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르네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작은 물새 따위가 되길 원했다.
“오헬! 들어갈 시간이야!”
“그래, 가자.”
그게 아니면 재규어가 되어 몸이 작아지기라도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거 다 정원에 심을 거야?”
“응, 우선은. 폐하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좋아하시지, 당연히!”
“우논 님들이 그랬는데 이 근방에 들꽃이 꽤 많대.”
“폐하의 정원에 잘 어울려.”
“야, 바보야! 이젠 오헬의 정원이지!”
“아, 맞다. 오헬 거였지, 이제.”
테르 늑대들이 서로 뒹굴며 장난을 치는 새에 그녀가 조금 더 안쪽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향했다. 창공에서 지켜보던 르네는 그녀의 주변에 있을지 모를 이종족을 제거하기 위해 계속해서 그 위를 맴돌았다.
웃긴 얘기였다. 어느 미친 이종족이 늑대가 사는 영지 내로 들어간단 말인가. 애초에 그녀를 위협할 이종족 따윈 존재하지 않을 텐데도, 독수리는 그걸 핑계 삼아 떠나지 못했다.
그 순간이었다. 줄곧 흙을 파던 작은 손이 멈추더니 제 머리 위를 쳐다본 것은.
“오헬. 거기서 뭐 해? 어서 들어가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
“응. 알겠어.”
까마득한 점뿐인 독수리를 알아챌 리 없는데도 르네는 그 순간 이엘과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가온 늑대들의 등 위에 타고 영지를 향해 달렸다.
날고 있는 자신의 등 위로 따사로운 볕이 쏟아지듯 떨어졌다. 제 둥지완 달리 늑대의 영지 일부분엔 눈이 내려 다소 추웠음에도 르네는 이상하게 온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태양 빛에 어두웠던 과거까지 전부 녹아 버릴 것처럼 마음이 찌르르 아렸다.
“너무 빨라, 슈프. 조금만 천천히 가자.”
제 영지에서 지내던 것보다 더 행복한 웃음으로 이엘이 웃고 있었다.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 아주 느린 화면처럼 제 좋은 눈동자에 박혀 온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울음에 발음이 먹힐 정도로 서럽게 울다가, 끝내 그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르네는 그녀의 울음이 무엇보다 싫었다. 가능한 한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홀로 생각했다. 웃음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제 영지 내에선 울지 않기를 바랐다.
“로니. 이거 노아 님이 좋아하실까?”
“폐하께 드리려고?! 폐하가 그런 걸…… 하실까?”
“싫어하시면 오드 주지, 뭐.”
“그럼 나한테 줘!”
“아니, 나 줘!”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는 말을 르네는 이해하지 못했다. 날 때부터 아름다운 이종족에게 아름답다란 수식어는 흔하고 흔하지만 그만큼 이해 못할 단어였다. 하지만 그게 저런 웃음이라면.
그게 너라면.
“이해하게 되어 버렸군.”
비로소 그의 어둡던 마음속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 위에서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볕처럼, 스스럼없이 큰 소리로 웃는 그녀의 웃음처럼, 그의 마음에도 동일한 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아니다. 내가 독수리여서 그나마 다행이로군. 이렇게 멀리서라도 네 얼굴을, 네 웃음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독수리로 태어났음에 신께 감사했다.
*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벌떡 일으킨 이엘은 제 목 부근을 떨리는 손으로 만졌다. 팔딱팔딱 뛰는 맥박은 그 모든 게 악몽이었음을 말해 주었다. 이엘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한참이나 제 목을 부여잡다가 끝내 무릎을 끌어 모아 그 위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모두가 죽어 버리는 꿈을 꿨다. 제 눈앞에서 죽어 버리는 생생한 꿈을. 그리고 자신 역시 추격대를 피해 한참을 달리다, 매복해 있던 자들에게 목이 잘려 죽는 끔찍한 악몽을.
완벽한 파멸이었다.
“하아…….”
