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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92화 (92/488)

92화

앤디는 한쪽 눈가를 찡긋거리며 여유를 부렸다. 우리 노아 님이 내 말을 은근히 잘 들어주시거든. 그의 허풍을 들으며 이엘은 잔잔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줄곧 마음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창 너머로 정원이 있던 곳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노아의 말대로 주드를 놓아줄 때가 된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영지는 한참이나 시끄러웠다. 앤디와 늑대들은 명령에 충실해, 그 누구도 저택 근처에 발 디딜 수 없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엘과 피터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청소를 할 무렵이 되어서야 늑대들과 앤디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불청객이 돌아갔거나, 노아의 감시 아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모양이었다.

― 영지가 조용해졌어요.

피터가 그녀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손짓을 했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습관적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익숙한 늑대들의 틈새로 이질적인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대충 그 존재를 눈치챘다.

하이에나.

언젠가 맡아 본 적이 있었고, 조금 전 하늘에서 무언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염력을 사용하는 그들이 틀림없다. 무슨 일일까. 또 그 왕자가 온 걸까? 그녀의 어린 시절을 빼다 박은 듯한 그 셋째 왕자가 다시 온 걸까? 그녀는 언젠가 피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널 쫓아내면?’

‘글쎄요. 노아 님이 쫓아내신다면 갈 곳이 없긴 하네요.’

‘그럼 나에게 와. 내가 있는 변경으로 와 줘.’

‘…….’

‘아니면 나를 불러. 내가 어디가 됐든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그땐 그냥 웃음으로 넘겼지만……. 오히려 노아는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닌 보호하는 것을 택했다. 예전부터 늑대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이종족이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정을 주고 넘치는 충성을 보였다. 그 습성이 여전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 노아는 자신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번 일을 넘긴 것이다. 노아에게 자신은 그저 죽다 살아난 하나뿐인 황족, 그것도 무리에서 가장 위험하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의 리더로서, 보호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어제 아침에 그가 보인 갖가지 성의와 정성은…… 그래. 그가 나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황실을 재건할 마음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이온이 간신히 숨만 붙어 명을 잇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녀는 그게 두려웠다. 의도치 않게 자꾸만 그에게 배신감을 안겨 주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온의 존재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이온은…….

“오헬!”

그때 창틀 바로 앞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상념에서 벗어난 이엘이 창문을 밀어 올리자 하얀 늑대가 풀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코를 찡긋거리며 슈프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슈프!”

“오헬! 데리러 왔어!”

“뭐?”

“지금 하이에나가 영지에 와 있어서 우논 님들이 전부 성에 가 계시거든! 지금이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하얀 늑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아마도 늑대들은 노아가 그녀를 이곳에 가둬 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왕의 명령에 불복하고 자신을 구하러 와 준 게 못내 대견해, 이엘은 손을 뻗어 그 하얀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폐하께 혼이 날 텐데?”

“괜찮아, 그런 건! 내가 대신 혼나면 되니까.”

새끼 늑대가 으스대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민망해진 늑대가 소리를 질렀지만 이엘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웃던 이엘은 슈프의 등 너머로 비치는 밝은 햇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창틀 위에 다리를 걸쳐 올렸다.

“피터. 잠깐 다녀올 테니까 절대로 밖에 나가면 안 돼. 알았니?”

단호한 말에 피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엘이 슈프의 등 위에 올라타기 위해 뛰어내리려 할 때였다.

“잠깐.”

창문을 잡고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푸른 머리색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미르!”

반가움에 소리를 내질렀다. 이곳에 온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왜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나 싶었다. 안하무인인 그라면 노아의 명령 따위 무시하고 진작 저택으로 쳐들어왔을 텐데도.

반가워하는 이엘의 앞으로 그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밀로는 어떤 말도 없이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릴 뿐이었다.

