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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98화 (98/488)

98화

로날드의 날 선 말투에 이엘이 고개를 돌렸다. 모퉁이에 몸을 반쯤 숨기고 덜덜 떨고 있는 피터와 눈이 마주쳤다. 새끼들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앞을 가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이엘은 곁에 있는 새끼들의 털을 쓰다듬으며 뒤로 물러서게 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해서 폐하께서 데려오셨어.”

“왜?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가 도와주면 되잖아.”

“맞아! 우리도 있는데 왜 굳이 인간을……,”

“자꾸 잊나 본데, 나도 인간이야.”

이엘이 작게 웃으며 로날드를 껴안자, 잔뜩 성이 났던 로날드가 꼬리를 내리며 바닥에 무릎을 꺾고 주저앉고 말았다. 또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늑대는 투덜거리면서도 꼬리로 그녀를 포근히 감싸더니 경계를 풀었다.

“그동안 감기 때문에 아팠잖아. 그래서 여러 가지로 피터가 도와주었어.”

“우리는 여기 들어오지도 못했는데…….”

“우리도 도와줄 수 있단 말이야.”

이러다 정말 삐치겠네. 그녀는 서둘러 테르들을 달래면서 겁에 질린 피터에게 눈짓을 보냈다.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드가 있는 조리실 쪽으로 달려갔다.

늑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신이 났다. 로날드가 입으로 담요를 물어 정리하는 동안, 다른 새끼들이 영지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이엘이 독수리의 영지에 가 있는 새에 별다른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영지를 복구하느라 힘들었다는 징징거림을 들으며 그녀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오헬. 진짜 보고 싶었어어!”

“나도.”

애정이 듬뿍 들어간 목소리로 제 옆을 파고드는 리퍼와 슈프를 양쪽 팔에 끼자 다른 새끼들이 투덜투덜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워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전처럼 잘 웃는 이엘을 힐끔 보며 새끼들이 그녀를 따라 히죽 웃었다.

오랜만에 허락된 평화였다.

*

“미르는 좀 어때?”

“글쎄. 밥도 잘 안 먹는 것 같았어.”

오드의 대답에 이엘이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긴 한숨을 쉬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벌써 며칠째야, 이게. 동쪽 탑에 갇히다시피 유폐된 이후로 이엘은 밀로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노아의 말대로 정해진 시간마다 그를 기다렸지만 밀로는 찾아오지 않았다. 밀로에 비해 자유로운 이엘이 저택을 나와 찾아갔지만 역시 그는 만나 주지 않았다.

이엘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이상하게도 이곳엔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알고 피하는 것처럼.

그 눈이 유독 퍼붓는 곳이 있다면 밀로가 거하는 동쪽 탑이었다. 벌써 그곳은 가는 길목부터 눈이 잔뜩 쌓여, 이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같은 영지 안인데 마치 다른 종족의 영지가 된 것 같다.

“걱정 마, 엘. 별일 아닐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어?”

“안색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빙긋 웃는 오드의 말에 이엘은 입을 다물었다. 멀뚱멀뚱 수프를 바라보다가 괜히 바닥에서 식사를 하는 테르들을 본다.

“오랜만에 애들을 봐서 그런가 봐.”

그녀의 말에 테르들이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지만, 오드는 다른 의미로 웃고 있었다.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오드는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헬! 식사 끝나면 밖에 다녀오자!”

“맞아. 폐하께서 너랑 같이 다녀오라고 허락하셨어.”

“근데 하이에나들이 있는데 그래도 될까? 그러다 오헬이 위험해지면…….”

“눈이 냄새를 가려 주니까 괜찮을 거야!”

“갈 거지, 오헬?”

“가자아― 응?”

덩달아 외출 금지가 내려진 것처럼 테르들은 이엘보다 더 기대하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새끼들을 외면하지 못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술 더 떠, 오드는 도시락이라도 싸 줄 테니 다녀오라며 그녀를 부추겼다. 이게 무슨 피크닉이야……?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정원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폐하께서 그 정원을 네게 주시기로 했다던데. 사실이야?”

오드의 물음에 이엘이 미간을 좁혔다. 결국 그렇게 된 건가. 짤막한 한숨을 연이어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신만 이득을 취한 셈이 되어 버려 머리가 복잡하다. 저택을 거절했더니 정원을 주겠다는 건 도대체 뭔지……. 둘 다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데.

“오헬.”

“응?”

“그럼 주드 님을 정원으로 옮길 수 있는 거야?”

“…….”

“원래 폐하의 정원이라서 그 옆에 묻었는데, 네 정원이 된 거면 이제 안으로 옮겨도 되는 거지? 응?”

슈프의 물음에 이엘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곤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가. 그것마저 염두에 두었던 걸까, 당신은. 그렇다면 정원의 가치는 이 저택보다 더 클 텐데. 그녀는 잃은 게 없고 얻기만 한 거래였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이엘이 머무르는 저택과 폐허가 된 정원만이 멀쩡한 것은. 부러 눈이 피해 가는 것처럼 두 곳만 멀쩡하게 쨍쨍했다. 이엘은 정원이 있는 방향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주드 보고 싶다.”

“…….”

