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피곤해서 악몽을 꿨나 보군.”
“…….”
“난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테니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웃기게도 노아는 스스로가 기뻐하고 있음을 느꼈다. 다름 아닌 내 안위를 걱정해 주는 너라서. 그게 얼마나 추한 일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노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이엘의 이마 위에 입술을 짧게 묻었다가 뗐다. 음악이 끝나 버린 정적 속에 그의 입술이 남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저 꿈 때문에 울지 말고.”
감긴 눈썹이 살짝 파르르 떨렸다. 그의 두 번째 입맞춤이 그녀의 눈가 바로 옆에 닿았다. 노아의 커다란 양손 모두가 그녀의 발간 뺨을 감쌌다. 그리고 그런 노아의 손등을 작은 손바닥이 포개 덮었다.
“푹 자도록 해.”
자잘하게 흔적을 남기며 내려오던 입맞춤이 마침내 그녀의 입가에 다다랐을 때, 이엘이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가렸다.
“돌이킬 수 없게 돼요.”
“…….”
“내가 영지에 있길 원하신다면, 더 이상 안 돼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노아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입술을 떼자, 이엘이 그의 뺨을 제 손바닥으로 덮더니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노아의 뺨에 보드라운 입술을 짧게 묻었다가 뗐다.
“잘 자요, 노아.”
“…….”
“아침이 되면 다 잊어요.”
“…….”
“내 꿈도, 오늘의 춤도, 지금 이 순간도.”
잊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잊을 수 없게 만들어 놓고.
*
동이 트기 직전에 눈을 떴다. 노아는 제 팔을 베고 자는 이엘의 얼굴을 확인하곤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들어 쿠션 위에 올려 주었다.
소파 위에서 자라고 했는데도 굳이 카펫까지 내려오더니, 결국 추위에 못 이겨 품으로 파고든 모양이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옆방에서 두꺼운 담요 몇 개를 가져왔다. 그러곤 곤히 잠든 이엘의 몸 위에 차례차례 덮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새벽녘,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이엘이 카펫으로 내려와 그를 따라 누웠다. 폭신한 소파 위로 올라가라고 눈짓을 주어도 제 옆을 고집했다. 노아는 딱딱한 곳에 머리를 대고 누운 그녀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그녀를 향해 노아가 팔을 내밀자, 못 이기는 척 그 팔 위에 머리를 대고 다가왔다.
‘네가 부탁을 하다니, 별일이군.’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뭔데?’
‘그자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자들이라면……,’
‘영지를 습격했던 인간들이요.’
안드로와 기사단이 잡아 온 끄나풀들이 아직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심문을 비롯해 고문까지도 이어졌지만 소득이 별로 없었다. 대다수가 그 ‘보스’라는 자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끄나풀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단순한 빈민가의 도적들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준다고 해서 왔다는 자도 있었고, 그저 이종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 자들도 있었다.
‘어차피 만나도 알아낼 건 없어. 고문까지 했는데도 말을 하지 않더군.’
‘제가 암시장에 갔을 때 만났던 사람이 저들의 보스입니다.’
‘알고 있다.’
‘그 턱수염과 함께 있었던 자들을 다 기억하니, 또 모르죠.’
‘…….’
‘제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요.’
노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고개를 저었다.
‘네가 심문하는 건 안 돼.’
‘왜입니까?’
‘위험해.’
‘전 언제나 위험합니다.’
‘…….’
‘그 정도는 위험한 수준도 아니고요.’
겨우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녀가 미간까지 찌푸린 채 말하자, 노아는 피곤한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하단 말은 핑계였다. 단지 노아는 되도록 그때의 일에 이엘이 관여되지 않길 원했을 뿐이다. 아니. 그때의 일에 더 이상 그녀가 엮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주드 때문이라면……,’
‘아니요. 주드 때문이 아니에요.’
‘…….’
‘그날 인간들이 뱀과 손을 잡았던 건 저 때문이었습니다.’
‘오헬.’
‘제가 갖고 있는 황자의 반지가 원흉이었어요.’
노아는 에메랄드 반지를 떠올렸다. 동시에 그 반지를 죽는 날까지 끼고 있던 황자의 얼굴 역시 흐릿하게 떠올랐다. 밀려오는 답답함에 노아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짧게 한숨을 쉬자, 그를 바라보던 이엘이 손을 뻗었다. 그러곤 노아의 미간 위에 검지를 올려 부드럽게 쓸었다.
‘괜찮아요, 폐하. 저를 믿어 주세요.’
‘널 믿어. 하지만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약속드렸잖아요. 주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겠다고.’
‘…….’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폐하.’
노아는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게 일임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단.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야겠어.’
‘어떤 부탁 말씀이십니까?’
‘정원.’