짙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신께 기도했다. 제발 이것이 악몽으로 그치게 해 달라고. 감히 신을 떠난 몸이라 기도할 자격도 없겠지만, 부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오드와 같은 종족이 아님에 감사했다. 적어도 이게 예지몽은 아니란 소리니까. 언제나 꿈은 반대였다. 제국이 멸망하던 날 직전에도 행복한 꿈을 꾸지 않았던가. 이것 역시 헛된 꿈이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엘은 침실에서 나오려다 유독 알알하게 아픈 배를 쓸었다. 그러고 보니 달손님이 없어진 지 꽤 되었구나. 달마다 찾아오던 아픔까지 사라지니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서글프다고 해야 하나. 그 아픔과 비슷한 통증이 다시 한 번 느껴지자, 이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너의 첫아이는 내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던 시야를 간신히 붙잡고, 탁자에 올려 둔 숄을 어깨에 걸친 채 방을 나왔다. 방 안에만 있으면 영영 악몽에 사로잡힐 것 같아 잠이라도 깰 요량이었다.
깔끔하고 거대한 복도를 지나 1층으로 가는 계단 앞에 섰을 때, 이엘은 아래층에서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들었다. 뛰다시피 계단을 내려온 이엘과 장작을 넣고 있던 노아의 눈이 마주쳤다.
“깼어?”
깨지 않게 조용히 있다가 가려 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느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두르고 있던 숄을 더 잡아당겼다. 그러곤 노아가 있는 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 이엘을 힐끔 본 노아는 옆에 내려놓았던 코트를 들어 그녀의 다리 위에 덮어 주었다.
“감기 걸려.”
하얗게 드러난 다리를 덮어 주며 그는 장작더미 넣는 것에 다시 열중했다.
며칠 내내 영지에 추위가 몰려왔다. 꽃이 한창 만개할 봄이었지만 노아의 영지는 눈이 펑펑 쏟아졌다. 동쪽에 유폐된 어떤 용 한 마리의 심술 때문에. 물론 이 저택 근처엔 눈이 전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따사로울 정도로 해가 쨍쨍 내리쬈다. 하여간 용들의 성질머리란. 노아는 진저리를 치며 장작을 뒤적였다.
“노아 님.”
그녀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오는 제 이름이었다. 노아는 몸을 돌려 소파에 걸터앉은 이엘을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불꽃이 비친 눈동자에 언뜻 물기가 어려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려올 때부터 몹시 초조해 보였지. 혹 악몽이라도 꾼 걸까. 예전처럼 누군가에게 갇히는 꿈이라도 꾼 건 아닐까. 그는 걱정이 앞섰지만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은 왕성에 가지 말고 여기 계시면 안 될까요?”
“…….”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조용히 있을 테니까, 오늘만 여기에…….”
확실히 그간 세상모르게 푹 잔 모양이군. 그가 작게 웃었다. 노아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추운 저택을 데워 놓기 위해 이곳을 찾아 불을 피우고 동이 틀 무렵에 저택을 나갔다.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편하게 잤다면, 그럭저럭 다행이었다. 노아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다리를 올려 소파 위에 누웠다. 모로 누운 채 노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은 모두가 지켜보는 낮엔 꿈꿀 수 없는 것들을 가능케 한다. 이를테면 지금 그녀의 손끝이 노아의 콧대에 닿은 것과 같은.
“…….”
“…….”
높은 콧대에 닿은 손끝이 잘게 떨리며 콧등을 넘어 그의 뺨에 닿았다. 자신과 달리 단단한 피부를 느끼며 손은 점차 위로 올라간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위해 눈을 감아 주었다. 깊은 눈매를 쓸던 손이 떨어지자 그제야 노아가 눈을 떴다.
작은 숨소리만 오갔다. 고요한 정적 속에 홀로 들리던 장작 타는 소리가 점차 작아져 간다.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곳마다 불에 덴 것처럼 홧홧했다.
노아는 포인팅당하는 사냥감들처럼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축축하게 젖은 녹안이 마치 자신을 죄 집어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뱀의 것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색으로, 뱀처럼 그를 홀린다.
처음 느끼는 감각에 발끝부터 온몸이 뻐근하고 저려 왔다. 그건 본능이었다. 가장 강한 암컷에게 끌리는 늑대의 본능. 당황한 그가 시선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녀의 손이 더 빨랐다. 제법 억센 손아귀로 두툼한 팔목을 잡아챈 것이다.
