도 갖고 있을 줄이야. 심지어 저건 관리까지 한 모양인지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였다.
이엘은 부끄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노아의 틈을 보고 재빨리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곤 서둘러 밀로를 자리에 앉혀 버렸다. 미간을 찌푸린 노아는 별수 없이 상석에 앉았고, 그걸 신호로 모두가 차례차례 자리에 착석했다. 식사 자리가 시끌벅적했다. 왕성에서 이루어진 꽤 오랜만의 식사라.
“근데 밖은 왜 저렇게 어수선해?”
스완이 제 양쪽 귀를 틀어막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안 그래도 예민한 성질머리가 더 예민해졌네, 쯧. 늑대 하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처럼 스완은 잔뜩 예민해져 몹시 긴장한 표정이었다. 웃기게도 이 많은 늑대들을 눈앞에 두고도 꿈쩍 않던 백조가 저 작은 소동에 요란이었다. 이엘은 그의 앞으로 물이 담긴 잔을 내밀며 안색을 살폈다.
“스완. 괜찮아?”
“밖이 너무 시끄러워. 왜 저러는 거야?”
“미안. 미끼가 도망쳐서 잡는 척을 해야 되거든. 근방을 뒤지는 척하느라 좀 시끄러울 거야.”
“미끼를 왜 도망치게 한 거야? 내가 능력을 쓰면 다 알아낼 수 있는데.”
“그것 말고도 해야 될 게 많아서. 일부러 놔준 거야.”
그녀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다. 스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스완까지 자리에 앉고 나서 음식이 차례차례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그래 봤자 각자 먹는 음식의 종류는 한정적이겠지만 제법 많은 종류로 꾸려진 진수성찬이었다.
“많이들 먹어라. 우논인 너희들에겐 별 의미는 없는 음식이겠지만.”
“감사합니다, 폐하.”
늑대들이 다시 시끌벅적 떠들며 식사를 시작했다. 이엘도 앞에 놓인 스튜를 떠서 먹었다. 메이슨이 만들어 주었던 스튜만큼이나 일품이었다. 이엘은 따끈따끈한 스튜로 속을 데우며 옆에 앉은 오드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비록 불청객이 몇 보이지만, 노아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으로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먹지 않고도 배부르다는 걸 알게 되다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식사 후엔 몇몇 우논들과 함께 집무실에 모여 앞으로의 일정을 나누었다. 아직도 이엘의 계획에 반대하는 우논들이 있었지만 백조까지 잡아 왔으니 넘어가자는 여론이 강했다. 비록 그 백조가 저희들의 말을 전혀 안 듣는다는 문제점이 있을지라도.
“밀로. 너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미안한데 이번 작전엔 나는 좀 빼 주시죠, 폐하.”
“뭐?”
“죄송하지만 전 제가 살던 곳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
뭐야, 기억 잃은 거 아냐? 아무것도 모르는 우논들은 웅성거렸지만 노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밀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 가족들이 슬슬 절 찾을 때가 돼서요.”
“다녀와.”
“그래도 됩니까?”
“그래. 올 거라면 혼자서만 돌아오도록. 네 가족은 별로 달갑지 않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노아의 말을 곱씹으며 이엘은 생각에 잠겨 간다. 어쩌면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아는 밀로의 정체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연하죠. 그러니 이번에는 부디.”
“…….”
“내가 아끼는 것에 흠내지 마시고, 빼앗기지 마시고, 탐내지 마십시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