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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94화 (94/488)

94화

이 저택은 그의 어머니 루나를 위해 아버지 무어가 손수 지었던 공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온갖 화려한 것들로 저택을 치장했다. 인간들이나 좋아할 법한 깔끔한 인테리어나 값비싼 장식품들, 곳곳을 수놓은 화려한 조각상들까지. 루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진 않았으나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기쁘게 받았다.

그러니 이 저택은 늑대들의 영지에서 가장 인간의 것에 가깝고 가장 화려한 곳인 셈이었다.

이제 와 구색을 맞추는 게 참 이상한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자에게 그는 그렇게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엘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폐하.”

“…….”

“아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앤디 님께 들었어요. 폐하의 어머니이신 선대 공작 부인의 사저라고. 그러니 제가 받아서는 안 됩니다.”

“왜. 네가 살던 곳보다 초라해서?”

“초라하다고요? 제 궁보다?”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단장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녕 제 소문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

“제 궁은 크기만 컸지, 갖춰진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

“제 아비에게 전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으니까요.”

그녀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모두 내려놓았다. 우울함에 젖어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이엘은 무언가 결단이 선 듯 입을 열었다. 말하기 싫었지만 누군가에게 꼭 말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당신일 거야. 인정하기 싫지만…… 당신에게 말해야 하겠지. 참 아이러니했다.

“저는 불안합니다, 폐하.”

“…….”

“자꾸 제게 뭔가를 주지 마세요.”

노아는 말없이 이엘의 젖은 녹안을 마주했다. 깊고 진한 슬픔이 잔뜩 서린 눈동자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제 손에 뭔가가 들어오면 물처럼 흘러 내려갈까 두려워요.”

“나타니엘.”

“그 이름도!”

“…….”

“부르지 마세요.”

내 이름은 저주를 담은 이름이다. 주드가 끝내 내 이름을 부르고 눈을 감았던 것처럼, 내 이름을 부르면 모조리 죽게 될 거야. 어머니가 그랬고 이온이 그랬다. 이제 곁에 남은 사람은 오드뿐이다. 그 오드마저 사라질까, 그녀는 늘 두려웠다.

“땅 위에 올라오고 나서야 저는 비로소 진정한 가족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늑대들은 제게 아낌없이 곁을 주었고, 놀랍게도 저 역시 그들에게 곁을 주었습니다. 폐하는 믿지 않으셨겠지만.”

그게 표현의 한계였다. 좋아할 줄 모르고 행복해할 줄 모르는, 그녀의 한계였다.

하지만 이엘은 온 마음을 다해서 그들을 품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 늑대들을 쓰다듬었던 것도, 등에 올라타 함께 뛰놀던 것도,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해 주었던 것도. 그녀 딴에는 곁을 내주었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상실이란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작은 상실에도 겁이 나게 만들었다. 주드의 죽음이 그랬고, 노아의 분노가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두렵게 만들었다.

그에게 숨긴 것들이 지금도 차고 넘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춰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더 늘어날 텐데, 지금처럼 무조건적인 그의 수용과 이해를 바라기엔 그녀의 양심이 신을 배반하지 못해서. 이엘은 고르고 고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누릴 줄 모릅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제가 아닌 제 오라비를 더 아끼셨죠. 하지만 전쟁으로 저는 모두를 잃었습니다. 그나마 저를 봐주던 제 오라비마저요.”

그 대목에서 노아는 가슴이 쿵 하고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오라비는 제 손에서……. 잔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출신이 그렇듯, 저는 제 모든 것을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없어요. 그럴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

“이번엔 폐하께서 넘어가셨어도, 다음에 또 넘어가리란 걸 제가 어떻게 믿나요. 아니, 제게 그럴 권리조차 있을까요? 폐하의 그 손에 제 목이 달렸는데, 이 불안함에 어떻게 평안함을 바랄 수 있을까요.”

이해했다. 비로소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해 간다. 부쩍 제 눈치를 살피게 된 것도, 자꾸만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도, 조금 전처럼 제 노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그건 마치 자신이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진실과 같다. 너의 전부였을지 모를 네 오라비의 숨통을 앗아 간 것이 자신이란 걸, 네게 말하지 못했으니까. 그 역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노아는 이엘의 두려움과 르네의 절망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터지는 순간, 서로에게 겨눠질 창이 될 것을 알기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냥 저를 전처럼 대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주지 마십시오. 더 이상 상실감에 두려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너의 방어 체계였나.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던 노아는, 그녀의 공허한 바람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나의 이기적인 속죄는 다시 널 괴롭게만 만들 뿐이었다. 노아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숨을 내쉬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엘은 그가 옆에 왔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언성을 높여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만은.”

“…….”