그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이엘은 바닥을 향해 뛰어내리려 했으나 밀로가 아래서 그녀를 받아 안았다. 놓아 달라는 이엘의 말에도 밀로는 놓아 주지 않았다. 처음엔 오랜만에 봤기 때문에 반가워서 이러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밀로의 표정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슈프의 말도 듣지 않은 채 밀로는 정원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 미르? 왜 그래? 일단 나 좀 내려 줘.”

“…….”

“미르?!”

당황한 이엘이 밀로의 어깨 위에서 몸을 바동거렸지만 그는 억센 힘으로 더 세게 붙잡을 뿐,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나가면 폐하께서 눈치채신단 말이야!”

슈프가 뒤따라오며 불안하게 소리쳤다. 탈출을 시키려면 보이지 않게 허리라도 숙여서 가든가! 짐짝 나르듯 이엘을 어깨에 걸친 채 대놓고 후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기함했다. 답답함에 밀로의 옷 끝을 이빨로 물어 당겼지만 그는 이종족인 제 힘 따위 가볍게 무시하며 걷던 걸음에 속도를 더할 뿐이었다.

“미르. 왜 그래? 지금 어디 가려고!”

“여길 나가려고.”

“나간다고? 영지를?”

“응. 내가 살던 곳으로 가자.”

“너 기억이 돌아왔어?”

“…….”

“미르!”

원래도 고집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굴 줄은 몰랐다. 앞뒤 사정 다 잘라먹고 무작정 영지를 나가자고 하는 게 어디 있어! 이엘이 소리를 바락 내지르자 성큼성큼 걷던 그의 걸음이 멈춰 섰다. 밀로는 이엘을 얌전히 바닥에 내려 주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갑자기 영지를 나가자고 하면 어떡해, 미르.”

“…….”

“적어도 왜 그러는지는 알아야……,”

“널 여기에 가뒀는데 이유가 더 필요해?”

이엘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될지 모르겠네. 답답한 표정으로 밀로를 올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가둔 게 아니야. 그건 그냥…… 아무튼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 나도 당분간 저택에서 쉬려고 했던 거고. 그냥 내가 나오지 않았던 거야.”

“내가 살던 곳으로 가자.”

“기억이 돌아왔어? 전부 돌아온 거야?”

“아니. 하나도 기억 안 나.”

“근데 무슨 네가 살던 곳으로 가자고……,”

“여긴 너무 위험하잖아, 네게.”

뜻 모를 말이었다. 속으로 뜨끔하기도 했다. 이엘은 그의 의중을 몰라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밀로는 손을 뻗어 제 품 안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늘 장난치듯 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무언가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억지로 삭이려는,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이엘에게 전해졌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내가 저택에만 있어서 화난 거야?”

동생 타이르듯 밀로의 등을 다독거렸지만 그는 답이 없었다. 왜 화가 난 건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서운한 쪽을 고르라면 오히려 자신이 더 서운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떠나는 날엔 배웅해 주지 않았고 돌아온 뒤에도 인사조차 없더니. 곁눈질로 슈프와 눈이 마주친 이엘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슈프도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진정이 된 건지 밀로는 금세 이엘에게서 떨어졌다. 피곤한 얼굴로 이엘을 빤히 바라보던 밀로가 시선을 돌려 왕성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하늘 위에서 지켜보며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는 이엘이 영지를 떠나기 직전에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그녀의 위를 지키느라 바빴다. 독수리의 영지에서 갑작스런 전쟁이 터져 뒤처리를 하고 빠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전쟁을 빼곤 모든 게 순탄했다. 자신의 관심은 오직 이엘의 안전뿐이었으니, 그녀가 안전하다면 그걸로 족했다.

하지만 평화는 산 위에서 깨졌다. 겨우 그깟 일 하나로 애를 구석으로 몰고 끝내 울게 만들다니. 할 수만 있다면 빌어먹을 개와 새를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엘만 없었더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주드의 죽음 이후로 밀로는 이엘의 우는 모습이 진저리 나게 싫어졌으니까.

