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말투 곳곳에 레타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가 섞여 있다. 남자는 레타 출신들을 많이 알진 못하지만 턱수염과 함께 일할 때 레타 출신 몇을 만난 적이 있다. 그쪽 빈민가 지방은 워낙 독특한 억양과 소위 은어라고 불리는 단어를 구사하므로 아무나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말투를 사용한다.
근데 저 꼬마 놈은 완벽한 억양이다.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이 보기에도 완벽하게 보일 만한 레타 출신.
‘레타 같은 빈민가 놈들은 믿어도 좋다. 동족은 동족을 절대 배신하지 않거든.’
턱수염이 숱하게 남긴 말들 중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빈민가 출신, 좀도둑 출신 등 별 볼 일 없는 자들에겐 후한 자였다. 제 모습 같아서 그러나 보지? 당시 남자는 그렇게 속으로 비웃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 말이 계속 귓전에 울리고 있다.
이엘은 휘몰아치듯 쏟아부으며 남자의 표정을 샅샅이 뒤졌다.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그곳을 파고들려고. 단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말했죠. 권력도 맛본 사람이 아는 거라고.”
“…….”
“난 레타 출신이에요. 권력? 관심 쥐뿔도 없어요. 황녀의 반지? 황자의 반지? 그딴 게 있으면 뭐가 좋은데요.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황위에 올라 봤자 뭐가 달라집니까? 황실이 있든, 지금처럼 이종족이 집권을 하든 나 같은 놈들에겐 어차피 똑같은 지옥일 뿐입니다.”
“…….”
“아. 그리고 고작 반지 따위로 황위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종족을 어떻게 다 누르려고? 이제 보호석은 없는데 무슨 수로.”
소년의 말이 쏟아졌으나 남자는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그 말 중 고르고 골라, 필요한 것을 선택하려는 것처럼 그저 기다렸다.
“황실이 있어 봤자 구걸하며 살아가는 건 여전합니다. 아무리 제가 그 많은 보석을 불탄 황실에서 훔쳐 왔어도 이렇게 늑대에게 빌어먹고 사는 것처럼요.”
“…….”
“그러니 이 반지를 팔아서 제가 원하는 걸 얻으면, 그게 지금의 제겐 최선의 선택 아니겠습니까?”
묘하게 설득력 있는 소년의 말이 귓속에 요동쳤다. 진솔하다고 느껴질 만큼 소년은 흐트러짐이 없다. 남자는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지난날, 그 수준 떨어지는 놈들과 한데 어울려 살았던 시간이 눈앞에 하나하나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어 빌붙었으나 자신은 그들과 근본이 다른 사람이었다. 겨우 노름이나 하던 멍청이들과 귀족의 피가 흐르는 이 내가, 어찌 같단 말인가.
“좋아. 네게 그 독수리의 눈알을 주겠다.”
“그런데 제가 말한 그 새끼 독수리의 눈알을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이미 팔아 버렸거나 이식을 했다면……,”
“아니. 아직 이식하진 못하니 아직도 냉장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이식이 아직 안 됩니까?”
“연구원이 전부 다 죽어 버렸는데 누가 그걸 이식해? 의사들도 전부 다 죽거나 숨어 버려서 찾기 힘들어.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이식할 순 없으니 우리 쪽에서 계속 실험을 하고 있다.”
“…….”
“새끼 독수리의 눈알은 조금 더 비싸니, 아마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건 성체의 것일 테지. 네가 찾는 건 아마 보관소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이엘을 남자가 수상하게 쳐다봤다. 이엘은 아무렇지 않게 빙긋 웃으며 그의 손을 악수하듯 잡아챘다.
“그럼 며칠 뒤에 뵙겠습니다.”
남자는 떨떠름하지만 별수 없이 소년의 손을 맞잡았다.
*
“더 필요한 건 없나?”
“충분해요.”
이엘이 드물게 그를 향해 웃었다. 얼굴엔 흙이 잔뜩 묻어 엉망이었지만, 어째 최근에 봤던 모습 중 가장 환해 보인다. 노아가 혀를 차며 손등으로 흙을 닦아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영지의 복구는 잘 되고 있습니까?”
“그럭저럭. 하이에나들 덕분에 재료가 쓸데없이 많이 남아서.”
무너진 성벽과 훼손된 토양을 메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보수 작업을 하느라 노아와 다른 우논들도 계속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지 복구는 완벽하면 좋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엔 최대한 빨리 구축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곳만을 집중해 복구했는데, 뜻밖에 찾아온 하이에나의 화친 선물 덕에 모자람 없이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하이에나의 왕자께서 제게 무언가를 보내셨습니까?”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노아가 생각을 접고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누가 가벼운 입을 열었나? 분명 늑대들에게 입단속을 했었는데. 노아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이엘이 모종삽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네 앞으로 편지를 보냈어.”
“편지요?”
“그리고 보석도.”
“보석이라뇨?”
그 뜬금없는 선물에 의아한 이엘의 머릿속에, 일순 스쳐 지나가듯 피시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자. 내 궁엔 진귀한 보석이 많아. 우리의 왕좌는 비어 있어. 네게 줄게. 나와 같이 가자.’
정말 순수하게 제 관심을 바라던 그 셋째 왕자가 떠올라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환심을 사기 위해 정말로 보석을 보낼 줄이야. 어이가 없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연 건지. 거듭 생각할수록 마음이 쓰이는 존재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아가 미간을 좁히더니 허리를 숙여 모종삽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조금 전까지 이엘이 심고 있던 꽃을 대신 심으며 중얼거린다.