“내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제 속에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보여 줄 수 없어 머뭇거렸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염려하는지 이제 잘 알겠다. 그간 홀로 품어야 했던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제는 잘 알겠다.

“기다릴게.”

“…….”

“내가 네 이름을 불러도 되는 그날까지.”

우습게도 주인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개들의 습성이라. 노아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기다리는 것만큼 잘하는 것도 없으니까.”

“폐하.”

“이전에 약속하지 않았던가.”

“…….”

“나는 주드와 달리 널 두고 가지 않는다고 했어.”

동일한 마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다짐엔 변함이 없었다. 조금 달라진 거라곤 그 안에 담긴 의미 정도겠지. 더 깊어지고, 더 진실해지고, 더 확실해진.

“멸망한 세상에서 널 만난 게 우리는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해.”

“그건……,”

“네가 유일한 암컷이라서가 아니야.”

“…….”

“너는 우리의 무리다. 나의 백성, 우리의 종족. 그러니 오헬.”

“…….”

“부디 밀어내지만 마.”

늑대로 변한 노아는 그녀의 작은 무릎 위에 치대듯 고개를 내밀었다.

“부디 내 눈앞에만 있어 줘.”

그건 그녀의 불안함을 이어받은 늑대의 호소였다.

*

어둑어둑한 숲을 지나쳤다. 숱하게 시찰을 나가던 곳이니 영지 전역을 죄 기억하던 자신인데도, 이상하게 이곳은 한없이 낯설었다. 르네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정리를 하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아주 작은 불빛이 흔들리는 게 그의 시야에 잡혔다. 본능적으로 그 빛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빛이 점점 커질수록 미세하게 섞여 들어오던 소리도 점차 커졌다.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께 누군지 모를 존재들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상도 하지. 이렇게 웃으며 즐길 여유가 우리에게 있었던가.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전쟁의 피해도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그 생각에 눈썹을 틀어 올리곤 걸음을 재촉했다.

숲의 끝에 다다랐을 때 르네의 걸음은 달리는 수준으로 빨라져 있었다. 그는 울창한 나무를 헤치며 눈과 귀를 울리는 밖을 향해 달렸다. 어딘지도 모르는 이 낯선 땅에서 그는 빛을 향해 그렇게 무작정 달렸다. 그리고 그가 숲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였다.

“오빠!”

길고 탐스러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그의 작은 새가 품 안으로 포로록 날아들었다.

“어딜 다녀와?”

르네는 할 말을 잃고 릴리를 내려보았다.

틀림없는 릴리. 그의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첫 춤은 나랑 추기로 했잖아! 기억 안 나?”

“릴리……?”

“오빠 때문에 스티비랑 췄단 말이야. 아버님이 얼마나 웃으시던지. 아주 부끄러웠다구.”

그녀가 머리색만큼이나 붉어진 뺨을 부풀려 투정을 부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르네는 뻑뻑한 고개를 돌려 릴리의 등 뒤를 쳐다보았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곧 옆에 있던 자의 등을 제 쪽으로 떠밀었다. 얼결에 떠밀려 온 스티븐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들고 있던 잔을 르네에게 건넸다.

“마셔. 피곤해 보이는데 승계가 만만치 않지?”

“스티븐.”

“나도 죽을 맛이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널 제대로 보필하려면 나도 만만찮게 공부를 해야 되거든.”

시원시원하게 웃던 스티븐이 그의 등을 툭 치며 사라졌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웃음뿐인 세상이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쳐다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을 때, 붉은 머리를 한 릴리가 제 오라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뭐 해. 가서 춤추자.”

“……릴리.”

“어서!”

백조의 환각일까. 그게 아니면 공작의 최면일까. 르네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냥감을 찾았다가 단번에 처리하지 못해 그들의 능력에 걸렸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환영에서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단 생각도 들었다.

거짓인 것을 안다. 우매한 것들과 달리 이종족의 머리 역할을 하는 독수리니까. 그러니까 이건 전부 거짓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뭐 해? 우리 영애께서 부르잖아.”

뒤에서 나타난 스티븐은 사랑이 담긴 눈으로 릴리를 바라보며 그를 향해 시원스레 웃었다. 그 옆으로 수도 없이 많은 독수리들이 모이더니 일제히 그를 불렀다. 르네! 르네 님! 소공작님! 하나같이 자신의 곁을 떠나간 자들뿐이었다. 르네는 주먹을 바르쥐었다.

……우매한 자는 나로군.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바보 같은 자는 나야.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 손을 뻗었다. 악랄한 환영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욕망은 독수리의 왕이라 할지라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거짓된 세상임을 알면서도 이곳에 속하고 싶은 마음에 릴리의 손을 잡으려 팔을 더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게 와장창 깨졌다.

“아악!”

“꺄악!”

“크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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