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그건 이종족의 능력을 차단시키기 위해 나자르인들이 숨과 피를 쏟아 내어 만들었던 ‘이물질’이었습니다. 즉, 이 세계의 이치에 어긋나는 물건이죠. 그러니 바다도 그것을 토해 냈을 확률이 커요.’
겁도 없이 늑대의 영지 근처에서 암시장을 열었고 계속해서 각종 테르들을 밀렵하는 것엔 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독수리들이 땅을 샅샅이 뒤졌어도 뿌리를 찾지 못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보호석이 발동하면 그들의 눈은 무용지물이니까.
다만 발견된 보호석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이번 영지 습격 때 보호석 하나 없이 쳐들어왔던 것을 감안하면, 대놓고 사용할 정도로 많은 양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갖고 있다면 그 턱수염, 그 남자 홀로 독차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자신은 영지 습격에서 나서지 않았겠지. 어쩌면 본거지를 지키는 게 고작일 수도 있고.
‘보호석은 파괴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나 만들 수 없는 만큼,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그걸 만들 수 있는 자에겐 파괴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져요.’
그게 나자르인들을 몰살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오드가 파괴할 거예요.’
안드로는 그녀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왜 저 소년은 그 보호석을 없애려고 하는 걸까. 보호석이 나쁜 인간들 편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영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자신들에겐 비밀에 부쳐 두고 홀로 보호석을 갖고 있는 편이 소년에겐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몰래 갖고 있다고 해서 들키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사냥을 하실 마음이 드십니까?’
이엘이 안드로를 향해 물었다. 거래인가? 그 거래를 하고도 네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러나 인간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므로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이겠지.
시간이 빠듯했다. 잠깐 저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던 인간들은 며칠 내로 다시 정탐을 위해 돌아올 테고, 철창 안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그 남자에게서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그녀는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부러 이쪽의 인원수를 줄인 것이다.
오드의 성력 덕에 이엘을 태운 노아는 걱정 없이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쉬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삼 일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안개가 자욱한 한 호수였다. 인간의 손을 타지 않고 외진 곳이라 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이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너 혼자 가는 건 안 돼. 위험해.”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니. 놈들이 얼마나 사납고 흉포한지는 내가 더 잘 알아. 네 혼자 힘으론 절대 빠져나올 수 없어.”
“그럼 제가 물에 빠지면 도와주세요.”
“…….”
“그 전까진 절대로, 절대로 간섭하시면 안 됩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놈들은 흉포하니까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이엘이 숲을 벗어났다.
그녀의 말대로 우논들과 노아, 그리고 오드는 숲속에 몸을 숨긴 채 불안하게 호수 쪽을 쳐다보았다. 빛이 하나도 없이 어둑한 호수. 마치 바다처럼 음울하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저주받은 종족이 사는 동네답군. 우논 한 마리의 말에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워낙 제 영역에 예민한 데다가 고립되어 산 지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분명 자신들이 이곳에 숨어들었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아마도 저 멀리 안쪽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겠지. 그런 놈들의 틈에서 도대체 어떻게 잡겠다는 건지. 저만 믿으라는 그녀의 말에도 노아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정신계 영역은 과거가 어두울수록, 마음이 여릴수록, 심지가 바르지 못할수록 강하게 작용한다. 그녀의 심지는 곧고 마음은 강했으나 그의 발목을 잡는 건 그녀의 과거였다. 자칫해 그 과거를 악용한다면……. 아냐.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러기 전에 구해 주면 된다. 물에 빠지기 전에 반드시 구하겠어.
“나타났어요!”
우논의 말에 노아가 재빨리 시선을 틀었다. 이엘은 호숫가 근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자욱한 안개 사이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물결이 파동을 이루며 점점 그녀의 곁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오드. 놈이 맞는지 확인해라.”
“맞습니다. 한 마리가 홀로 왔습니다.”
