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같이 가고 싶은데 오늘 업무가 좀 밀려서 안 돼.”
“……네?”
“조심히 다녀와. 바람도 좀 쐬고.”
노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워진 이엘의 뺨 위에 제 손바닥을 댔다. 비교적 뜨끈한 온기에 찌릿하며 몸이 녹아들었다.
“올 때 내게도 꽃을 하나만 갖다줄 수 있나?”
“그런 건 어렵지 않지만…… 어떤 꽃이요?”
“정원에 심을 것들 중에 제일 예쁜 걸로.”
“…….”
“가서 정원에 심을 꽃들을 많이 가져오도록 해. 다른 곳은 벌써 꽃이 만개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마음에 드는 것들로 잔뜩 가져와라.”
“…….”
“바쁜 일이 끝나면, 나와 함께 또 다녀오고.”
이상하다. 분명 잊기로 했는데. 왜 자신도, 노아도 어제의 일을 잊지 않은 것처럼 시선이 얽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
이쯤 되면 신께서 자신의 길만 열어 주시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그녀와 늑대들이 성을 빠져나오는 내내 눈이 멈췄다가 성을 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쏟아진 것이다. 아무튼 무사히 성벽에서 멀어진 그들은 곧잘 가던 호수를 지나쳐 너른 들판에 도착했다. 로날드의 등에서 내린 이엘은 낮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와, 오헬! 저것 봐, 너무 예뻐!”
감탄에 젖은 리퍼의 말처럼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지에서 떨어진 곳은 완연한 봄이었고, 만개하다 못해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은 그녀를 반겼다. 절경이었다.
이엘은 활짝 웃으며 꽃향기를 마음껏 느꼈다. 그러다 아직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 앞에 걸음을 멈춰 섰다. 넋을 놓듯 가만히 꽃을 바라보니 문득 독수리의 영지가 떠올랐다.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이 지겨워 왕성 부근에서 가져온 꽃을 화분에 몇 심었는데. 아마 지금쯤 꽃이 폈을 것이다. 다만 그 왕성엔 시종이 따로 없어 꽃을 관리할 자가 없을 텐데……. 곧 시들어 죽겠지.
‘죄가 없기 때문에, 살렸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명명했다. 죄가 없다고……. 글쎄. 연좌는 없다고 해도 내 아버지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황족으로 태어나 이종족은 누리지 못했을 혜택과 대접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고, 아버지가 죄를 지어 얻어 낸 이득으로 자란 것도 맞으니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란 것을 차치하고도.
그러면 이온은……. 이온은 살아나면 안 되는 걸까. 이온이 다시 황권을 잡으면…… 역시 안 되겠지. 내가 살면 안 되듯, 이온도 살면 안 되는 거니까.
“그거 먹을 거야?”
로날드가 코끝을 찡긋거리며 바구니를 톡톡 건드렸다. 이엘은 생각을 지우고 오드가 싸 준 도시락을 펼쳐 늑대들에게 하나씩 주었다. 입가심도 안 되는 양으로도 테르들은 즐거워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이엘도 흐리게 웃었다.
“오헬, 여기로 와 봐. 꽃이 많아!”
저 멀리서 귀엽게 꽃 한 송이를 코에 올린 리퍼가 탄성을 질렀다. 이엘은 나머지 늑대들을 쉬게 하고 로날드와 함께 리퍼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는 광경이었다. 만개한 꽃들이 고개를 삐죽빼죽 내밀며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조금 전에 있던 곳보다 더 아름다워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꽃을 볼 때면, 꽃과 잘 어울리는 소년이 떠올랐다. 언제나 제 화를 풀어 주기 위해 꽃을 갖다 바치던 그 푸른 머리 소년이.
“밀로의 화가 풀릴까?”
“걘 덩치는 산만 하면서 속이 왜 그렇게 좁아? 그렇게 계속 꽁해 있으면 큰일이란 말이야. 벌써 몇몇 우논 님들이 벼르고 계셔.”
로날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노아가 상관 말라고 일갈했으니 참고 있겠지만, 저런 식으로 농성이 이어지면 곤란해지는 건 밀로였다.
그녀는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다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들을 얼기설기 엮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걸 여기서 이렇게 했던가……? 서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이엘의 곁으로 늑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뭐 해?”
“그게 뭐야?”
“우와…… 괴상해.”
“그거 부메랑이야?”
“아니면 회초리?”
잔소리가 많은 테르들이 쉴 새 없이 비판을 하자, 무안해진 이엘이 만들고 있던 화관을 냅다 던져 버렸다.
“나 안 해.”
얼굴이 새빨개져서 씩씩거리자 로날드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달려가 이엘이 던진 화관을 입에 물고 다시 그녀의 앞에 톡 내려놓았다.
