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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01화 (101/488)
  • 101화

    비싼 척한다고 조롱할진 모르겠으나, 아무튼 사정 많은 이름을 구태여 말하고 싶진 않았다. ‘오헬’이라는 가명조차 이제는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불리기 시작했다면 그 가명도 본명이 된 것과 다름없으니까.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긴 악몽에서 나와, 주드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엘은 다짐했다. 순응하지 않겠노라고. 자신의 의지는 담겨 있지 않은 그 계획에, 가담하지 않겠노라고. 그러니 더는 무력하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후작은 노련한 눈빛으로 소년을 쳐다보다 헛웃음을 토했다. 설마 지금 나더러 네게 덤비라는 건가? 그깟 이름 따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었다. 패티스가 명령한 건 겨우 이름 따위를 알아 오란 뜻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인간 소년 놈이 말하는 꼴을 보니 은근히 성질이 나서.

    “네 모가지를 따서 우리의 왕자님께 드려야겠군.”

    “그럼 저 또한 당신의 목을 따서 늑대의 왕께 드려야겠군요.”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꼬락서니가 그의 화를 더 끓게 만들었다. 언제나 인간은 오만하고 거만했다. 후작은 참지 못하고 커다란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돌아와 눈을 부라렸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조금 전의 테르와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이미 눈빛만으로 이종족 특유의 위압감을 풍기자 본능적으로 이엘은 그 압도감에 질렸다.

    그러나 맹수들과 만나 상대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말 많고 탈 많은, 적지 않은 시간을 여러 이종족 틈에서 살아남았다. 가볍게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목을 더 빳빳하게 세우며 손에 쥔 막대기에 힘을 더했다.

    후작이 먼저 시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빈틈을 살피자 이엘도 마주 돌며 그와의 간격을 유지했다. 저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면 아까 피터처럼 순식간에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우논의 위용은 대단했다. 마주 선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소년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고 눈조차 피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기가 질릴 법도 한데 소년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후작은 틈을 찾는 것을 버리고 순식간에 소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소년은 옆에 널려 있던 커다란 이불을 먼저 낚아챘다.

    “어림없지!”

    그가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로 이불을 단번에 찢어 버렸고 동시에 주변의 모든 것을 하늘 위로 띄웠다. 이제 더는 이불 따위로 공격할 순 없겠지. 갈가리 찢어진 이불 조각들이 넝마가 되어 하늘 위를 어지럽혔다.

    후작은 이제 하늘 위에 띄워졌을 소년을 바닥으로 처박기 위해 쓰고 있던 능력을 빠르게 거둬들였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하늘에 띄워졌던 것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쿵―! 낙하하는 물체들이, 땅에 부딪히면 바스러질 정도의 속력으로 떨어졌다.

    후작은 지체하지 않고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소년이 떨어졌을 바닥을 향해 달려갔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앞발이 보란 듯이 앞으로 구부러지며 무게 중심을 잃고 앞으로 한 바퀴를 굴러 나동그라진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후작 각하.”

    생채기 하나 없이 먼지만 뒤집어쓴 이엘이 막대기로 후작의 목을 누른 채 위협했다. 앞발을 노려 자세를 무너뜨리고 공격을 무력화시켰던 건가. 조금 전 테르와 상대하는 모습만 보고 지나치게 선제공격에만 집중했던 게 패인이다. 여러 물체에 능력을 사용하면 하나를 상대하는 것보다 위력과 집중력이 낮아진다는 것을 스스로 놓친 것 역시 패인이다.

    무엇보다 저 쪼그만 덩치가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겨우 막대기 따위로 앞발을 무너뜨리는 동안 알아채지 못한, 둔한 제 몸뚱어리가 커다란 패인일지도.

    현명한 인간 소년은 부러 제 성질을 돋워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 고요하고 가벼운 몸을 활용해 묵직한 자신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후작은 낄낄 웃으며 날렵하게 그녀의 막대기를 입에 물어 내던져 버렸다. 그러곤 소년을 밀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능력을 사용하려 했다.

    “그만.”

    “크헉……! 큭!”

    거대한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이 단번에 하이에나의 머리통을 밟고 섰다. 그는 하이에나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분노에 휩싸인 낯이었다. 짓밟듯 꾹꾹 힘을 더할 때마다 하이에나의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쳐 피가 흘러나왔다. 으아아악! 참지 못한 후작이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자 이엘이 놀라 적갈색 독수리의 다리를 붙잡았다.

    “르네 님!”

    다급한 그녀의 음성에 르네가 힘을 풀었다. 여기서 함부로 움직이면 혹 이엘이 다칠까, 르네는 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중심이 흔들리는 그녀를 제 품에 안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된 이엘을 제 뒤로 떠밀고 그는 쓰러진 하이에나의 목을 구둣발로 밟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것…… 참…… 신기하군요……. 독수리인 당신마저…… 크흑!”

    후작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르네는 조이고 있던 그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된통 당한 후작이 덜덜 떨며 제 목을 붙잡았다. 역시 직계의 힘은 무시할 수 없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흙을 털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통수가 깨진 모양인지 흘러내리는 피가 점점 옷을 적신다.

    “독수리의 왕을 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네 경거망동한 행동은 노아에게 보고하겠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희가 언제 타 종족의 왕명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까?”

    우린 우리의 왕의 명령만 듣습니다. 대놓고 조롱하는 그의 말에 르네가 미간을 찌푸렸으나 앞으로 다가온 이엘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엘은 르네를 뒤로 밀쳐 내고 후작의 앞에 섰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돌아가십시오, 후작님.”

