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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06화 (106/488)

106화

“할게!”

“…….”

“아이씨, 하면 되잖아!”

이엘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슥 내리고 고개만 뒤로 쏙 돌렸다.

“이번엔 내가 거절할게. 네 말대로 네가 도망치면 나도 닭 쫓던 개가 되는 꼴이라서.”

“안 도망쳐! 맹세하면 되잖아!”

“…….”

“너도 알고 있잖아. 결속을 맺을 때 한 맹세는 죽을 때까지 깰 수 없는 거!”

“…….”

“계약이 끝날 때까지 도와줄 테니까 하자고!”

다급하게 남자가 와다다다 제 할 말을 쏟아 냈다. 이엘은 남자에게서 등을 진 채 고개를 내려 검은 늑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몇 번씩 깊게 깜빡였다. 거봐요, 폐하. 제가 가능하다고 했죠? 기세등등한 이엘의 얼굴을 보며 노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떻게 한 번을 실패하지 않는 건지.

“좋아. 그럼 거래는 성사된 거야.”

이엘이 노아의 등에서 내려 발을 땅에 붙였다. 씨근덕거리는 남자에게 그녀는 가지고 왔던 옷을 건네주었다.

“자, 옷이야. 입어.”

“너…… 생긴 거랑 다르게 약았구나?”

“응,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대충 대꾸하는 인간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남자는 별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몇백 년을…… 아니. 평생을 기다려도 오지 못할 기회였다. 어떻게 멸족되었다던 나자르를 데리고, 그것도 이 은밀한 계약을 알고 있는 인간이 자신을 찾아올 수 있겠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시면 큰소리를 치시겠지만 그는 기필코 이 인간과 계약을 맺고 싶었다.

“그 전에 통성명이나 하고 싶은데. 난 스완이야. 네 이름은?”

“…….”

“네 이름은 뭐냐니까?”

이엘은 물끄러미 스완을 쳐다보았다. 본디 이름이란 나누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법이었다. 그녀는 아주 잠깐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오헬. 내 이름이야.”

“좋아, 내 반쪽. 아주 잘 알겠어.”

다소 능청스러운 별칭을 부르는 스완 때문에 이엘이 입을 벌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 기분 나쁘거든.”

“흠, 글쎄. 네가 내 반쪽이 되는 건 맞잖아.”

“…….”

“우린 영혼을 공유하게 될 테니.”

스완이 히죽 웃으며 은근한 눈짓으로 노아를 쳐다보았다. 늑대는 계약의 내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말에 의문을 품고 있는 걸 보니.

“어서 한 몸이 되자, 오헬.”

“…….”

“너와 모든 걸 공유하고 싶어.”

남자는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예쁘고 수줍게 웃었다.

아주 먼 옛날, 백조―정확히는 고니를 의미하므로 백조와 흑조 모두―는 무슨 잘못을 저질러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 저주의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백조들이 호수에 발이 묶였다는 것밖에는 알려진 게 없었다.

아무튼 백조는 저주로 인하여 영원히 물에서만 살게 되었는데, 뭍으로 나오게 되면 움직임이 매우 제한적이고 느려지며 짧은 시간 내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백조는 한번 뭍으로 나오면 혼자 힘으로는 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백조들은 그날로부터 땅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일단 한번 올라서면 절대로 내려올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으니. 그래서 백조들은 일찍이 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여 살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알려진 사실이었다.

“영혼을 공유하다니. 대체 저게 뭔 소리지?”

노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지만 이엘은 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스완이 웃음을 꾹 억눌러 참으며 종알거렸다.

“한 몸이 된다는 말이야.”

“뭐?”

“정확히는 영혼이 하나가 된다고 해야 하나. 내가 죽으면 쟤도 죽고, 쟤가 죽으면 나도 죽는. 뭐 그런 관계가 되는 거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잖아.”

“방법이 없어요. 백조는 영혼을 결속하지 않으면 뭍에서 살 수 없거든요.”

“오헬!”

“폐하. 제 부탁은 들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늑대들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을 테니 믿어 주세요.”

“넌 이 와중에 또……!”

“물론 저 연약한 백조를 지켜야 한다는 짐은 좀 늘게 되겠지만요.”

보시다시피 저는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거든요. 그녀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싸해진 분위기는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스완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너희가 날 잘 지키면 저 녀석은 아주 오―래 살 수 있으니까.”

“입 닥쳐.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노아가 싸늘하게 말했으나 스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늑대를 앞에 두고도 저렇게 날뛰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말을 안 듣는 놈인 게 틀림없다. 어째 걸려도 저런 놈이 걸린 건지. 이엘은 분노한 노아가 그의 목을 물어뜯기 전에 서둘러 오드를 붙잡았다.

“오드. 어서 준비해.”

“오헬. 잠깐 얘기 좀 하자.”

노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숲을 향해 걸었다. 그는 조용한 숲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돌아서 이엘과 마주한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여태 네 말을 듣지 않고도 믿었어. 네가 오자고 해서 왔고, 네가 준비하라고 해서 사냥도 준비했다.”