“빨리 완성해 줘. 보고 싶단 말이야.”
“부메랑이라며.”
“음, 그럼 그게 뭔데?”
정말 모르는 것인지, 리퍼가 순진한 눈망울로 이엘과 화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아랫입술을 깨문 이엘은 짤막한 한숨과 함께 못 이기는 척 화관을 집어 들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거라 잘 몰라…….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화관은 밀로가 참 잘 만들었다. 그 큰 손으로 어찌나 오밀조밀 잘 만드는지. 이엘도 옆에서 따라 해 보긴 했는데 통 성미에 안 맞아서 중간에 그만뒀다. 그때 잘 배워 둘걸. 그래도 성의를 봐서 좋아해 주지 않을까? 이걸 받고 좀 풀어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택에 갇혀 있단 이유만으로 그렇게나 화를 낸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늑대들이 다 보는 앞에서 노아에게 화를 내고 침까지 뱉은 건, 대놓고 왕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애라곤 해도 사리 분별 못 하는 애는 아닌데……. 그렇게까지 화가 난 밀로는 처음 봤다.
그래도 못내 고맙고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자신의 숱한 감금에 나선 적이 없었으니까. 이엘 자신과 이온도 해내지 못한 일을, 밀로가 해 주었다. 이해 못 하는 것과 별개로 밀로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 알아. 그거 화관이지?”
이 와중에 검은 늑대가 으스대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말도 안 돼!”
“저게 무슨 화관이야.”
“빌은 바보라니까.”
“아니, 맞아! 화관 맞아! 그치, 오헬?”
검은 늑대 빌이 울상을 지으며 그녀의 품 안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늑대들은 빌이 바보라며 혀를 차기 시작했고, 빌은 그녀에게 치대며 빨리 말해 달라고 이엘을 졸랐다. 이엘은 들고 있던 문제의 화관을 빌의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응, 화관 맞아.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만든 건 화관이야.”
“…….”
고요한 정적 속에 민망함의 몫은 오로지 이엘의 것이었다. 머쓱함에 헛기침을 하던 이엘은 재빨리 화관을 도로 가져와 허술하게 빈 곳에 꽃을 몇 더 얽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날드가 곳곳에 떨어져 있는 예쁜 꽃들을 한 움큼 물어 왔다.
“이것도 같이 엮어.”
와, 쟤 점수 따는 거 봐……. 슈프가 투덜거리더니 자신도 예쁜 꽃을 가져오겠다며 저 멀리 뛰쳐나가 버렸다. 졸지에 무슨 승부가 되어 버린 늑대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나가 바닥에 떨어진 예쁜 꽃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늑대 몇 마리만이 그녀의 곁에 남아 은근슬쩍 화관을 제게 주길 기다렸지만, 이엘은 달랑 두 개만을 만들어, 가져온 바구니에 넣을 뿐이었다.
“더 안 만들어?”
“응. 화관 만들려고 온 거 아니니까. 꽃을 가져가는 게 더 중요해.”
입을 삐죽거리던 늑대들은 그녀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가져온 모종삽으로 흙을 파던 이엘은 이내 삽을 던지고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화관은 잘 만들지 못해도 꽃을 옮겨 키우는 건 잘할 수 있다. 만면에 웃음이 핀 채 열심히 일에 집중했다.
멀리 뛰쳐나갔던 늑대들이 한껏 예쁜 꽃을 주워 왔지만 그들이 돌아왔을 땐 이미 화관 만드는 일은 끝난 뒤였다.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어서 와서 제 일을 도우라고 재촉했다. 풀이 죽은 늑대들은 할 수 없이 가져온 꽃들을 바닥에 우수수 쏟아 낸 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라는 노아의 명령이 생각나 로날드가 갖고 왔던 수레 위에 화분을 빠르게 올렸다.
“오헬! 들어갈 시간이야!”
“그래, 가자.”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품 안엔 화분이 한가득이었다. 수레에 다 들어갈지 모르겠네. 이엘이 중얼거리며 최대한 많이 넣으려고 수레를 정리했다.
“그거 다 정원에 심을 거야?”
“응, 우선은. 폐하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좋아하시지, 당연히!”
이엘은 예쁜 꽃을 갖다 달라던 노아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곤 제 손에 들린 화관 중 마지막 것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예쁜 색으로만 엮었는데…….
“폐하의 정원에 잘 어울려.”
“야, 바보야! 이젠 오헬의 정원이지!”
“아, 맞다. 오헬 거였지, 이제.”
아직도 투닥거리는 테르들을 뒤로하고 이엘은 그 화관을 들고 조금 더 안쪽으로 향했다. 아까 봐 두었던 곳이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햇볕이 많이 내리쬐는 곳으로 향하니 그토록 찾던 붉은 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꽃이었더라…….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무릎을 꿇고 가만히 그 꽃을 쳐다보았다. 겨울에 피는 꽃인지, 다소 저물어 가고 있었으나 이엘에겐 이 꽃밭에서 가장 예쁜 꽃이었다.
