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가두는 건 아니니 오헬을 만나러 가도 좋다. 단, 정해진 시간에만 가도록.”
그는 지친 낯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밀로의 말엔 가시가 담겨 있었다. 녀석의 말이 옳다. 겉에 난 상처만 상처가 아니지. 게다가 놈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을 테니 오죽 속이 터졌겠는가. 괴이한 성격인 용이 한 번을 참았으니 자신도 한 번은 참아 주는 게 도리에 맞겠지. 노아는 그렇게 정리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네, 폐하.”
늑대들은 하나둘 눈치를 보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모여 있던 새끼들은 아비에게 꼬리가 물린 채 질질 끌려갔다. 혹 거기 더 머물렀다간 제 자식들까지 벌을 받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안드로는 싸늘하게 굳은 밀로를 데리고 동편으로 향했다.
“화난 거 아냐.”
둘만 남겨지자마자 노아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황급히 말을 뱉었다. 어떻게든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려 했던 이엘은 졸지에 말도 못 하고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게 잘못했다고 하지 마.”
“…….”
“오히려 잘못은 내가 했다.”
밀로 녀석과 똑같이 짜증이나 부리고. 그것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는 머쓱했던 건지 깊은 한숨을 쉬며 두 손바닥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돌아오던 날 새벽에 이엘의 곁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게 전부였다. 제 성으로 돌아오니 불면증이 다시 도져, 이틀째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상하시네요, 폐하는.”
“뭐?”
“왜 자꾸 제 기분을 맞춰 주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서.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
“어제 아침엔 수프만 드셨잖아요.”
거대한 별저로 온갖 진미를 들고 무작정 들어가기는 했는데……. 노아는 전처럼 그녀와 단란하게 식사를 하는 게 어려웠다. 지쳐 있는 눈빛이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았다. 열에 치여 쓰러졌을 때처럼 또 외면을 당할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그녀가 철천지원수인 자신을 눈앞에 두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게 불편할까, 그게 걱정이었다. 그 탓에 수프만 몇 스푼 뜨고 여태 끼니를 거르고 만 것이다. 사실 배가 고프거나 하진 않았다. 우논은 딱히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안 먹었다고 하면.”
“…….”
“네가 같이 먹어 줄 건가?”
노아가 속으로 웃으며 슬쩍 물었다. 이엘은 가만히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저렇게 잘생긴 얼굴에 웃음이 드리워지면 할 말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목덜미를 만지며 그의 집요한 시선을 피했다.
“……저도 혼자 먹기 좀 그랬으니까요.”
둘러대듯 말하는 게 퍽 귀엽고 우스워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노아가 크게 소리 내며 웃자 이엘이 놀라더니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조용히 하세요, 폐하! 웃음소리가 너무 크세요.”
“내 영지에서 내가 웃는데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하이에나들이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하신 게 누구신데요.”
“아, 하이에나. 맞아. 그랬지.”
왕 맞아? 무슨 왕이 그렇게 중요한 걸 잊고 있어……? 이엘이 눈썹을 위로 틀어 올리며 노아를 보자 그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열받을 일이 좀 있었군.”
“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좀.”
입맛 떨어질 일이 있어서. 그의 말에 이엘은 의문이 담긴 눈으로 노아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엘을 향해 애써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곤 제 성이 있는 곳을 슬쩍 보며 혀를 찼다. 그 왕자 놈을 생각하니 또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맛 없으시면 다음에……,”
“누가 입맛이 없대?”
그가 말허리를 자르고 불쑥 말하자 이엘이 눈가를 찌푸렸다. 조금 전에 입맛 떨어질 일이 있다는 게 누군데. 이엘은 변덕이 심한 늑대의 왕을 힐끗 보다가 그의 시선이 머물렀던 왕성에 시선을 돌렸다.
“혹시 하이에나의 왕자님들도 오셨나요?”
“그게 왜 궁금해?”
“궁금해하면 안 되나요? 하이에나들이 왔다기에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건데.”
그녀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듣고 보니 왠지 자신이 좀스러워진 것 같아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안 왔으면 됐습니다. 궁금했던 건 아니에요.”
이엘은 혹 노아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변명을 덧붙였다. 폐하의 기분을 상하시게 하려던 건 아닙니다. 흘러가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여태 잡고 있던 이엘의 손을 제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내 눈치 보지 마라.”