갑자기 조용해져 버린 분위기에 깜짝 놀라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다.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던 테르들이 먹던 고기를 내려놓고 그녀를 올려본다. 당황한 이엘이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얘기해도 괜찮아, 오헬.”

“…….”

“나도 주드 님이 보고 싶은걸.”

말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우린. 새끼들이 중얼거렸고 오드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언제나 네가 어른스러울 필요 없어, 엘.”

“…….”

“그리고 어른이라고 마냥 참아야 하는 건 아니야.”

어른의 보호 따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언제나 제대로 된 아이였던 적이 없었는데. 왜 네가 그런 어른이 되려고 해. 오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다독거렸다. 이엘은 물끄러미 새끼들과 오드를 바라보다가 바람 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따 정원에 다녀올까?”

“그래. 다녀와.”

“주드를 안으로 옮겨도 되겠지?”

“물론. 이제 네 정원이라며.”

이엘이 저도 모르게 상기된 뺨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언제나 이엘은 무엇 하나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부모의 사랑도, 백성의 관심도, 하다못해 이엘 자신의 사랑조차. 모든 게 이온에게 향했으니까.

그러니 노아의 정원은 처음으로 그녀가 갖게 된 소유지였다. 이온이 숱하게 많은 영지를 선물로 받을 동안, 제 발 붙일 곳조차 없어 위태롭던 이엘에게 처음으로 생긴 땅.

그러나 노아가 선사한 정원은 단순한 소유지의 의미만이 아닐 테지. 그건 이곳이 그녀의 ‘집’이라는 것. 이 무리가 이엘의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왕은 언제나 ‘너’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늑대도 아닌 인간이, 그것도 아무런 작위도 없는 하찮은 존재가 늑대의 영지에서 땅을 받은 것은 그런 의미였다.

아니. 그 땅이 하필 선대 공작 부인의 소유였다는 것까지 더하면 더 큰 의미를 갖겠지만. 오드는 이엘을 바라보며 의미 모를 미소만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테르들과 함께 저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밀로에게 끌려가다시피 나왔을 때보다 날이 더 추웠다. 이제 눈이 슬슬 그칠 때도 됐는데 여전히 늑대의 영지는 추운 겨울의 연속이었다. 분명 르네의 영지에서 봄을 맞았던 것 같은데, 여긴 왜 이렇게 봄이 더딘 건지…….

“그런데 이 눈보라를 뚫고 어떻게 정원으로 가지?”

로날드가 눈을 흠뻑 맞고 돌아와 털을 부르르 털더니 투덜거렸다. 펑펑 내려 쌓이다 못해 눈보라까지 치는 날씨 때문에 이엘이 바들바들 온몸을 떨었다. 이가 절로 부딪치는 한기에 입고 있던 로브를 더 깊게 여밀 때였다.

“어? 눈보라가 그쳤어!”

지긋지긋하게 퍼붓던 눈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속도나 강도가 현저하게 약해졌다. 뽀독뽀독 소리를 내며 앞장서는 테르들의 뒤를 따라 이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목은 눈이 제법 쌓여, 장화를 신었지만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비교적 양호한 눈발을 맞으며 한참을 걷고 나서야 눈이 덜 쌓인 정원에 도착했다. 화전이라도 한 것처럼 불에 탄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이엘은 멀리서 정원의 입구를 바라보다가 지척에 있는 주드의 무덤으로 눈을 돌렸다.

“주드.”

눈이 하나도 쌓이지 않았다. 주드의 무덤만은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엘은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덤을 가만히 그러안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커다란 무덤이 제 품에 다 안겨 오지 않는다. 하지만 주드가 살아 있을 때처럼, 그렇게 꽉 그러안았다.

“보고 싶어, 주드.”

나는 감사해. 짧은 시간이나마 너를 만나게 해 주신 신께 감사해. 있잖아, 주드. 너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행복하고 기뻤어. 그걸 다 표현하기엔 많이 부족했겠지만……. 그래서 나는 너를 대신하려고 해. 네가 사랑하는, 네가 사랑했던 것들을 내가 지켜 주려고 해.

“오헬.”

엉망이 되어 버린 그녀의 로브 위로 두꺼운 담요가 내려앉았다. 시선을 올려 제 머리 위에 드리워진 인영을 보았다. 노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들고 있던 우산을 접으며 그녀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올 때 기별하라고 했는데 말을 너무 안 듣는 거 아닌가?”

“제가 언제는 들었나요.”

실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을 뻗어 노아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주었다.

“하이에나들은요? 이렇게 나와도 돼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하이에나가 보면 어쩌려고 말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 성 밖으로 나가는 건 괜찮아도 여기는 위험해.”

“그럼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됐어. 조금 전에 안드로가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그건 뭐야?”

“아, 오드가 도시락을 좀 만들어 줬습니다. 밖에 다녀오라면서…….”

눈이 잔뜩 쌓인 설경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 도시락 바구니를 숨기며 이엘이 민망한 듯 뒷말을 흐렸다. 이렇게 피크닉을 즐길 여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내가 괜히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어서. 지금이라도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까. 그녀는 민망함에 아무 말이라도 할 요량으로 입을 떼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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