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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02화 (102/488)

102화

“오긴 했으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군. 퉁명스러운 노아의 목소리에 이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하이에나를 불러들이는 모양이에요.”

“그런 농담이나 할 때가 아니라……,”

“폐하께선 화친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노아가 대번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채근하려다 끝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는 꾹꾹 억눌러 참으며 먼지를 뒤집어쓴 이엘의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어 줄 뿐이었다.

이엘은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하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애써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줍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눈치를 보던 늑대들도 힘을 합쳐 이불을 주워 들었다.

이 정도면 화친을 깨고 하이에나의 영지로 쳐들어가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감히 허락받지 않은 영지에 제멋대로 들어와 그의 백성을 공격한 죄. 그 죄를 물어 엄히 처벌해야 응당 맞는 처사였다.

“폐하. 좀 도와주세요. 빨래를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노아는 겨우 손에 얻은 평화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를 따르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인간 하나 때문에 전쟁이란 단어가 두려워졌다고 하면, 모두가 비웃을 것을 알면서도.

이불을 잔뜩 들고 저택에 옮긴 뒤, 노아와 이엘은 다시 빨래를 시작했다. 저 멀리서 눈치를 보며 숨죽여 다니는 피터가 안쓰러워 이엘은 그를 오드가 있는 성전으로 잠시 피난시켰다. 그사이 노아는 안드로를 불러들여 대충 하이에나에 대한 처사를 지시했다. 지금 그들을 마주했다간 분노를 터뜨리고 말 테니, 안드로가 대신 일을 맡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엘은 그 모습에 안도했다. 다행이다. 어렵사리 이루어진 하이에나와의 관계가 자신 때문에 틀어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

이엘은 창문을 닫는 노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슬쩍 다가가 그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곤 갖고 온 것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지?”

“화관이요.”

밀로에게 칭찬을 받으니 낯짝이 두꺼워졌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팔불출이라 객관성이 매우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엘은 화관을 두 손에 올려 노아를 향해 거듭 내밀었다.

“싫으세요?”

“아니. 누가 싫다고 했나.”

“그럼 왜 표정이 그러세요? 전혀 화관 같지 않아서 그러십니까?”

태어나 처음 받아 보는 꽃이, 이런 화관일 줄이야. 당당한 이엘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그 손에 올려놓은 화관을 또 한 번.

“싫으면 오드에게……,”

“아니. 내 거라며.”

그가 잽싸게 화관을 낚아채 갔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노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엘이 속으로 웃다가 그 화관을 가져가 그의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키가 큰 노아의 머리 위에 올려놓느라 그녀가 까치발을 들자, 그게 못내 귀여워 노아가 몰래 웃었다.

꽃이 잘 어울리는 밀로와는 상이했지만, 어설프게 노아의 머리 위에 안착한 화관이 제법 귀여웠다. 그 화관을 쓴 남자마저 덩달아 귀여워 보였다는 게 흠이었지만.

“그렇게 쓰는 건데요, 화관은.”

“꽃을 달라고 했더니 화관을 주는 너는 정말…….”

“꽃도 가져왔어요. 아주 예쁜 꽃입니다.”

붉은 꽃봉오리가 오들오들 떨며 노아의 앞에 나타났다. 날씨가 추워 덜덜 떠는 모양이었다.

― 따뜻한 곳에 옮겨 줘! 여긴 추워도 너무 춥잖아!

꽃이 투덜거리자 이엘이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에 꽃은 몇 번 투덜거리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이엘은 미소를 띤 채 화분을 노아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전에 받았던 장미에 대한 답례입니다.”

“…….”

“폐하께서 주신 정원에 대한 제 보답이자 답례예요. 약소하지만요.”

그 대목에서 꽃이 또 한 번 투덜거렸다. 내가 어디가 약소하단 거야?! 내 꽃잎이 얼마나 예쁜 줄 네가 알아? 제대로 핀 걸 네가 못 봐서 그래. 보면 너 놀랄걸? 이엘이 웃음을 꾹 참으며 다시 한 번 노아에게 화분을 내밀었다. 싫으세요? 또다시 그의 의중을 떠보는 그 한마디에 노아는 화분을 덥석 받아 버렸다.