“…….”
“조금 전처럼 내게 사과도 하지 마. 그게 네 일이 되었든, 밀로의 일이 되었든.”
나는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뒷말은 삼킨 채 노아는 그녀를 끌어 저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겨우 닫혀 가는 마음 문을 열고 틈을 벌렸나 싶었는데, 다시 닫히게 된 건 아닌가. 그는 그 걱정에 자꾸만 초조해졌다.
*
“흐음. 패티스 님의 말씀이 사실이었군.”
거울 너머로 비친 광경에 후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영민하신 넷째 왕자님의 명령이로다.
하이에나들은 성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미세하게 퍼져 있는 인간들의 냄새를 모른 척 지나쳤다. 분명 이 늑대의 소굴에, 자신은 모르는 인간 몇이 섞여 들었다. 종족회의에 왕자들과 함께 참석했던 후작은, 그때 우연히 오드라는 나자르인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즉, 지금 흘러오는 이 냄새는 그 나자르의 것이 아니란 얘기지.
검은 머리. 패티스 님이 예상하셨던 대로군. 노아와 함께 있는 작은 소년은 검은 머리를 한 인간이었다.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들을 삼엄하게 감시하는 데엔 분명 저 소년의 존재도 일부분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 말씀이십니까?’
‘그래.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지. 체구가 좀 작고 볼품없이 마른 소년이다.’
‘그자가 피시 님께서 관심을 보이는 인간입니까?’
‘그런 것 같더군. 그대가 가서 제대로 보고 와라. 이전에 외지에서 늑대의 왕과 마주쳤을 때, 그 왕이 꽤나 아끼던 놈 같던데. 피시가 왜 그놈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알아 와.’
‘그렇잖아도 피시 님께서 선물을 가져가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단 말이지. 왜 늑대의 영지에 볼 것 없는 인간이 숨어 있을까. 왜 늑대들은 그 인간을 꽁꽁 숨기고 있지? 대체 피시는 어떻게 그 인간을 알게 된 걸까.’
패티스는 영지로 돌아오자마자 피시를 추궁했지만, 제 형님께선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볼에 수줍음을 머금고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끈질긴 종족답게 한번 침묵하고자 하는 것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패티스는 빌어먹을 제 형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후작을 비밀리에 불러들였던 것이다.
“후작. 거울을 지나치게 오래 보시는군요.”
“아, 제가 외관을 꽤 신경 쓰는 성격이라.”
뒷짐을 지며 다가온 앤디의 경고에 후작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앤디는 후작이 사라진 곳에 걸려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서 있던 위치에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이 비치는 곳은 닫힌 창 너머 왕성의 후원 부근이었다. 앤디가 화들짝 놀라며 창문을 열고 보니, 이엘의 손을 끌어 저택으로 향하는 제 왕의 뒷모습이 보였다.
역시 뭔가 있군. 놈들이 아무 이득도 없이 이쪽에 줄을 댈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 상황엔 뱀 쪽에 가세하는 게 하이에나들에겐 더 유리했으니까. 게다가 10년 전 그 전쟁 때 뱀들과 긴밀히 연합했던 게 바로 하이에나들 아니었던가.
물론 그들은 인간 여자에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들에게 여자란, 암컷이란, 고귀한 존재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신 다음으로 사랑하는 존재일지도. 그러니 2차 전쟁 때 뱀들에게 현혹당해 최전방에서 인간 학살을 주도한 거겠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종족들이 여자들까지 죽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가장 분노했던 것도 그 종족이었다.
어쩌면 10년 전 2차 전쟁 때문에 뱀과 척을 지게 된 걸 수도 있다. 뱀이 잔악무도하게 여자들을 죽여 버려서……. 하이에나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어찌 됐든 그것만으론 이쪽과 동맹을 맺는 이유를 대기에 한참 부족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앤디 님. 폐하께서 별저로 드셨습니다. 오헬과 식사를 하실 모양인 듯합니다. 하이에나들은 어떻게 할까요?”
하이에나 열두 마리는 마치 이곳이 제 영지인 양, 아주 느른하고 편한 상태로 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엔 그 어떤 사욕도 담겨 있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앤디는 조금 전 일로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게 됐다.
