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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07화 (107/488)
  • 107화

    “……좋아. 그렇게 할게.”

    “오헬!”

    노아가 그녀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빛이 사라졌다. 이제 완연한 육지 생물이 되어 버린 스완은 촐싹거리듯 자리에서 통통 튀어 올랐다.

    “고마워, 내 반쪽. 네 덕에 내가 뭍에서 살게 되었어!”

    “너야말로 참 약았구나?”

    “응, 그런 소리 아주 많이 들어.”

    스완은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엘은 한숨을 쉬며 슬쩍 노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백조가 뭍에서 평범한 이종족들처럼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혼결속뿐이었으나 이건 거의 불가능에 수렴했다. 이 은밀한 방법의 존재는 오로지 백조들만 알고 있었으며,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인간뿐이었다. 또한 높은 수준을 요하므로 특별한 성직자가 아니면 불가능했는데, 나자르인이 아예 멸족되었으니 이제 영영 뭍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모두가 단언했다.

    그러나 스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뭍으로의 삶을 갈망했다. 나이가 어려 철이 없다며 성체들의 나무람을 들으면서도 그는 꿋꿋했다. 언젠가는 꼭 뭍으로 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다림이 종식됐다.

    “내 반쪽. 앞으로 잘 부탁해.”

    “그렇게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줄래?”

    “음, 그럴까?”

    백조들에게 뭍은 금지구역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극소수의 인간과 영혼결속으로 뭍에 올라온 백조들의 말로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후손들을 단속하여 절대로 뭍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깊고 깊은 호수 안쪽에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으며 무리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엘은 분명 그중 하나쯤은 뭍을 바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원래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본성이니까.

    그래서 부러 인간인 자신이 홀로 호수 근처를 배회했다. 아무도 없이 자신만 나타나면 흥미를 가진 백조가 하나는 얻어걸리겠거니 싶었고, 실제로 성공했다. 근데 그렇게 해서 건진 게 저 철없는 놈이라니. 이걸 좋아해야 돼, 실망해야 돼? 어지간히 까탈스럽고 예민한 종족이라,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영혼결속으로 인간이 얻는 이득은 없는 것 같은데?”

    우논 중 하나가 중얼거리자 스완이 씨익 웃었다. 그는 순식간에 이엘의 옷깃을 잡아 호수 안으로 냅다 던져 버렸다. 그 행동에 경악한 오드와 우논들이 소리를 질렀고 노아는 이미 늑대로 변해 호수로 뛰어든 후였다. 그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이엘을 찾기 위해 잠수했으나 그보다 먼저 수면 위로 물을 뿜으며 그녀가 떠올랐다.

    “미쳤어? 이러다 내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너도 죽어!”

    “앗. 그렇구나, 미안. 그건 생각 못 했네!”

    샐쭉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이엘은 기가 차서 두 주먹을 바르쥐었으나 성질을 꾹 눌러 참았다. 바로 옆으로 다가온 노아의 분노가 자신에게까지 느껴졌으니까. 이엘은 그가 스완의 목을 뜯기 전에 서둘러 그의 등을 지지 삼아 뭍으로 올라왔다.

    몸에 물기 하나 없이 멀쩡한 이엘을 보며 우논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옷은 눈 깜짝할 새에 다 말라 버렸다.

    “보다시피 신체의 특성도 일부 공유가 되기 때문에 내가 뭍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처럼 오헬도 물에서 자유를 얻게 되지. 그리고 이건 확실하진 않지만, 드물게 생각을 공유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어.”

    “스완. 경고하는데 다신 이런 장난 치지 마. 난 네 장난을 받아 주기 위해 너와 계약을 한 게 아냐.”

    “미안해, 내 반쪽. 각별히 주의하도록 할게.”

    “됐고, 넌 가서 네 무리에게 인사라도 하고 와. 기다릴 테니까.”

    괜찮다는 스완을 억지로 호수로 돌려보냈다. 싸해진 호수 안에 적막만 맴돌았다. 우논들은 저희 왕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특히 영혼결속을 궁금해했던 우논은 이 사달이 제 탓인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다. 이엘은 시선을 위로 올려 하늘을 보다가 불안해하는 그 우논의 곁으로 다가갔다.