그의 불안한 시선 안에 이엘이 걸렸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놈과 대화를 시작했다. 환영에 걸려 주절거리는 건지, 그게 아니면 환영에 걸리지 않고 대화를 하는 건지 통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당장 뛰어가 놈의 목을 물어뜯어 뭍으로 끌어 올리고 싶었다.
한참 동안 대화가 이어지더니 일순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거리가 멀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지금 이엘이 그의 환영에 잡혔다는 것이다. 그녀가 무슨 소리를 내뱉자 놈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눈을 사로잡는 연분홍빛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수면 위에 상체만 드러낸 채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는 투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팔을 그녀에게 뻗었다. 이엘은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조금 더 아래로 숙였다.
남자는 한 팔로 이엘의 허리를 휘감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그러쥐었다. 두 사람의 간격이 급격하게 좁아졌다.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호흡이 가까워진다. 입술과 입술이 서로 맞닿기 직전이었다.
다소 외설스러운 장면에 노아가 자리를 박차고 쳐들어가려 했으나 오드가 그의 옷 끝을 잡아 말렸다.
“안 됩니다, 폐하. 아직 이엘이 물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뭐? 넌 저런 걸 보고 가만히 있으란 소리야?”
“위험하진 않습니다.”
“내 눈엔 충분히 위험해.”
예쁘게 생긴 남자의 시선이 잠깐 그들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오드의 결계로 잠시 눈을 가려 놓긴 했으나 워낙 예민한 종족이니 눈치를 챈다면 도망칠지 모른다. 노아는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억눌러 참았다. 초조함에 침이 바싹바싹 마르기까지 했다.
차라리 이엘이 저대로 물에 빠지는 편에 나았다. 그럼 당장에 달려가 그녀를 구하고 저놈을 응징할 수 있을 테니.
남자의 손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녀의 등을 쓸었다. 이엘은 환영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알면서도 걸린다는 이쪽 종족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엘은 자신을 한없이 다정하게 바라보는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그가 보채듯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겼다. 입술이 맞닿을 만큼 좁혀진 간격 속에 마침내 이엘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치듯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컥!”
첨벙―! 거친 물보라가 일어나며 그녀가 완전히 물에 빠졌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노아는 늑대로 변해 빠르게 호숫가로 뛰쳐나갔다. 이따위 계획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너를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제 자신을 탓하며 그는 호수에 뛰어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크헉! 뭐, 뭐 하는 짓……! 억!”
그러나 자욱한 안개가 걷히며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이엘의 것이 아닌 남자의 것이었다. 그녀에게 목이 조인 채 파들파들 떨고 있는 연분홍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둥둥 떠 있는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타 이엘이 그의 목을 두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데서 환영을 쓰다니. 바보 아냐?”
이엘의 조롱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는 완전히 그녀의 손 안에 잡혀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이엘은 뭍에 서서 황당하게 쳐다보는 검은 늑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노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정말 물에 빠지자마자 오셨네요.”
“너 진짜……,”
“환영이 지독해서 찬물을 뒤집어써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거든요.”
농담할 때야, 지금? 그의 고함 소리에 이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편 목이 잡혔던 남자는 재빨리 본모습으로 돌아왔으나 역시나 도망칠 순 없었다. 이엘이 순식간에 목을 두 팔로 꽉 조였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내 환영 속의 남자는 너처럼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 괜히 네가 개입하는 바람에 내가 빠져나올 수 있었어.”
“윽! 모, 목 좀!”
“빨리 밧줄과 천을 주세요!”
그녀의 고함에 노아가 서둘러 밧줄을 던졌다. 이엘은 재빨리 백조의 목을 밧줄로 동동 감아 버렸고 커다란 천으로 얼굴을 덮어 눈을 가렸다. 시야도 차단되고 목까지 졸린 백조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물에서 허우적거렸다.
그사이 이엘은 노아의 도움을 받아 뭍으로 도망쳤다. 백조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나 밧줄은 헐거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조여서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미안해.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어.”
“아, 안 도망쳐!”
“그걸 어떻게 믿어?”
“나, 나를 뭍으로 올리면 되잖아!”
