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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95화 (95/488)
  • 95화

    붉고 선명한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 음악 소리와 한데 섞인 비명과 괴성이 그의 고막을 찢고 파고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인간들이 웃고 즐기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목도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세상이 또다시 깨져 버렸다.

    아아― 그래, 그랬지. 20년 전의 그날이 저랬지.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주 잔혹한 짓을 꾸민 모양이다. 그 많고 많은 순간 중에, 왜 나를 가장 괴롭고 슬프게 했던 날을 보여 준 것인지……. 정말 악랄한 환영이로군.

    “오, 오빠…….”

    그의 동생이 바닥에 엎어져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20년 전, 너는 그렇게 바닥에 고꾸라진 채 목숨을 잃었을까. 너를 끌고 갔던 그 기사단장이 네 목을 쳤을까. 구해 주지 못하는 이 오라비를 원망하며 눈을 감았을까. 온기 하나 없이 네 손은 차갑게 식어 갔을까.

    그는 씁쓸하게 허리를 숙이고 내려앉아 여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20년 전 그날, 이렇게 잡아 주었어야 했는데. 내 목숨을 버려서라도 네가 자진하여 끌려가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르네가 바싹 마른 릴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마치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죽어 가는 제 여동생이 힘없이 딸려 올라왔다.

    “릴리.”

    네 시신 따위 찾을 수가 없었다. 항명하며 처형당한 아버님의 시신 따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무능력하게 제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다. ……릴리. 죄에 사무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흘러나왔을 때.

    “살려…… 사, 살려 주세요…….”

    제 품 안에 있던 여자가 웅얼거렸다. 동시에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 살려만 주세요……!”

    “…….”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어린아이가 울 듯 앙앙 소리를 내던 여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게 흐르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피가 뚝뚝 흐르던 얼굴엔 눈물이 잔뜩 번져 떨어졌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를 놓고 떨어졌다. 이엘은 엉망이 된 머리를 하고 르네를 향해 간신히 손을 뻗고 있었다. 제발 살려 달라고, 그녀가 애원하며 울고 있었다. 르네는 공허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원성이 그의 귀를 타고 머릿속까지 전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르네는 제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다급한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발 숨겨 주세요……. 넘어갈 것 같은 숨을 간헐적으로 내쉬며 손끝을 달달 떨었다.

    무너져 내린다. 그 어린 시절의 너를 기억하는 것도 내겐 죄스러운데, 하물며 지금의 네 얼굴로 나에게 매달리는 건 너무한 짓 아니더냐. 이 악랄한 환영은 대체 얼마나 나를 더 괴롭게 만들려고…….

    “르……르네 님…… 제발…… 저, 저를…….”

    이게 망할 환각이라면, 최면이라면.

    설령 악몽이라도.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다시 너를 버릴 수는 없다. 이제 내겐 그런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

    르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폭음과 괴성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그녀를 감춰 도망칠 심산이었다. 이 비극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또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는 어떻게든 이엘을 데리고 숨어 버리고 싶었다.

    “어딜 가는 거야, 르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스티븐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스티븐은 들고 있던 장검을 그에게 건넸다.

    “뭐 해.”

    “스티븐.”

    “죽여야지.”

    황녀잖아.

    그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이엘이 비명을 질렀다. 스티븐을 피해 도망치려 그녀가 제 손을 놓았다. 텅 빈 그의 손바닥 안에 스티븐이 장검을 쥐여 주었다.

    “찔러.”

    “…….”

    “복수를 해야지.”

    “…….”

    “릴리를 죽인 황족이잖아. 공작님을 시해한 인간이잖아. 죽여, 르네.”

    그의 절친하고 다정한 친구가 그를 종용한다. 르네의 삐걱거리는 시선이 도망치지 못한 황녀에게 닿았다. 잠옷 차림으로 엉망이 된 그녀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르네는 이엘의 비명에 들고 있던 검을 놓아 버렸다.