― 왜?
봉오리가 흔들리며 꽃이 속삭였다.
“그냥. 네가 예뻐서.”
― 나를 데려가려고?
“응. 그래도 돼?”
― 물론이야.
흔쾌히 허락하는 꽃의 흙을 조심히 팠다. 화관에 같이 엮고 싶었는데 말을 하는 존재라면 그럴 수 없지. 이엘은 흙과 함께 파서 가져온 작은 화분에 꽃을 심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작게 일렁인 것은.
이엘은 흙을 옮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외에는 어떤 것도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래 시력이 좋지 않아, 설령 그 위에 뭔가가 있다고 해도 알아채진 못했겠지만.
다만.
“르네 님인 줄 알았네…….”
이상하네. 왜 르네가 떠오른 거지. 이엘은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다가 저를 재촉하는 꽃의 성화에 서둘러 화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헬. 거기서 뭐 해? 어서 들어가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
“응. 알겠어.”
데리러 온 슈프의 등 위에 올라탄 이엘은 화분을 품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수레를 끌고 함께 달리기 시작한 늑대들을 돌아보며 이엘이 작게 웃었다.
“로니. 이거 노아 님이 좋아하실까?”
“폐하께 드리려고?! 폐하가 그런 걸…… 하실까?”
“싫어하시면 오드 주지, 뭐.”
“그럼 나한테 줘!”
“아니, 나 줘!”
하긴. 이렇게 엉망인 화관은 좀 그러려나. 주억거리던 이엘이 다시 한 번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해가 이따금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치 위에 무언가가 뜬 것처럼.
“왜 그래, 오헬?”
“아니야, 아무것도.”
이엘은 어제 새벽에 꾸었던 악몽이 떠올라 눈앞이 아득해졌다. 분명 그냥 꿈인데, 꿈인 걸 아는데…….
‘도망쳐라.’
르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드는 제 어깨를 붙잡고 슬프게 읊조렸다.
‘이번엔 꼭 살아라.’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처럼 아직까지 생생하다. 꿈속의 르네는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에 움켜쥐며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적안이 세차게 흔들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곤 뒷걸음질 치는 이엘의 앞을 막다가 사납게 날아드는 총과 화살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어 버렸다.
10년 전, 내 목숨을 인정사정없이 앗았던 독수리는 왜 꿈에서 날 막아 주었을까. 그의 눈에 어린 후회의 감정이 너무도 생생해서, 이엘은 순간 그게 정말 예지몽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미르. 문 좀 열어 줘.”
그러나 탑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화관을 가만히 내려봤다. 엉망진창으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꽃들이 자신의 모습처럼 맥없이 축 처져 있었다. 재차 문을 두드려 봤지만 탑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결국 이엘은 돌계단에 주저앉아 버렸다.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게.”
안 들릴 리 없다. 언제나 네 시선 안에 내가 있는 걸 아니까. 과할 정도로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는 밀로를 떠올리며 무릎을 끌어당겨 안았다.
“네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야?”
그러고 보면 자신은 늘 밀어내기만 했다. 밀로는 언제든 제 곁을 내어주고 함께 머무르길 원했지만 그녀는 제 삶을 살아가는 게 벅차 밀로를 외면했다. 하다못해 노아에게 마음을 연 지금까지도, 이엘은 밀로와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따위 궁금한 적도 없으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소홀하게 대한 걸지도 모른다.
“미르.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니?”
꼭 가야 한다면 막을 순 없겠지만, 되도록 제 곁에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욕심이 생긴 셈이었다. 그 생각에 이엘이 바람 빠진 웃음을 낮게 흘렸다.
“나 때문에 화내 줘서 고마워, 미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제 자신조차 그 사실에 화를 내 본 적이 없었다. 성미가 불같은 아버지는 작은 꼬투리만 잡아도 멱살을 채 옷장에 처박아 버렸고, 어린 자신은 그 안에서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길 울며 기도할 뿐이었다. 그 상황 자체가 부당하고 잔혹한 학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노아가 정말 자신을 가둔 건 아니지만, 그런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을 대변해 나서 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심지어 어린 날의 이온도 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근데 정말 갇혀 있던 건 아니야. 내가 혼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랬거든. 좀…… 마음의 정리가 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미르. 오해하지 마. 나는……. 그녀의 작은 웅얼거림이 멈춘 건 나무 바닥이 흔들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고개를 뒤로 돌림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차가운 바람에 푸른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이엘이 마른침을 삼키며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르.”
“지금도 나랑 가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