“네 몫을 훔친 게 아냐. 창고에 잘 보관하고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가도록 해라. 다만 이젠 그런 보석이 별 필요가 없을 테니 내가 잘 맡아 두려 한 것이다.”
“…….”
“물론 부족하다면 내가 더 채워 줄 수도 있고.”
그는 저도 모르게 깊게 한숨을 쉬었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좀스러워지는지 통 모르겠다. 서툴게 꽃을 심는 노아의 너른 등을 바라보다가 이엘이 작게 웃으며 그 옆에 똑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엉성하게 심어진 꽃을 세워, 다시 바르게 흙을 덮어 주었다.
“그럼 맡아 주세요, 폐하께서.”
“…….”
“나중에 피시 왕자님께 돌려드릴 테니.”
“그 녀석을 만나려고?”
“뭐, 말이 그렇단 거죠. 만나러 오실 수도 있으니.”
“…….”
“편지는 받아도 괜찮죠?”
“그래. 성에 들러 가져다주지.”
“감사합니다, 폐하.”
그는 물끄러미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본능으로 땅 파는 건 잘해도 꽃을 심는 건 정말 못하겠다. 그가 대충 흙을 파서 꽃을 집어넣으면 이엘이 대신 흙을 덮어 잘 가꾸었다. 의외의 호흡에 그녀가 먼저 웃었고 노아가 따라 웃었다.
“왕성으로 그만 들어와.”
“네?”
“네가 없으니 너무 허전해.”
“…….”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그 저택을 선물하시고도 싫어하신 이유를 알겠군.”
그의 나른한 말투에 이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부디 밤마다 후원까지 나가는 수고로움을, 이제 그만 덜어 주었으면 하는데.”
여전히 노아는 달이 뜬 밤이면 그녀의 저택으로 들어와 화로를 지펴 주고 새벽에 떠났다. 언젠가부터 이엘은 제 방이 아닌 1층 가장 큰 홀의 소파에서 잠들곤 했고, 노아는 늘 그 아래 카펫 위에 머물다가 떠나곤 했다.
그의 말대로 수고로운 생활이었으나 그들에겐 그 시간이 가장 큰 평화였다.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평화.
“원한다면 밀로도 그만 풀어 줄게.”
“…….”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테니, 너도 어렵지 않은 내 부탁을 부디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노아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수려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애원하듯 웃으니, 그 미소에 약한 이엘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그녀의 지시대로 늑대가 몇 무리로 나눠졌다. 대다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영지를 지키는 쪽이었고 일부는 이 근방을 배회하던 인간들을 추적하는 쪽이었으며 아주 극소수는 이엘과 함께 영지를 벗어나는 쪽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을 틈타 적은 수의 우논과 이엘, 그리고 오드가 성을 넘어 영지를 떠났다.
‘폐하와 우논 두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테르분들이 제가 말씀드린 장소로 나흘 뒤에 출발하시면 됩니다. 출정 전에 영지를 시끄럽게 해 주시면 더 좋고요.’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그 종족은 땅에서 오래 살 수 없어.’
‘가능해요. 제가 가능하게 할 수 있어요.’
‘…….’
‘피 흘리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모든 늑대들에게 혼란을 가져왔다. 이종족의 생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왕이 그녀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늑대들도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슬슬 인질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올 때가 된 것이다. 잡혀 온 인질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지지 않을수록 조급하고 초조한 건 인간들 쪽일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차라리 인질들이 아무것도 누설하지 않고 죽어 주는 편이 좋을 테니까.
보복할 때마다 공포하는 이종족이니, 늑대의 영지가 조용하다면 인질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분명 확인차 주변을 서성이는 것일 테지. 그녀의 지시대로 일부 테르들이 그 인간 무리의 뒤를 밟아 어제저녁 영지를 떠났다.
지금쯤이면 보안 시스템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녀는 르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의 눈으로 찾아내는 것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보인다는…….
그렇다면 답은 하나야.
‘보호석이 남아 있을 확률이 커요.’
떠나기 직전 이엘의 그 말에 노아와 안드로가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본거지를 찾지 못하는 거예요.’
‘그럴 리 없어. 보호석은 모조리 압수했고 처리했다. 전부 바다로 던져 버렸다고.’
‘어떻게 전부 다 처리했다고 믿는 거죠?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호석은 인식표처럼 각각 특수 코드를 새겨 두지. 그것 또한 재산의 일부이므로 인간들은 제 것이 섞이지 않게 철저하게 마감 처리를 해 뒀어. 그리고 우린 그 보호석을 인식계로 일일이 찾아내 처리했다.’
‘그렇다면 그 보호석을 인식하는 기계도 처리했나요?’
‘맞아. 전쟁이 끝나고 전부 박살 냈어.’
노아의 말에 이엘이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보호석을 찾아내는 기계마저 없다는 소리구나. 낯이 좋지 않은 이엘을 보며 안드로가 다소 차갑게 물었다.
‘왜 보호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우리가 아무리 너희 인간보다 멍청하다곤 해도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처리했다. 종족의 왕들이 모인 곳에서 함께 내던졌으니 그것만큼은 확실해.’
‘바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죠, 우리에게.’
‘…….’
‘저도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오드에게 전해 들었어요.’
‘뭘?’
‘바다는 또 하나의 세계입니다. 우리와는 엄연히 분리되어 있는 다른 세계요. 그 안에 뭐가 살고 어떤 세상인지 전혀 알 수가 없죠.’
‘…….’
‘바다는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삼켰던 것도 토해 낼 수 있습니다.’
토해 낸다고? 노아와 안드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보호석을…….
‘아마도 토해 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