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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03화 (103/488)

103화

그들이 뱀과 연합하여 늑대들의 영지에 들어왔던 이유는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황자의 반지. 유명무실한 그 반지 하나 때문에 뱀과 손을 잡았다고. 그 반지만 있으면 황권을 휘어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지. 이엘이 여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웃었다.

“그걸 당신의 보스에게 가져가실 겁니까?”

“…….”

“왜, 당신의 보스가 황위를 차지하는 거죠?”

“…….”

“그저 반지만 있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는 건데.”

결속은 무리를 만들고, 무리는 체계와 사상을 만들어 세력을 키운다. 하지만 탐욕 앞에 인간의 결속은 그저 하찮은 허울에 불과하노니.

“반지와 탈출을 약속할 테니, 필요한 것 좀 갖다주시겠어요?”

반지는 턱수염에게 주든지, 아저씨가 갖든지. 알아서 하시구요. 덧붙여진 이엘의 목소리에 남자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가 곧 사라졌다.

*

“저렇게 놔둬도 괜찮을까요?”

“…….”

“아무 소득도 없다는데 매일같이 감옥으로 보내는 건 좀 그렇습니다. 그러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요.”

“…….”

“폐하,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쟤는 단지 그때 일에 아직까지 책임을 느끼고……!”

“쓸데없는 말 말고 사냥 준비나 잘해.”

“노아 님!”

답답한 듯 명치 부근을 두드리며 앤디가 소리를 질렀다. 노아는 무심한 낯으로 앤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괜히 탁상 위에 올려놓은 꽃을 톡톡 건드리며 괴롭히고 있었다. 꽃은 짜증을 부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완전히 고개를 우그러뜨려 몸을 숨겨 버렸다.

“시클라멘이군요.”

잔에 물을 따라 주며 안드로가 말을 붙였다. 꽃의 종류는 잘 알지 못하니 그런가 보다 싶었다. 대충 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자, 아직도 나가지 않고 서 있던 앤디가 성큼성큼 다가와 탁상을 짚으며 소리쳤다.

“저는 오헬이 더 이상 인간이나 뱀 따위와 엮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

“또한 제 가문으로 입적시키고 싶습니다. 제 동생으로요.”

노아가 마시던 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누굴 입적해?”

“독수리의 영지에 다녀오고 나서 폐하께선 녀석을 가두셨죠. 무슨 이유인지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고요.”

“…….”

“그 뒤로 폐하께서 녀석을 대하는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누그러지셨으나 오헬은 아닙니다.”

“…….”

“몹시 불안해 보여요.”

앤디가 탁상을 지지하던 손을 움켜쥐며 짧게 탄식했다.

“주드가 죽었을 때보다 더요. 더, 불안해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전 녀석이 저런 일에 더는 신경 쓰지 않길 바랍니다. 아무리 머리가 똑똑한 인간이라 할지라도요. 앤디는 진심 어린 간청을 제 왕께 드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한 건, 이틀 전 이엘이 노아와 일부 귀족 우논들을 불러들였던 일 때문이리라.

‘사냥을 나가야겠습니다.’

‘뭐?’

‘사냥을 준비해 주십시오.’

‘무슨 사냥?’

노아의 무뚝뚝한 물음에 이엘은 가만히 그와 여타 우논들을 쳐다보았다. 되도록 혼자 처리하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 늑대의 손이 필요한 건 부정할 수 없다. 내 몸이 여러 개가 아니니.

‘그냥 준비해 주십시오.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가 며칠 동안 감옥을 드나든 것을 알고 있다. 별 소득도 없는데 왜 자꾸 드나드는 거지?’

한 우논의 말에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오헬을 의심하는 거냐며 다른 우논들이 말렸지만, 문제를 제기한 우논은 그들을 떨쳐 내고 다시 한 번 이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왜 자꾸 혼자 그 안에 들어가는 건지. 너는 왜 함구하는 것이냐.’