“…….”

“하지만 저건 안 돼. 네가 위험에 빠지는 걸 두 눈 뜨고 보라고? 넌 날 어디까지 멍청한 왕으로 만들 거야.”

“위험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제 목숨이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건, 위험한 일 맞아요.”

“그런데도 하겠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게 무너질 거예요.”

“악몽 때문에 그래?”

“…….”

“그때 꿨다던 그 악몽이 널 이렇게 초조하게 만드는 거냐고.”

노아가 전에 없이 화를 냈다. 그냥 단순한 악몽이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왜 자꾸 그 꿈에 매달리는 건지 모르겠다.

노아는 그냥 그녀가 앞으로 남은 생을 부디 안온하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랐다. 약이 떨어져 여자란 게 들킨다면? 그것 또한 감춰 줄 것이다. 어떻게든! 비록 고되고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어떻게든 그녀의 삶을 지켜 줄 것이다. 노아는 그녀가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꼴은 보기 싫었다.

사서 고생하지 않아도 네 삶은 언제나 힘들잖아. 언제나 고되잖아. 왜 자꾸 힘든 길을 만들어, 왜.

왜 나를 무능하게 만들어서 죄책감에 사무치게 하는 거야, 왜.

“오헬. 왜 너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

“……폐하.”

“아니. 내 마음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좀 그만하면 안 되나?”

“…….”

“네 모든 불안은 내가 떠맡겠다고 했잖아. 왜 나서서 자꾸 위험한 상황을 만드는 거지? 왜 넌 날 항상 무능력한 자로 만들어.”

그가 한숨을 쉬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보호석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불안했다. 물론 보호석은 이종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걸 이엘이 파괴할 의무는 없었다. 파괴하지 않아도 노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악몽 같은 상황은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굳이 그 보호석을 파괴하기 위해 이따위 계약을 해야 한다니. 기가 차고 화가 났다. 순식간에 아무것도 못 하는 짐승으로 전락된 기분이었다. 보호석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는 멍청한 놈이 되어 버렸다.

“목적 없이 그대로 주어진 삶을 사는 걸 원치 않아요.”

“…….”

“제가 가꾼 정원에 핀 꽃처럼, 그저 누군가의 손에 심겨지고 키워지는 삶은 싫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잖아.”

“노아.”

이엘이 노아의 팔을 잡아 내렸다. 그녀는 그날 밤처럼 씁쓸하고 괴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내겐 목적이 있어요.”

“…….”

“반드시 살아남는 것. 그게 내 목적이에요.”

속이 또 문드러진다. 살고 싶은 의지를 보이는 게 못내 대견하면서도 그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언제나 노아는 그녀를 볼 때마다 양가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엘이 다정한 눈빛으로 결연히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건 예지몽 따위가 아니라고 수백 번을 말해 봤자 네 귀엔 들리지 않겠지. 노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 말 따윈 네게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강요할 처지도 안 되고 그럴 마음도 없다.

“……좋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폐하.”

“목숨이 이어진 것 말고는 더 위험하진 않겠지?”

“네. 그것 말고는 정말 없어요.”

차라리 이 일을 서둘러 처리하는 게 좋겠다. 빨리 본거지를 찾아 쳐들어가서 일을 매듭짓고 저 망할 백조와의 계약을 파기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말다툼을 하며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건 더는 싫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숲을 빠져나왔다.

“오드. 준비해라.”

“네, 폐하.”

스완과 이엘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두 사람이 눈을 감고 오드가 무언가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자 하얀 빛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빛이 두 사람을 둥글게 둘러싸자 이엘이 눈을 떴다.

“스완. 계약이 성사되는 동안 도망치지 않고 나를 위해 능력을 쓰겠다고 약속해.”

“좋아. 그렇게 할게. 파기될 때까지 난 네가 원하는 곳에 언제나 널 위해 있겠어.”

“계약은……,”

“오헬. 우리의 계약 기간은 5년이야. 동의하니?”

“뭐……?”

이엘이 인상을 확 찡그리며 그를 보았다. 빛이 유지되는 동안 성립되는 맹세는 죽을 때까지 파기될 수 없다. 하얀 빛이 여전히 두 사람 사이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었다. 스완은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양쪽 보조개가 깊게 파일 정도로 예쁘게 웃었다.

“맹세는 공평하게 진행되어야 해. 네가 하나를 걸었으니 나도 하나를 걸 수 있지.”

“너…….”

“나는 이것 말고는 네게 원하는 맹세가 없어, 오헬.”

“…….”

“어서.”

저 능구렁이 같은 백조가. 노아가 분개했지만 그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오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계약은 한 백조당, 딱 한 번만 가능했다. 즉, 지금 저 맹세를 하지 않으면 이엘은 다른 백조를 찾아야 하는 셈이었다.

이엘은 서둘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5년이면…… 5년이면 얼마나 긴 시간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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