    그러나 그보다 빠른 스티븐이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덮어 다시 검을 쥐게 만들었다.

    “르네. 황녀야. 황족이라고. 죽여도 되잖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죽여, 르네.”

    “이건……,”

    “그저 한 번 더 하는 건데, 뭐가 두렵다고.”

    “…….”

    “10년 전이랑 똑같을 뿐이야.”

    “…….”

    “그때는 잘만 죽여 놓고 이제 와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티븐과 함께 쥔 그의 장검이 그녀의 가슴을 갈랐다. 퍼붓듯 쏟아지는 피가 그의 얼굴을 덮치며 눈앞이 암전됐다.

    “허억……! 하아…….”

    급한 숨을 들이켜며 악몽에서 벗어났다. 제 눈을 손바닥으로 덮은 채 몸을 번쩍 일으킨 르네는 깜깜한 침실 안에서 막혔던 숨을 토해 내야 했다.

    재빨리 초에 불을 켜 방을 밝혔지만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밖은 여전히 어두운 밤이었고, 제 마음은 그 어두움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좀처럼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젠장……. 그는 탄식을 토하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이런 악몽을 꾸게 된 건지, 그는 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

    “폐하. 많이 피곤하신 듯합니다.”

    후작 엔리케의 말에 내려뜨리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모여 있던 귀족들이 하나같이 그의 안색을 걱정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르네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홱홱 내저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다 문득, 집무실 문 옆에 놓인 화분 하나를 발견했다.

    “저건 누가 갖다 놓았지?”

    왕의 물음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도 모르는 듯 고개를 기우뚱 기울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도 왕궁으로 입궁한 게 꽤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꽃은 일부가 다소 시들긴 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군가 물을 준 것처럼 보였다.

    필 듯 말 듯 한 꽃봉오리 몇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정성 어린 손길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귀족들은 고개를 저으며 웅성거렸다.

    성에 시종을 달리 사용하지 않으니 저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며칠 전 다녀간 새끼 독수리들일까. 생각을 덧대던 그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노아 님께서 정원지기를 하라고 하셨어요.’

    ‘정원?’

    ‘네. 저도 몰랐는데 잘 맞더라고요. 소질이 있는 건지도 몰라요.’

    르네는 제 성 근처에 피어난 꽃밭 따위 관심이 없었다. 어떤 꽃인지,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제 생명조차 가벼이 여기던 게 바로 엊그제거늘. 그러나 그게 그녀의 손을 탄 꽃이라면……. 르네의 눈동자가 한참이나 화분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그 화분은 제 침실 안으로 옮겨졌다. 볕이 잘 드는 곳에 화분을 내려놓고 그는 물끄러미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딘가에 네가 있겠군. 그녀를 생각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그가 눈을 감아 버렸다.

    ‘나를 죽였잖아요.’

    그 한마디에 무너졌다.

    깊고 선한 상처를 여태 품고 살던 그 살갗을 보았을 때, 그 어떤 절망의 구렁텅이보다 어둑한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감히, 그녀를 바라볼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감히 나는 그럴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속도 좋지. 어떻게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았단 말인가. 나는 릴리를 죽인 그 기사단장 놈을 단번에 죽여 버렸는데, 너는 어떻게…….

    아니. 그럴 수도 없는 현실이었겠지. 분노고 뭐고 신경 쓸 수 없는 현실을 내가 만들어 버렸으니까.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한 세계를 내가 만들었으니까.

    그래, 우리의 세계에서 너를 지워 버린 건 나였다. 네가 존재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 버린 건…… 나였다.

    “다과를 하시겠습니까?”

    기사 중 하나가 열린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그녀가 영지를 떠나고 성 밖에 머무르던 병사들이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오랜 습관인데도 이상할 만큼 그는 낯설게 느껴졌다. 온기는 늘어났지만 곳곳이 헛헛하다. 무언가 사라진 것처럼 가슴 한쪽이 텅 빈 느낌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기사가 나갔다. 르네는 제 앞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다가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중 하나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꽃봉오리가 그의 손길을 따라 톡톡 움직인다.