‘…….’

‘놈들과 손을 잡은 건 아니고?’

‘야! 폐하 앞에서 무슨……!’

배신에 예민한 종족이었다. 같은 상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 우논은 그녀를 믿지 못해 질문을 던진 게 아니라 어떻게든 확신을 얻고 싶었을 뿐이다. 제발 너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길 바란다는, 바보 같은 확신을.

‘저는 인간입니다.’

‘…….’

‘그러면서 늑대에 속하죠.’

‘…….’

‘그러니 저는 모두의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논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무슨 말이 저러냐며 화를 내는 우논도 있었고 알기 쉽게 풀어 달라며 애원하는 우논도 있었다. 저렇게 뭉뚱그린 대답은 듣는 사람에게 불안만 안겨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엘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왕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아는…….

“폐하. 아무튼 저는 반대입니다. 저는 그렇게 위험한 계획에 오헬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주드보다 더 과잉보호하는 듯한 앤디의 행동에 진저리가 난 듯, 안드로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노아는 꽃봉오리를 톡톡 건드리던 손을 거두고 펜을 다시 쥐었다. 그러곤 서류 뭉치를 꺼내며 또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공작. 그대는 가서 사냥 준비를 하라.”

“폐하!”

“홀로 사냥하는 게 대체 어떤 종족의 습성이지?”

“…….”

“무리를 만들어 둬. 같이 사냥할 수 있도록.”

“폐하.”

“오헬을 위한다면, 녀석을 위한 무리를 만들어 함께 사냥하도록 해라.”

“…….”

“녀석이 사냥을 원한다잖아.”

그럼 해 줘야지. 노아의 그 말에 앤디가 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저 꼬마 놈이 와서 간을 보는 게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갇혀만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제대로 모르겠고, 늑대 놈들이 주는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아 언제나 배가 주렸다. 좁아터진 철창 안에 열 몇 명이나 되는 성인 남자들이 한데 욱여넣어져 있으니 숨통이 꽉 막힐 수밖에. 남자는 어느새 그 꼬마가 몰래 들어와 자신을 빼 주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꼬마 놈이 자신을 찾아왔다. 첫날과는 달리 두 번째부터는 몹시 초조한 낯으로 찾아왔다가 금세 돌아가곤 했다. 늑대들의 감시가 심해졌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실제로 몇 번은 보초를 서던 테르들과 마주칠까 눈인사만 하고 돌아간 적도 있었으니까.

그때의 그 참담한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찰나의 자유를 맛본 자만이 아는 감정이었다.

철창을 빠져나가는 자신의 등에 다른 놈들의 시선이 박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기 잡혀 온 놈들은 자신을 제외하고 전부 쓸데없는 놈들이었다. 습격을 위해 급조하여 연합한 하찮은 도적놈들뿐. 그러니 신뢰라는 관계 따위가 있을 리가.

엊저녁에 늑대들에게 자신과 그 꼬마 놈의 만남을 밀고하려던 푸른 머리 놈의 머리통을 박살을 낸 후로 철창 안이 고요해졌다. 흥, 이제야 서열 정리가 확실히 됐겠지? 코웃음 쳤다.

“오늘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아무리 네가 그래 봤자……,”

“며칠 뒤에 늑대들이 사냥을 나갈 겁니다.”

“…….”

“그때를 틈타 탈출시켜 드리죠.”

소년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초조한 듯 다급하게 몰아쳤다.

“기회는 그때뿐입니다. 정말 제 도움을 받지 않으실 겁니까?”

“…….”

“제가 쓸데없는 곳에 힘을 뺐군요. 권력도 잡아 본 놈만 그 맛을 아는 건데.”

소년의 중얼거림에 남자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손목에 채워진 이 망할 쇠고랑만 없었다면 저 쪼그만 새끼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그동안 그 턱수염 난 놈의 뒤를 봐주느라 얼마나 곤욕을 당했는데. 천하의 내가!