    “뭐, 오늘은 그렇게 하지.”

    “…….”

    “너 제법 영리하구나. 피시 님이 마음에 들어 하신 이유를 알 것도 같아.”

    “…….”

    “인간아. 네가 우리 영지를 방문하길 고대하고 있으마.”

    특유의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마침내 지긋지긋한 후작이 사라졌다. 이엘은 진이 다 빠진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리석었어. 아무래도 우논을 상대한 건 처음이라 조금 흥분했던 건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조금 전의 상황을 그리며 등을 돌린 이엘은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부딪히고 말았다.

    “아!”

    “괜찮나?”

    무의식적으로 짧게 탄식을 하자마자 르네가 불안하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이엘은 부딪힌 제 이마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위로 올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언제나처럼 곧고 단정한 차림새였으나 얼굴만은 수척해져 있었다.

    대체 르네가 여긴 왜 왔을까. 아까 낮에 성 밖에서 봤던 게 정말 르네였을까? 이엘은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게 가까이에 서 있던 이엘에겐 아주 잘 보였다. 그는 몹시 불안해 보였다.

    “르네 님.”

    “…….”

    “여긴 대체 어떻게 오셨습니까?”

    전과 다를 게 없는 그녀의 물음에 르네는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자신이 죽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간 모른 체하며 저를 대했는데 이제 와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는가. 달라진 건 오로지 제 마음뿐이었다.

    “……다치진 않았나?”

    그의 걱정이 평소와 다르다. 이엘은 이런 비슷한 유의 걱정을 받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잘 지냈는가 해서.”

    “…….”

    “일이 있어서 온 것이다. 너와 노아의 짐이 아직 영지에 있어, 그것을 가져다주러.”

    변명을 하는 게 퍽 낯설다. 행색이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것과 달리, 그는 거짓말에 능하지 않은 건지 다소 부산스러워 보였다. 이엘은 다시 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르네는 난처한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틀어 피해 버렸다.

    ‘이번엔 꼭 살아라.’

    후회와 미안함이 어려 있던 꿈속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유의 걱정을 하고 있는 현실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다. 남자는 몇 번이나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떼었다가 붙였다가를 반복하다가 이내 입매를 일자로 굳게 닫아 버렸다.

    르네는 저를 물끄러미 올려보는 여자의 시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몰래 지켜보다가 가려 했다. 눈이 좋으니 그녀가 어디에 있든, 일단 영지 안으로만 들어오면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올 테니까. 그러나 짐을 가져다주러 왕성에 들러 노아와 차를 마시고 시선을 돌렸지만, 그의 시야 안에 이엘이 들어오지 않았다.

    노아가 숨긴 것이다. 정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버렸어.

    노아는 자신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이에나가 손님으로 와 있으니 서둘러 돌아가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을 알면서도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여기 오래 머무는 것은 미련만 남기는 어리석은 짓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급하게 왕성을 나왔다.

    그러나 마음은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길이 왕성의 후원 깊은 곳에 닿아 있었다.

    그의 능력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인간의 존재가 그곳에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는 늑대들의 감시를 벗어나 빠르게 후원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이 온 힘을 다해 그리워했던 존재를 만났다.

    “오헬.”

    그가 제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오헬.”

    하이에나에겐 허락하지 않았던 그 이름을, 르네가 재차 불렀다.

    이엘은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동굴처럼 울려 퍼져 제 마음에 올곧게 스며들어 왔다. 르네는 가만히 자신을 기다려 주는 다정한 녹안을 응망하며 닫아 두었던 입술을 열어, 묻어 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 말이 다 닿기도 전에 파스스 소리와 함께 그와 이엘의 사이에 얇은 얼음 장벽이 생겼다.

    “떨어져.”

    노아의 뒤에서 달려온 늑대들이 이엘을 둘러싸고 르네를 향해 적대적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흥분하여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기세가 흉흉했다. 노아는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세워진 얼음 장벽의 높이를 더 높게 쌓아 올렸다.

    “사적인 친분으로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르네.”

    “…….”

    “누가 네게 나의 후원에 발을 들여도 좋다고 허락했지?”

    그가 뚜벅뚜벅 걸어와 르네의 앞에 마주 섰다. 두 사람의 모습을 얼음 장벽 너머로 지켜보던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가려 했지만 늑대들이 이빨로 옷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갈 수 없었다. 늑대들은 나서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라고 했을 때 돌아가면 좋았잖아.”

    “그럼 하이에나에게 오헬이 먹혔을 텐데.”

    “뭐?”

    “이따위로 경비가 허술하다면 차라리 내 영지가 더 안전하겠군.”

    “…….”

    “오헬. 기다리겠다.”

    말을 마친 르네는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점이 되어 하늘로 사라졌다. 이엘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가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얼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직전의 말을.

    ‘꽃봉오리가 널 기다려. 어떻게 피우는지 난 도저히 모르겠다. 네가, 왔으면 해.’

    내게로 왔으면 해.

    늑대들의 냄새 사이로 미세하게 하이에나의 것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릿한 피 냄새도 은은하게 퍼져 있다. 노아는 미간을 좁히며 이엘의 안전부터 살폈다. 다행히 피를 흘린 건 그쪽이 아니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핏자국의 주인은 하이에나의 것인 모양이었다. 르네가 한 건지 이엘이 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놈이 호되게 당한 건 확실했다.

    “하이에나가 이곳에 왔었나?”

    “르네 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오헬. 하이에나가 왔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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