“어디 가요?”
“아무 데도 안 가.”
“…….”
“잠깐 있어.”
그는 겉옷을 좀 더 단단히 덮어 주고는 홀을 지나 모퉁이 바로 옆방으로 향했다. 불안한 눈으로 한참이나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이엘은 곧이어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노아를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노아는 손에 뜬금없는 물건을 들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축음기.”
“축음기가 있어요?”
의외의 물건에 흥미가 동한 건지, 이엘이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났다. 노아는 그녀를 보며 작게 웃고는 축음기에 쌓인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함께 가져온 음반 몇 개 중 하나를 골라 위에 올리고 태엽을 감았다. 이윽고 관을 타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건…….”
이엘이 말을 하다가 말고 노아를 보았다. 그 역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몇 주 전, 르네의 성에서 들었던 그 연회곡이었다. 이엘이 그와 숱하게 발을 맞추고 함께 연습했던.
“춤이라도 출까, 해서.”
뜬금없지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 노아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잔잔한 음악이라도 틀어 주면 이엘이 편안히 잘 수 있을까 해서 가져온 거지만. 그는 입술 끝을 당겨 올리며 그녀를 향해 단단한 제 손을 내밀었다. 이엘은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노아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제 낯빛이 좋지 않으니 부러 이런 모양이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늑대의 왕은 여전히 자신의 기분을 맞춰 주고 있었다. 마치 마음의 문이 열릴 때까지 언제까지고 그 앞에서 기다릴 것처럼.
여전히 춤에는 소질이 없어서, 이엘은 제 발을 내려보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무래도 그날 실수 없이 추었던 건 다 르네가 잘 이끌어서가 아닐까. 그 생각에 설핏 웃음이 났다.
어수룩한 춤에도 흐름이 유지되고 있는 건, 노아가 르네와 달리 틀에 박힌 춤을 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줄 뿐이었다.
“꿈을 꿨어요.”
역시. 노아는 작은 정수리를 내려보았다. 이엘은 여전히 제 발에만 시선을 내리박은 채 발 움직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음악의 박자가 조금 빨라지며 두 사람이 한 손을 마주 잡고 살짝 떨어졌다. 팔을 벌리며 뒤로 물러난 이엘이 고개 들어 노아를 쳐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죽었어요.”
“…….”
“내 눈앞에서.”
한 바퀴를 돌아 끌려오듯 품에 들어간 이엘은 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투른 발동작을 잇던 그녀가 실수로 그의 발등을 밟았다.
“실수했네. 죄송해요.”
“그 말 하지 말라니까.”
“그럼 또 죄송하구요.”
힘없는 웃음을 흘리던 이엘이 느려지는 박자에 맞춰 천천히 노아에게 다가갔다. 숨과 숨이 바로 맞닿을 만큼 좁아진 거리에서 그녀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세상이 멸망하는 꿈을 꿨어요.”
“오헬.”
“폐하께서도 그냥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시죠. 맞아요. 그럴 거예요.”
“…….”
“그래야만 해요.”
“오헬.”
“죽으면 안 돼요. 제발 죽지 마세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뺨을 스쳤다. 마치 그가 정말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이 그의 콧등과 눈, 뺨과 입술까지 스쳐 지나갔다.
참 웃긴 일이지. 그 끔찍한 전쟁 통에 그녀가 속한 곳은 이종족의 무리였다. 이엘은 이종족의 편에 서서 인간들과 대치를 하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며칠 전과 같은 자잘한 영지 전쟁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10년 전의 그날처럼, 20년 전의 그날처럼.
그건 예견된 3차 전쟁이었다.
“폐하께서 죽고, 르네 님도 죽고, 밀로도 죽고, 앤디 님도 죽고, 새끼들도 죽고……. 그렇게 다 죽어 버렸어요.”
“그저 꿈이야.”
“알아요. 내 꿈은 다 반대라는 걸.”
“그래. 다 꿈이야, 다 거짓.”
하지만 노아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꿈처럼 되고 말 것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