누군들 우는 걸 좋아하겠느냐마는, 타인의 감정 따위 관심도 없었던 밀로에겐 그건 특별한 일이었다. 아주 각별한 일.

“네가 늑대의 편을 들어 준다고 해도 난 더 이상 여기서 지내지 않을 거야.”

“미르.”

“나가자. 네게 가장 안전한 곳을 만들어 줄게.”

내가 우리 둘이 있을 곳을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밀로는 이엘의 손을 잡으며 제 쪽으로 살짝 당겼다. 그러나 막무가내인 밀로를 멈춰 세운 건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음성이었다.

“가긴 어딜 가겠다는 거지?”

밀로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전에 없이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노아를 쏘아보았다. 그러곤 보란 듯이 바닥에 침을 뱉고 비아냥거렸다.

“지금 네가 감히 그딴 말을 할 자격이나 있냐?”

저렇게까지 왕에게 함부로 하다니. 놀란 이엘이 서둘러 밀로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밀로! 그녀가 다급히 외쳤지만 듣지 않았다.

“입이 뚫렸으면 말해. 내가 왜 꼭지가 돌았는지 넌 알잖아.”

밀로가 속된 말을 내뱉으며 몇 차례 욕설을 퍼부었지만 노아는 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밀로의 옆에 서 있는 이엘과 눈을 마주쳤을 뿐이었다. 밀로의 입방정을 염려하듯 그녀의 눈동자엔 불안이 서려 있었다.

노아가 깊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좁혔다. 겨우 진정시켜 놨더니, 또.

“그래서. 그 이유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건가?”

“난동? 네가 한 짓에 비하면 이건 난동 수준이 아니지 않나?”

“내가 한 짓이 뭔데.”

“내가 그렇게 부탁했던 내 소중한 것에 흠집 나게 했지.”

“…….”

“겉에 난 흉터만 흠집이 아니잖아.”

밀로는 짜증이 몰려왔다. 겨우 그따위 일 하나에 연연해서! 이래서 하등 생물들이랑은 말도 섞기 싫었던 건데. 그는 제 손에 잡힌 작은 손을 세게 맞잡으며 이엘을 끌어당겼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용으로 돌아가 그녀를 데리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해, 미르. 영지에 다른 종족들이 와 있어. 시선을 끌면 안 돼.”

내가 용인 걸 알면, 넌 어떤 반응을 할지. 불안해서.

“죄송합니다, 폐하. 미르의 잘못은 곧 제 잘못입니다. 또한 명령을 어기고 저택 밖을 나왔으니 그에 대한 처분을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어린 제 동생은 용서해 주십시오.”

모여든 늑대들이 꽤 많았다. 아무리 늑대들이 우호적으로 대할지라도 자신들의 왕에 대한 모욕까지 참아 줄 리 없다. 벌써 날카롭게 미간을 찌푸리고 술렁거리는 우논들이 보였다. 이엘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그에게 사죄했다.

“동생의 버릇없는 말투는 제 잘못입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엘의 저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유치한 용과 똑같이 행동해 버린 자신을 탓하며 손을 들어 우논들을 제지했다.

“시끄럽다. 다 자리로 돌아가. 하이에나들이 눈치채면 곤란해.”

“하지만 폐하……!”

“그만. 시끄럽다.”

“…….”

“밀로. 나는 네 기분을 너그럽게 봐줄 만큼 성군이 아니다. 무엇보다 타 종족인 널 이해해 줄 필요 따위 없고.”

못 박듯 ‘타 종족’이라 칭하니 이엘은 괜히 제 마음이 시큰해졌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아무리 무리와 함께 산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늑대와 다른 종족이니까. 그녀는 좀 더 강하게 밀로를 막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밀로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

“밀로. 넌 동쪽에 있는 탑으로 거처를 옮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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