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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00화 (100/488)
  • 100화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었다. 이엘은 말없이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밀로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다, 익숙하게 그 품 안에 안기듯 파고들었다. 커다란 새끼 늑대들을 껴안아 주던 것처럼 이엘은 토닥토닥 밀로를 다독였다.

    “기억이 돌아왔어, 미르?”

    “…….”

    “너야말로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지?”

    밀로는 그녀의 물음에 줄곧 이엘의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돌아갈 때가 되긴 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두기도 했고……. 전쟁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긴 했어도 슬슬 저를 찾을 때가 됐다.

    만약 다른 용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다시 내려온다면, 그땐 10년 전보다 더 끔찍한 학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워낙 피에 흥분하는 종족이라 앞뒤 안 가릴 테니.

    “가고 싶은 건 아냐. 하지만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다시 올 거야?”

    이엘이 기쁜 낯을 숨기지 않고 밀로의 팔을 잡고 물었다. 밀로는 그녀의 얼굴에 번진 화색에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자신에게 감정을 드러낸 것은. 언제나 꽁꽁 감정을 숨기기만 하던 애가 처음으로.

    “내가 다시 왔으면 좋겠어?”

    “응.”

    밀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던 밀로가 다시 예전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엘의 허리를 잡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에 깜짝 놀란 이엘이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놀랐잖아!”

    “하늘 구경 시켜 주기.”

    “뭐?”

    하여간 철이 저렇게 없어.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다시 돌아오긴 한 모양이다. 이엘이 혀를 차며 빨리 내려 달라고 고함을 치자, 밀로는 샐샐 웃으며 그녀를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 주었다.

    “하늘 구경하고 싶지 않아?”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구경시켜 줄 수 있어. 하늘도, 바다도.”

    “바다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해.”

    “나는 가능한데.”

    저놈의 허풍은 정말. 인간이 어떻게 바다에 들어간단 말이야?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밀로가 씨익 웃으며 그녀를 탑 안으로 끌어당겼다.

    “눈이 그쳤네.”

    이엘이 겉옷을 털어 옷걸이에 걸어 두며 중얼거렸다. 며칠 내내 쏟아지던 눈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에 밀로가 다가왔다. 그러곤 마치 화제를 돌리려는 듯 이엘의 손에 들린 화관을 쏙 가져가 버렸다.

    “이거 내 거야?”

    “뭐…… 일단은…….”

    “이거 화관이지?”

    자연스럽게 화관을 머리 위에 올려 쓰며 개구지게 웃었다. 멍하니 밀로의 웃음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는 꽃이 참 잘 어울리는 남자다.

    “좀 이상하지?”

    “뭐가?”

    “그냥. 그거. 별로 화관 같지도 않고…….”

    “흐음.”

    그녀의 말에 밀로가 화관을 내려 손에 쥐더니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스승’인 밀로가 앞에 있으니 괜히 목이 탄다. 이엘은 아닌 척하며 밀로의 눈치를 살폈다. 미간을 찌푸리며 화관 곳곳을 바라보던 밀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제 머리 위에 화관을 올렸다.

    “아니. 난 이게 더 예뻐.”

    팔불출인 밀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큰 신뢰는 안 가지만……. 그래도 이엘은 웃음이 터진다. 역시 그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

    이엘이 머무르는 별저는 노아의 성 후원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늑대의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렇게 깊은 곳까지 아무나 쉬이 들어올 순 없다.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나 딱히 위험할 것도 없는 곳이었기에 밖으로 나와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난 며칠 동안은 아주 조용했고.

    “…….”

    “…….”

    서로 대치하듯 이엘과 하이에나가 마주 섰다. 오랜만에 뜨겁게 내리쬐는 볕에 이불이라도 말릴 요량으로 가볍게 나왔던 이엘은 뒤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피터는 이불을 털기 위해 가지고 왔던 막대기를 들고 덜덜 떨다가 저 옆으로 나동그라진 지 오래였다.