남자는 어느 백작의 사생아였다. 당연히 성 따위 받지 못했고 취급 또한 벌레만도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흐르는 귀족의 피는 평민 놈들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는 자긍심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사생아는 인정받지 못하면 성년이 지나기 전에 죽는 게 다반사였기에, 그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렇게 끝끝내 백작의 아들이 병으로 죽어 버렸고, 대가 끊어지지 않기 위해 백작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을 가문의 계보에 올리려 했다. 이제 모든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에 전쟁이 터졌다. 십 몇 년을 백작가의 하인처럼 숨죽여 살았는데! 이제 겨우 발 뻗고 사나 싶었는데! 빌어먹을 전쟁으로 가문의 몰락은 물론, 인간은 모두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제 와, 귀족의 고귀한 혈통 따위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전쟁이 끝난 후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턱수염 난 남자의 발닦개 역할뿐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남의 아래에서 빌빌 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턱수염이 저를 멸시할 때마다 분노했다. 저 망할 천한 놈과 내가 어찌 감히 비교가 되랴. 감히 저런 천한 놈이! 그러나 전쟁이 끝나 버린 지금, 그의 유일한 자랑이었던 귀족의 피는 하등 쓸모가 없어졌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성마르게 굴긴.”

남자가 입을 비죽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으드득 소리를 내며 몸을 풀던 남자는 며칠 만에 비로소 이엘과 눈을 마주쳤다.

역시. 그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아주 잠깐 그녀의 말에 동요했던 남자의 눈동자가 여전히 눈앞에 선하다. 이엘이 속으로 웃으며 남자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 냈다.

“그에 앞서, 네놈의 의도가 궁금하구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원하는 걸 구해 달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 됐든 황자의 반지보다는 못하지 않나? 그 귀한 것을 바꾸면서까지 얻고 싶은 게 뭔데? 어디 들어나 보자.”

“독수리의 눈알을 구해 주십시오.”

“뭐?”

“제가 찾고 있는 건 어떤 새끼의 눈알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도대체 독수리의 눈알을 찾는 이유가 뭘까, 그는 그렇게 의심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어 말했다.

“당신은 그 턱수염 난 아저씨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죠.”

“흥, 아무렇게나 냅다 던지면 내가 덥석 물 줄 알고?”

“이봐요, 아저씨. 그렇게 자꾸 간 보면 좋아요?”

“뭐? 이 쪼그만 놈이 무슨……!”

“솔직해지자구요. 시간도 별로 없는데.”

소년이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마치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속이 뒤틀린다. 저 마뜩잖은 표정은 제 친부와 백작 부인으로부터 10여 년간 받아 온 멸시와 경멸의 비슷한 종류였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참으며 두 눈을 부라렸다.

“네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내가 설설 길 것 같아? 나는 저 안에 있는 머저리들이랑 다르……!”

“아저씨. 아저씨도, 저도 어차피 늑대들 앞에선 아무 소용 없어요.”

“…….”

“그래서 상부상조하자는데 왜 그렇게 체면을 내세우세요? 그런 건 이제 이런 세상에서 아무 소용 없다고요.”

그걸 아직도 모르세요? 소년이 검지로 톡톡 벽을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다 말할게요. 저는 지금 여러 가지 실험을 위해 재료들을 찾고 있습니다. 아저씨가 턱수염 일당이니 제가 턱수염과 왜 만났는지도 기억하겠죠.”

“그래. 네가 늑대의 기름을 가져간다고 했다지? 그러면서 새끼 우논 한 마리도 데려갔고.”

“맞아요. 원래대로라면 그 우논을 이용해서 기름을 얻으려고 했죠. 근데 그것도 아저씨들 때문에 죄다 망쳐 버렸어요.”

“…….”

“조금만 더 있었으면 저 늑대들과 완벽한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는데. 빌어먹게도 당신들과 뱀이 연합해서 쳐들어오는 바람에 다 망쳤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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