분명,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게 틀림없다. 그는 하이에나들에게 머물 곳을 내어주라고 말하며 후작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
“가져다준 옷은 왜 안 입지?”
“오히려 눈에 띄는 옷입니다.”
철 지난 옷을 대체 어디서 구해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가 오드를 통해 전해 준 옷들은 하나같이 품이 넓고 편한 옷들뿐이었다. 그간 남복을 하느라 맞지도 않는 옷과 가슴을 가려 줄 가리개로 숨이 막혔을까, 나름의 배려가 섞인 옷들이었다.
“저택 안에선 아무도 모르니 입어도 되잖아.”
그래서 부러 말 못 하는 인간을 붙여 줬더니. 시중을 들라고 시킨 그 꼬마는 어디 가고 저택에 손이 필요한 곳을 이엘이 직접 나서고 있었다. 노아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일단 그게 불만이었다. 고생하지 말라고 시중까지 줬는데, 무슨.
“폐하. 그렇게 하시면 동네방네 소문나는 게 아닐까요?”
“뭐?”
“폐하는 지금, 절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세요. 아십니까?”
“…….”
“저는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에게 속한…… 그저 그런 백성이에요.”
“…….”
“황족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러니 제게 이전과 같이 대해 주십시오. 모두가 알 것 같아 두려운 건 제 쪽입니다.”
단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그녀의 말에 노아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이어진 무거운 침묵에, 자리로 들어오던 피터가 흠칫 놀라며 다시 홀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게 네 바람이라면 그렇게 해 줄게.”
“감사합니다.”
조금 더 특별한 것을 바라도 좋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그에게 사무쳤다.
당신들이 내 삶을 송두리째 빼앗았으니 이제라도 날 황녀 대접 하라고 말해도, 그는 기꺼이 그럴 용의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자신의 이기적인 속죄였다. 어떻게 해서든 네게 속죄를 하고 싶은 내 이기적인 속죄. 그러나 이엘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엔 욕망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작은 탐욕마저 사라진 눈동자에, 노아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없이 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를 계속해서 무겁게 만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나.”
“…….”
그의 물음에 이번엔 이엘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물끄러미 제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원한다고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죠.”
“…….”
“설령 돌아가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거예요.”
나는 여전히 구박받는 존재였을 테고 정치적 관계를 위해 얼굴도 모르는 귀족과 강제로 혼인이나 하는, 그런 황녀였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이 더 나은 걸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차별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남자로 존재하는 지금은 그 누구도 내게 ‘여자의 역할’을 강요하지 않으니까. 그런 현실이었다.
그녀는 멈췄던 나이프질을 하며 다시 식사를 했다. 노아는 포도주가 담긴 잔을 입에 대고 이엘이 먹는 모습만을 지켜보았다.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곧잘 식사를 하는 모습에 그나마 안도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럼 네가 악몽을 꾸며 살려 달라고 외치던 존재는 네 아비였을까 하는. 식사를 할 때마다 덜덜 떨던 건…… 혹시 네 아비 때문은 아닐까 하는.
기사단 생활을 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엔 짧지만 단장이 되어 기사단을 통솔하는 역할도 했다. 숱하게 황실을 오갔지만 그는 황녀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녀가 기거하는 곳은 금남의 구역이었을 테니 당연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황족이 시찰을 위해 공작령으로 왔을 때조차 그는 황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일각에서 들려온 소문은 그랬다. 황제는 황녀를 제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피가 섞이지 않은 것처럼, 존재 자체를 무시한다고. 물론 뜬소문이라고 생각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단지 황녀가 병약해서라는 말도 있었고.
당시 노아는 황녀에 관한 미미한 소문을 알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복수로 물든 노여움뿐이었으므로 그런 황족의 소문 따위 귀에 들릴 리 없었다. 구박받는 황녀 따위 제국의 역사엔 아주 흔했으니까.
그러니 이상한 일이다. 이제 와 구색을 맞추는 게, 퍽 이상한 일인 걸 알면서도.
“이 저택은 앞으로 네가 사용하도록 해라, 나타니엘.”
“…….”
“네 몫으로 줄 테니.”
“폐하, 그건……,”
“황녀궁보단 초라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