    재빠르게 피터를 이불이 널린 빨랫줄들 사이로 밀어 넣어 숨기고, 이엘은 그 막대기를 주워 하이에나와 대치했다. 그러나 하이에나는 피터가 사라지자 그르렁거림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테르일까? 아니면 둔? 그것도 아니면 우논? 테르 한 마리라면 제어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상대가 화친을 위해 온 손님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물러나십시오.”

    으름장을 놓는 그녀의 말에도 하이에나는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칫하면 피터가 순식간에 사냥당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어쩌다 영지가 더 위험하게 된 건지, 이엘은 짤막한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막대기를 손안에서 홱 돌려 잡았다. 어떻게든 놈의 시선을 유인해 피터를 숨겨야 한다.

    “화친을 맺기로 한 종족이 이렇게 함부로 위협하는 건, 대체 무슨 무례이십니까?”

    그녀의 위협에도 하이에나는 흔들림 없이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공격할 태세도 보이지 않았고, 달려들 기미도 없는 듯했다. 그저 관망하듯 그녀의 움직임을 살필 뿐이었다. 이엘이 다시 한 번 막대기를 돌려 휘두르자 하이에나가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한 발짝만 더 가까이 오시면 정당방위로 먼저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쩜 저렇게 제 왕자님과 똑같은지. 성지에 함부로 난입하던 피시가 떠올라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이에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슬쩍 앞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이엘이 옆으로 몸을 굴려 빨랫줄에 널린 이불 하나를 홱 잡아 하이에나에게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눈앞이 가려진 하이에나는 발을 들어 이불을 치우려 했으나 이엘이 더 빨랐다. 하이에나가 능력을 쓰기 전에 그 위에 올라탄 것이다.

    양팔로 짐승의 커다란 목을 감싸고 막대기를 이용해 힘을 주자, 하이에나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금방이라도 몸을 뒤틀어 날뛰려는 하이에나를 제압하기 위해 이엘이 오른쪽 발로 그의 몸을 걷어찰 때였다.

    “윽……!”

    이 능력은 여전히 기분이 나쁘네. 이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 목을 붙잡았지만 허공에 둥둥 뜬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놈의 짓은 아니었다. 그녀는 캑캑거리며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후원 입구 쪽에 회백발의 남자가 이엘을 향해 빙긋 미소 지으며 손을 뻗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경고였던 건지, 남자는 금세 손을 거두며 시선을 내려뜨렸다. 덕분에 이엘은 바닥에 깔린 푹신한 이불 위에 고꾸라지듯 떨어져 버렸다.

    “지금 이게 무슨……!”

    “무작정 공격부터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이로군.”

    “…….”

    “그는 공격 의지가 전혀 없었다.”

    “설령 공격 의지가 없었다고 한들, 포인팅당하는 상대가 겁에 질리면 그 또한 공격이 되는 법입니다.”

    땅에 떨어져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후작은 이 소년이 패티스가 말한 그 소년임을 알아챘다. 검은 머리를 한 소년은 가까이서 보니 눈에 띄는 눈동자 색을 갖고 있었다.

    “너 황족이로구나.”

    “그럴 리가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 왔다는 듯 즉답하는 모양이 퍽 웃겼다. 후작은 제 옆에 서서 눈치를 살피는 테르 하이에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년의 말이 옳다. 이 녀석이 공격할 마음이 전혀 아니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포식자의 사정이고.

    그것과 별개로 후작은 테르를 향해 의문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어째서 녀석은 저 소년을 공격하려 하지 않았던 걸까. 인간을 그렇게나 혐오하는 우리인데. 그의 다독거림에 억울하다는 듯 테르가 낑낑거렸다.

    “그보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주십시오. 노아 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텐데 함부로 영지를 돌아다니시다니, 이 무슨 결례입니까?”

    “네가 늑대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냐?”

    “제가 말씀드릴 이유는 없죠.”

    “오만하긴.”