    “폐하. 계획대로라면 이제 곧 영지에서 사냥을 떠날 겁니다. 폐하께선 여기서 다른 테르분들을 기다리셨다가 스완을 데리고 천천히 돌아오십시오.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이엘의 곁으로 다가온 노아가 말없이 그녀의 로브를 더 깊게 여며 주었다.

    “곧 따라갈 테니,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바로 손 떼도록.”

    “네, 폐하.”

    “이번 일이 잘 되지 않으면 앞으론 내 마음대로 할 거야.”

    “…….”

    “약속해, 오헬. 악몽 따위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알겠습니다.”

    그녀가 노아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 우논과 함께 숲을 향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손 안에 포근히 담겨 있던 온기가 사라져 버리자 노아는 불안감에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불안까지 모조리 떠안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막상 불안이 몰려오니 참을 수가 없다.

    내 불안함보다 네 불안함이 더 클 텐데. 그동안 너는 이 불안함을 어떻게 내색 않고 참았던 건지.

    적어도 그에게 있어 이건, 기특한 게 아니라 안타까운 일이었다. 숨 쉴 구멍을 스스로 뚫는 모습은 대견하고 본받을 만했으나, 적어도 그에겐 가장 보기 싫은 모습이기도 했다.

    *

    ‘여드레 후에 로스티 숲, 자정입니다. 잊지 마세요.’

    ‘홀로 나와라. 수작을 부리려 늑대라도 데리고 온다면……,’

    ‘그렇게 저를 믿기 어렵다면 동료와 함께 오시면 되잖아요.’

    ‘…….’

    ‘다만, 그 경우엔 당신의 동료는 황자의 반지가 누구에게 있는지 알게 되겠지만요.’

    그녀의 지시대로 늑대들은 이엘이 떠나고 나흘 뒤에 요란스러운 사냥 준비를 마쳤다. 마치 그 근방 이종족들에겐 죄 알리려는 것처럼 시끌벅적하게 영지를 떠나 버린 것이다. 이 소식은 영지 내 은밀한 감옥까지도 전해졌다. 그리고 이엘은 노아와 오드를 뒤로하고 먼저 영지로 돌아와 남자를 만났다.

    혼신의 연기를 하느라 솔직히 맥이 다 빠졌지만, 그 덕에 남자의 의심이 반절은 사라졌으니 썩 나쁜 결과는 아니다. 남자는 극소수의 늑대들만이 남겨진 영지 상황을 대충 훑어보더니 그녀를 향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네가 말한 눈깔을 갖다 주마.’

    ‘저를 멍청한 놈으로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새끼 독수리의 눈알을 언제쯤 뺐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가는 길에 대충 독수리 하나 잡아 뽑아 오면 거래는 파기됩니다.’

    ‘쯧. 너도 어지간히 사람을 못 믿는구나.’

    ‘…….’

    ‘걱정 마. 네가 말해 준 시기와 품종으로 확실하게 골라 가져다줄 테니.’

    품종―혈통―마다 시력에 차이가 나므로 보관하는 것도 일일이 기록한다고 들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는 턱수염의 가까운 수족이었고 덕분에 거래도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엘은 주먹을 쥐며 이를 꽉 깨물었다. 이렇게 돌려받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이슥한 밤을 타, 남자는 이엘이 안내해 준 좁은 구멍을 따라 산을 올라 도망쳤다. 그리고 그녀의 지시대로 추격하는 척, 몇몇 늑대들이 남자의 뒤를 쫓았다. 그즈음 해서 노아와 무리가 영지로 돌아왔다. 그의 성질 같았으면 곧바로 돌아왔을 테지만 이번만은 이엘의 말을 따라 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는 꾸역꾸역 시간을 지체해 가며 뒤늦게 돌아왔다.

    “폐하. 돌아오셨습니까?”

    “…….”

    “계획대로 추격대가 몇 떠났고, 추격에 실패한 척하며 곧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우논 한 분만이 그 남자의 뒤를 은밀하게 쫓을 테니, 그분이 돌아오시는 대로 지도에 표시를 하여 본거지와 활동 지역을 체크하면 됩니다. 이전에 제가 알아냈던 지역과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폐하. 곤하십니까?”