그러나 그는 화분을 창틀 위에 올려 두고는 이엘의 허리를 한 팔로 낚아채 바짝 끌어당겼다.

“네 약소한 답례를 받을 수만 있다면 영지 전역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유일하게 허락된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

결국 하이에나에겐 축객령이 떨어졌다. 아무리 화친을 맺으러 온 관계라 할지라도 타 종족의 영지를 허가 없이 나돌아 다닌 것은 정도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게다가 왕성의 후원 깊은 곳은, 누가 생각해도 가장 은밀한 곳이 아니겠는가. 안드로는 이 정도 처사에 감사하라는 말만 남기며 하이에나를 쫓아냈다.

속셈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나가라는 말에 히죽 웃으며 그러겠노라 답한 후작의 낯짝에 분노했지만 노아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생각하며 눌러 참았다. 최대한 그들의 도발에 걸리지 않는 게 되찾은 평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발판이었으니까.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아의 뒤를 따라 지하 계단을 내려오던 이엘이 중얼거렸다. 횃불을 들고 그녀의 발 아래를 비춰 주던 노아가 고개만 뒤로 돌려 그녀를 보았다.

“마치 내가 믿어 준 적이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앞에 조심. 노아는 씁쓸한 표정을 금세 지우고 그녀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 뜻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제가 어떻게 할지, 듣지도 않고 허락해 주셨잖아요. 그게 감사하단 뜻이었습니다.”

안다. 아는데, 그게 참 서운하네. 이런 쓸데없는 감정이 드는 건, 조금 전에 들었던 안드로의 쓴소리 때문인 걸까.

‘폐하.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안드로가 드물게 걱정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엘을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가겠다는 그의 말에 안드로는 침묵 끝에 간언을 올린 것이다.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허용하시면 안 됩니다.’

‘…….’

‘지금도 오헬은,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딱히 정원을 이엘에게 준 것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정원은 노아의 사유지였고 제 왕이 누구에게 무엇을 하사하든, 그건 신하인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인간은 늘 배신을 준비하는 종족임을, 폐하께서 잘 아시고 계실 테니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안드로의 말에 문득 루시우스가 떠올랐다.

오래되고 가장 절친했던 그의 친구. 황제가 내린 명령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는 노아가 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비울 때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명령을 받고 독수리의 영지로 향해 르네의 동생을…….

노아는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생각하는 게 좋겠군.

인간이 배신을 준비하는 종족이라면, 늑대는 배신을 당해도 기꺼이 따를 종족이었겠지. 그게 제 처지였고 종족 본연의 습성이었다.

“안드로 님께서 제가 이 일에 나서는 것에 반대하셨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

“내가 허락했는데 다른 놈이 무슨 상관이야.”

일순 노아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내가 간이라도 다 빼 줄 것처럼 구는 건 아닌가 하고. 안드로가 우려할 만도 하다고.

“걱정 마세요, 폐하.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적어도 제가 늑대에게 속한 지금만큼은, 절대 폐를 끼치진 않을 테니까요.”

마치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늑대와 척을 질 것처럼.

그러나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저 발밑을 비춰 줄 뿐이다. 넘어지지 않게, 다치지 않게.

배신이란 단어가 몸서리치게 싫은 건 사실이었다. 그녀의 비밀을 알아챘을 때 처음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이 위태로운 관계가 무너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에겐 이것조차 공들여 쌓은 탑이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계단 조심해.”

그러나 그것까지 감수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자신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 노아 자신의 의지였다. 대놓고 마음을 드러낸 자신과 계속해서 미묘하게 어긋나는 그녀의 마음을 외면하는 건, 제 스스로를 위한 위로였다.

“위험하면 바로 나오도록. 나를 불러도 되고. 밖에서 기다릴 테니.”