    우습게도 그녀의 손길이 묻은 그 하찮은 꽃 따위가 르네는 미치도록 부러웠다.

    왕성에 시종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따금 식사를 위해서, 혹은 이렇게 다과를 위해 시종 몇이 오가곤 했다. 식사도 그러거니와 다과 역시 즐기는 건 아니었다. 어떤 차가 올라왔는지 따위,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근 몇 달 동안 성에 있던 누군가 때문인지 차와 함께 나온 비스킷이 전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걸 좋아하나 보군.’

    ‘달지 않아서 맛있습니다. 폐하도 드셔 보십시오.’

    ‘나는 썩.’

    그저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실 뿐이었지만, 마치 제 속에 비스킷이 들어가는 것처럼 포만감과 흡족함이 머물던 공간이었다. 썰렁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며 그가 텅 빈 제 맞은편에 시선을 두었다.

    봄이 되어 오히려 따뜻해졌건만, 더 추워진 기분이 드는 건 제 마음 탓인가 했다.

    가는 길 곳곳이 쓸데없이 눈에 익었다. 태어나 이 성에서만 살았으니 그게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유난히 눈에 익은 길목이 있었다. 가령 지금처럼 발길이 이어진 릴리의 방문 앞이라든가.

    익숙하게 문을 닫고 들어선 르네는 한가운데 있는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항상 덮여 있던 피아노가 열려 있었다. 언제든 들어와 연습을 하라고 그가 친히 열어 두었던 것이다. 이제 피아노를 칠 존재는 없는데도, 덮개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르네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건반을 하나하나 눌렀다.

    ‘그 음이 아닌데.’

    ‘…….’

    ‘그 박자도 아니다.’

    ‘저 그냥 연습 안 할래요.’

    올려놓은 두 손을 냅다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가 속으로 웃으며 그녀를 붙잡았다.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은 이엘이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혼내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혼내지 않았다.’

    ‘잔소리도 하지 마세요.’

    ‘그럼 대체 어떻게 배우려고?’

    ‘그냥, 그냥 알려 주세요. 좀 친절하게요.’

    친절이란 단어와 다소 멀긴 하지만. 어쨌든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금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그랬더니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모양인지, 끝내 배를 잡고 웃어 버리는 것이다. 그녀의 웃음을 따라 르네도 입술 끝을 당겨 웃고 말았다.

    르네는 무거운 피아노 덮개를 내려 완전히 덮어 버렸다. 다시 피아노 덮개를 열 존재가 사라졌으니까 이 피아노는 또다시 영영 닫혀 있겠지.

    “폐하.”

    릴리의 방문을 닫고 나오니 후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업무가 밀려 이제야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

    “예, 폐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그래. 영지 복구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텐데 그대가 고생 좀 해 주게.”

    “당연한 일입니다,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점자에 관한 건 늦어도 좋으니 차분하게 진행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공작이 따로 없으니, 후작인 그대가 늘 고생이군. 항상 미안하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또한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폐하.”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살아 있었다면 공작 위를 받았을 스티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 악몽은 오늘 하루 순간순간마다 나를 괴롭게 하려나 보군. 르네는 허리를 숙인 후작에게 등을 돌렸다.

    “폐하.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남다니? 무엇이 말인가.”

    뜬금없는 후작의 말에 르네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오헬이 머무르던 방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

    “노아 님과 그 소년의 짐이 아직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처분할까요? 아니면 전해 주면 될까요? 후작이 선선히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르네는 말없이 후작을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륜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군.

    “내가 다녀오겠다.”

    “예, 폐하.”

    생각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참고 참았는데, 기회가 손에 닿으니 포기란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게 되었다. 르네는 늑대의 영지가 있는 곳을 한참 응시하다가 걸음을 돌려 소년이 머물렀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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