    아무 말이 없는 노아를 보며 이엘도 입을 다물었다. 하긴. 아무리 이종족이라 할지라도 꽤 멀리 다녀왔으니 곤하기는 할 터. 이엘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일 보고하겠노라 말하곤 돌아서려 했다.

    “그런 이야기 말고.”

    “네?”

    “사적인 자리에선 사적인 이야기만 해.”

    “…….”

    “나는 네 상사가 아니다.”

    노아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느라 매 시각이 초조했는데 정작 돌아오자마자 저를 반기는 건 고작 보고서라니. 하다못해 안드로도 대뜸 저 말부터 하진 않을 것이다.

    “식사는 하셨나요?”

    커프스단추를 풀던 노아의 손짓이 멈췄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그를 올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했어요, 저도.”

    “…….”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오헬.”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데.”

    노아는 대답 대신 이엘의 손을 잡아 움켜쥐었다. 그러곤 습관처럼 그녀의 두 번째 손가락을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언젠간 이 손에 반지를 되찾아 끼워 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부터 내 성으로 들어오면.”

    “밀로를 먼저 풀어 주셔야죠.”

    이엘이 소리 내 작게 웃었다. 노아는 미간을 설핏 찡그리더니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밀로를 풀어 주고 성으로 들여! 식사 시간에 맞춰 데려와.”

    “네, 폐하.”

    문밖에서 그의 명령을 들은 늑대들이 작게 소란을 일으켰다. 이제 됐냐는 식으로 쳐다보는 노아를 보며 이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폐하.”

    “또.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격식 좀 차리지 말라고. 그가 꿍얼거렸으나 이엘은 웃을 뿐이다. 노아는 어느새 그녀를 에스코트하듯 손을 잡고 소파 쪽으로 끌었다. 그녀가 소파에 앉자마자 언제나처럼 화로에 불을 지펴 춥지 않게 공기를 데웠다.

    “나타니엘.”

    “…….”

    “……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 준 것이지?”

    그가 눈치를 보듯 말을 덧붙였다.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제 말 때문인 듯했다. 이엘은 물끄러미 노아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어머니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아. 그렇군.”

    “원래는 오라비의 것이었지만요.”

    “…….”

    “선황께서 황자의 이름을 지어 두셨기 때문에 그 이름은 결국 제게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제 처지가 더 우스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갖고 있는 이름마저 밀려서 떠넘겨진 것이라니.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건너편에 앉은 노아는 들고 온 예쁜 잔을 내려놓고 차를 따라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내 이름 역시 내 형의 것이었어.”

    “…….”

    “알다시피 이종족은 성이 따로 없으니, 이름이 유산이거든. 내 형은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어. 그래서 이름도 버려졌지.”

    이엘은 노아가 건넨 잔을 들고 뜨거운 차를 입에 댔다. 추위가 한결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은근하게 녹아져 사라진다. 마치 평안이 찾아온 것처럼.

    “그러나 이 이름은 이제 내 것이다.”

    “…….”

    “내가 네게 평안을 가져다줄 테니까.”

    이름처럼 네게 안식처가 되어 줄 테니까.

    “그러니 네 이름도 내게 그런 거야.”

    “…….”

    “나타니엘.”

    신께서 주신 소중한 존재. 그는 부르지 못할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명명했다.

    *

    “와, 여기가 늑대의 영지야?”

    “…….”

    “세상에, 세상에! 나 이런 데는 정말 처음이야!”

    “경고하는데 폐하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글쎄,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건데?”

    안드로는 미간을 좁히며 앤디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저런 걸 가져왔냐는 시선이었다. 앤디는 어깨를 으쓱이며 매서운 안드로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자신이라고 저런 놈일 줄 알았겠나? 이엘과 노아의 지시대로 대규모 사냥 무리를 끌고 호수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백조가 잡힌 후였다. 심지어 그 백조를 잡은 건 이엘 혼자뿐이었단다. 그러니 저렇게 철없고 제멋대로인 백조를 잡은 것도 이엘의 책임이란 소리지.

    그래서 앤디는 입을 꾹 닫았다. 곧 죽어도 제 동생한테 탓이 돌아가는 건 싫어서.

    “있지, 내 반쪽은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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