    후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고 이엘은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져 있던 막대기를 주웠다. 그녀가 막대기를 손에 쥐자 하이에나가 움찔 몸을 떨며 후작의 뒤로 제 몸을 숨겼다.

    이엘은 기가 막혀서 하이에나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덩치에 겨우 이 막대기를 무서워하는 게 말이 돼? 마치 어느 영지에 있는 호랑이와 사자 새끼들이 떠올라 막대기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제가 지레 겁을 먹었네요. 목을 졸라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사과에 귀를 내려뜨렸던 하이에나가 슬그머니 후작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한참이나 눈치를 살피다가 슬금슬금 이엘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가도 이엘이 꺼려하지 않자, 하이에나는 용기를 내고 그녀의 주변을 한 바퀴 빙그르 돌았다.

    “인간. 너 되게 좋은 냄새 나. 달큰한 냄새야.”

    살벌한 소리를 참 달콤하게 한다. 테르 하이에나는 그녀를 향해 귀를 쫑긋거리며 알은체를 해 왔다. 나름 친근감을 표현한 것 같은데 당하는 입장에선 먹히기 직전의 사냥감이 된 기분이라 썩 좋진 않았다.

    하이에나가 계속해서 그녀의 곁을 맴돌자, 보다 못한 후작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하이에나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후작의 옆으로 다가와 충성스럽게 그 곁에 섰다.

    “하논. 넌 먼저 들어가 있어라.”

    “예, 후작님.”

    그와 동시에 이엘도 피터를 저택 안으로 피신시켰다. 다행히 후작은 하논이라는 테르와는 달리 피터에게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평화로운 마당 곳곳을 둘러볼 뿐이었다.

    “볼일이 없으시면 그만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피시 왕자님의 편지를 받았나?”

    “무슨 편지 말씀이십니까?”

    “역시 전하지 않았군.”

    후작은 소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별 볼 일 없는 차림새에 병약하게 생긴 걸 보니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은 아니었다. 늑대가 먹잇감으로 키우는 건 아닐 테고. 그럼 대체 뭘까. 왜 황족과 비슷하게 생긴 인간을 이렇게 후원 깊은 곳에 숨겨 두고 있는 걸까. 대체 이 인간은 언제부터 이곳에 머물렀을까.

    우리가 종족회의로 이곳에 왔을 때, 이 소년은 어디에 숨어 있던 걸까. 그땐 냄새조차 나지 않았는데.

    “피시 왕자님과는 어떤 관계지?”

    “글쎄요.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일 뿐입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인데 전하께서 그렇게 많은 보석을 보내셨다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는 후작을 보며 그녀가 미간을 구겼다. 아까 전부터 편지는 뭐고, 보석은 뭐고. 피시 왕자는 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왜 저 우논의 입에서 그 왕자님의 이름이 나오는 건지.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모르겠네요. 무엇보다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당신들이 이곳에 왔었던 것은 노아 님께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너, 이름이 무엇이냐.”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은? 네 성이 있을 것 아니냐.”

    “차자라서 성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네 아비의 성은? 네가 황족이 아니라면 성을 밝히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

    집요하긴. 끈덕진 후작의 추궁에 진절머리가 난 이엘은 대충 들고 있던 막대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예의를 차려 답을 드리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건방진 게 황족 놈들과 똑같군.”

    “어차피 당신들은 인간이 모두 건방지다고 생각하잖아요?”

    “…….”

    “그러니 인간을 모조리 죽여 버렸지.”

    그녀가 평소에 사용하던 막대기보다 길이가 짧았다. 이 정도 길이라면 상당히 가까이에 접근해서 공격을 해야 먹힐 텐데. 눈대중으로 막대기의 길이와 후작을 번갈아 쳐다보던 이엘이 소매를 걷고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제 이름을 알고 싶다면 스스로 알아내십시오.”

    “…….”

    “안타깝게도 제 이름은 누구나 쉬이 부를 수 없는 이름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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