“감사합니다, 폐하.”

“오헬.”

“네?”

“아니…… 아니다. 다녀와.”

이엘은 물끄러미 노아의 눈을 응시하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개 모든 지하 감옥들이 그러하듯, 음습하고 기분 나쁜 곳이었다. 테르의 안내를 받아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감시조차 없이 일대일로 만나는 것까지 허락해 줄 거라고,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잡혀 온 인질들의 얼굴이나 보는 정도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늑대의 왕은 거두절미하고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말해 주었다. 반대하며 미간을 좁힌 안드로까지 설득하여 결국 이엘이 홀로 들어설 수 있게 지원해 주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믿어 주기로 마음을 굳혔나 보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나와라.”

“네.”

보초를 서던 테르들마저 전부 복도를 빠져나갔다. 군데군데 있는 횃불로는 간신히 형체 정도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엘은 철창에 갇혀 있는 인간 남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만약 노아의 말대로 전부 말단에 급조로 참여한 도적들이라면 헛수고겠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아니야. 처음 보는 얼굴이다. 이 사람도 아니야. 저 사람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일일이 머리를 세며 하나하나 얼굴을 또렷하게 확인했다. 그러나 고문까지 한 탓에 얼굴이 퉁퉁 부어 이목구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그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이봐, 꼬마.”

이엘의 눈동자가 세 번째 철창으로 향했을 때였다. 철창 너머 어둑한 곳에 있던 남자가 쓰고 있던 로브를 벗으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었다.

“너. 나 알지?”

아, 찾았다…….

“알죠.”

“역시 너……,”

“잠깐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실까요.”

이엘은 노아에게 받았던 열쇠 중 하나를 입구에 집어넣고 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안에 있던 남자들이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달려들었다. 열린 문 밖으로 도망갈 것처럼 굴었지만 목에 걸린 쇠사슬 때문에 모두 미수에 그쳤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뗀 이엘이 웃고 있는 남자의 앞에 도착해 그의 목을 묶은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아저씨. 아시죠? 지금 상태론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지.”

남자는 자유로워진 목을 좌우로 움직이다가, 제 손목엔 여전한 쇠사슬을 짤랑거리며 비죽 웃었다. 이엘은 남자만을 데리고 빠져나와 다시 철창을 잠갔다. 남자는 곁눈질로 그녀와 철창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알긴 하지만 기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게 웬 굴러 들어온 떡인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엘은 그를 데리고 복도를 조금 더 지나쳤다. 더 깊고 어둑한 곳으로 향할수록 남자는 치솟는 광대를 숨기지 못했다. 멍청한 놈. 어린놈이라 아직도 사위 분간이 안 되나 보군. 아무리 제 손에 이따위 쇠사슬이 걸렸어도 새파랗게 어린놈 하나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닌데.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돌아온 길을 눈에 새기고 있었다.

그래. 내겐 다리가 있지. 손은 묶였어도 발은 멀쩡했다. 이 발로 냅다 차 버리면 저 계단 아래로 계속 굴러떨어질 테지. 그 틈에 놈의 주머니에서 훔쳐 낸 이 열쇠를 들고 곧장 위로 튀면 된다. 남자는 어느새 제 손에 들어온 열쇠 꾸러미를 로브 안에 숨기며 히죽 웃었다. 좀도둑질을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으억……!”

순식간이었다. 남자가 억! 소리를 내며 깊고 깊은 지하 계단 아래로 하염없이 굴러떨어진 것은.

“밀어뜨리기 직전에 훔쳐야 내가 눈치를 못 채죠.”

“너……! 크흑…… 이, 이 자식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날 듯이 뛰어 내려온 이엘이 남자의 로브를 뒤적여 열쇠를 도로 빼앗았다. 손이 묶여 방어 자세를 취할 틈도 없이 떨어진 남자는 다리가 부러진 건지 바닥에 고꾸라진 채 일어나질 못했다.

이엘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곤 작은 미소와 함께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가 탈출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황자의 반지를 찾고 있다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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