그가 이마에 닿아 있던 이엘의 손을 잡아 제 입술 쪽으로 끌었다. 마치 조금 전의 입맞춤을 상기하듯 그 손끝 위에 입술을 묻었다. 애정과 경외, 그 경계선에서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손끝을 타고 그의 마음이 찌르르 느껴져 그녀는 당혹감에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그건 마치 잊으라는 자신의 말에 대한 반박의 행동 같았다.
‘나의 정원을 네게 주겠다.’
‘예? 하지만 그 정원은……!’
‘내 어머니의 것이었지만 이젠 네 것이야.’
‘폐하.’
‘그 정도는 받아 주면 안 되나?’
그가 조금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바짝 끌었다. 이엘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받아 줄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것밖에 없어서.’
‘…….’
‘더한 것도 주지 못하는 내 마음을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하이에나 왕자처럼 거창한 선물 같은 건, 감히 네게 줄 수조차 없는데. 불에 타, 터만 남은 그깟 정원이 뭐라고. 그것까지 받지 않는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네게 표현할 수 있는 건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내일은 테르들과 성을 나가 들꽃이라도 몇 가져와. 바람 좀 쐴 겸.’
‘눈이 오는데 괜찮을까요?’
이엘이 소리 없이 웃자 노아도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간다면 하늘도 눈을 그쳐 줄 거야.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그렇게 한차례 이야기를 나누고 새벽빛이 땅속으로 스믈스믈 밀려갈 즈음 깊은 잠에 빠졌다. 노아는 색색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자는 이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음악엔 소질이 없다더니, 정말 춤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왜 그게 그렇게나 귀엽고 예뻤을까. 왜 그게 그렇게나 눈에 박히도록 소중한 걸까. 노아는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잠든 이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네 데뷔탕트는 어땠을까.”
제국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너 역시 데뷔탕트를 준비했겠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들어와 춤을 췄겠지. 밀려드는 춤 요청에 마지못해 응하면서 혹 넘어지지는 않을까 연신 다리만 내려봤겠지. 노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네가 자라는 모습, 네가 자랄 모습, 네가 살아갈 모든 모습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만약 네가 데뷔탕트를 나왔다면 나는 황궁의 기사단장으로 뒤에 서서 네 모습을 지켜봤을까? 네게 손 내미는 수많은 수컷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질투도 했을까. 끝내 참지 못하고 네게 손을 내밀어 춤을 청하지는 않았을까.
‘전쟁으로 저는 모두를 잃었습니다. 그나마 저를 봐주던 제 오라비마저요.’
그녀의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던 손길이 멎었다. 내 손에 죽은 네 오라비의 얼굴이 나는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르네는 네 얼굴을 10여 년이나 잊지 못하고 기억했지만, 나는 빌어먹게도 전혀 기억하지 못해.
왜 이렇게 엇갈려야만 하는 건지. 숨통이 조여들 듯 갑갑했지만…… 이기적이게도 한편으론 이 상황에 감사했다. 만일 너와 내가 황녀와 기사로 만났더라면, 나는 정말로 널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었을 테니. 이토록 나는 이기적이고 치졸한 이종족이다.
날이 밝아오는데 그녀는 여전히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악몽은 꾸지 않는 건지 편한 낯이었다. 언제나 저렇게 편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 바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영영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좋은 꿈 꾸길.”
“…….”
“나타니엘.”
그는 허락되지 않는 이름을 몰래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헬! 오헤에엘!”
“일어나아아―!”
“오헬!”
포근하고 안락한 온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귀를 울리는 징징거림에 눈이 번쩍 떠졌다. 새벽에 지펴 놓았던 장작은 거의 다 타서 재가 되어 있었고, 밤새 제 등을 다독거리며 재워 주던 손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눈 떴다!”
“보고 싶었어, 오헬!”
그 대신에 테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곁에 치대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몸을 일으켰더니, 햇빛을 등지며 서 있던 오드와 눈이 마주쳤다. 단정하게 똑 떨어지는 머리를 정리하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잘 잤니, 엘?”
“아…… 오드. 아침부터 이게 무슨…….”
“폐하께서 금족령을 푸셨어. 그리고 테르들에게 직접 문까지 열어 주셨거든.”
오랜만에 아침을 같이 먹자며 오드가 웃음을 흘리더니 안쪽으로 사라졌다. 아직도 눈만 끔뻑거리는 그녀의 앞에 슈프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오헬!”
“아…… 슈프. 잘 잤어?”
“응! 보고 싶었어, 오헬!”
“야! 나도 보고 싶었거든? 그만 좀 나와!”
“맞아! 왜 너 혼자 독점하려고 해!”
새끼들의 성화에 이엘이 살짝 귀를 틀어막았다. 그녀는 제 몸에 덮여진 커다란 담요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처럼, 노아의 겉옷 또한 자신을 덮고 있었다.
“근데 저건 뭐야? 저런 게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