“그럴까, 그럼?”
그녀가 밧줄을 잡아당기자 남자가 또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결계를 깨고 달려왔던 우논들이 이엘과 백조를 번갈아 쳐다보며 혀를 찼다. 우리가 직접 사냥하는 것보다 저게 더 잔인해 보이는 건 왜일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결국 오드의 성력으로 남자를 뭍으로 끌어 올려 도망칠 수 없게 만들고 나서야 밧줄이 풀어졌다. 당연히 끌어 올려진 남자는 나신이었다. 다소 민망한 모습에 노아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어 남자에게 던져 주었다. 남자는 손으로 더듬더듬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게 뭐야?”
“옷이야. 걸치라고.”
“오, 이게 인간의 옷인가? 보고 싶은데.”
“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걸쳐.”
노아가 으르렁거렸으나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신기한 듯 망토를 손으로 연신 만지작거렸다. 늑대들은 다소 황당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목이 졸려 괴로워하더니, 지금은 늑대가 앞에 있는 걸 알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다. 보다 못한 오드가 망토를 들고 대신 그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그러나 오드가 덮어 주든 말든, 남자는 제 얼굴을 가린 천을 만지작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갑갑한데 이 천 좀 벗겨 주면 안 돼?”
“뭘 믿고?”
“뭍으로 나오면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설령 내가 너희에게 환영을 건다고 해도 고작 너희가 날 먹지 못하는 정도밖에 더 되겠어?”
“…….”
“근데 너희가 나에게 뭔가 거래를 하고 싶어서 온 것 같거든, 나는.”
이엘이 노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못마땅했지만 별수 없었다. 최대한 협조를 구하는 수밖에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 쓸모없는 백조 따위를 어떻게 쓰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백조는 저주를 받아 뭍에서 오래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뭍으로 나오면 숨 쉬는 게 고작인, 아주 형편없는 몸뚱어리가 되고 만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얼굴을 씌우고 있는 천을 걷어 벗겨 주었다.
물에 젖어 찰랑거리는 중단발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어떤 색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았다. 이 종족은 외모로도 홀리는 건지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미형의 남자였다.
“좋아. 날 죽이지 않고 이렇게 살려 둔 이유가 뭔지 알겠어.”
“그래, 맞아. 너와 거래를 하고 싶어.”
“흥. 그게 쉬운 줄 아니? 아무리 네 옆에 있는 자가 신의 대리자라 할지라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상당히 높은 수준의 힘이라고.”
“알아. 오드는 그게 가능해. 놀랍게도.”
그녀의 비아냥에 남자가 코웃음 쳤다.
“인간,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그건 결코 만만한 게 아냐. 너와 내가 서로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셈이라고.”
“미안한데, 백조. 나 역시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하고 싶다고? 대체 날 어디에 쓰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내가 그대로 도망이라도 치면 너나 나나 완전히 파멸하는 거야.”
“너 뭍에서 살고 싶잖아.”
“웃기는 소리 하네. 아닌데? 난 영―원히 물에서 살고 싶어.”
“흠, 그래? 그럼 알겠어. 돌아가.”
“뭐?”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가 단칼에 잘라 냈다. 이엘은 미련 없이 등을 돌리더니 모여 있던 제 동료들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되레 당황한 건 우논들이었다.
“진짜 이대로 가자고?”
“말씀드렸잖아요. 이건 쟤가 내키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니…… 그, 그럼 다 수포로 돌아간 거야?!”
“아뇨. 쟤 없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단지 조금 더 쉬운 길을 골랐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가만히 이엘을 보다가 주저앉아 있는 백조를 보았다. 백조는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돌아가자.”
“네? 진짜 가자고요, 폐하? 이대로요?!”
“그래.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빨리 돌아가도록 하지.”
노아가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이엘은 남자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서둘러 그의 등에 올라탔다. 도저히 안 된다면 빠른 포기가 제일 현명한 방법이다. 그사이 오드도 다른 우논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무리가 준비를 마치고 다시 숲 쪽으로 가려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