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91화 (91/488)
  • 91화

    “오고 있는 숫자는?”

    “그게…… 잘 보이진 않았습니다만, 굉장히 적었습니다. 어림잡아 열두 마리 정도로 보입니다.”

    열두 마리? 턱도 없는 숫자로 국경을 넘고 있다고? 기가 찬다. 하여간 하이에나 자식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겉옷을 어깨에 걸친 노아는 문득 제 후원에 있는 저택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허튼짓은 안 하겠지.

    “왕자들도 있나.”

    “아니요. 그때 왔었던 왕자들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건 그들이 도착해야 알겠지만.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성 밖으로 뛰쳐나왔다. 본체화를 마친 늑대들이 몸을 한껏 부풀린 채 이를 드러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습격과 전쟁을 겪었던 터라 늑대들은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노아는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느라 고생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성문 앞에서 불청객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 위병 하나가 소식을 전했다. 하이에나 열두 마리가 숲을 완전히 빠져나와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청객답지 않게 쳐들어오지도 않았고, 그저 문이 열릴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기만 했다.

    모두가 노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닫힌 성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 후원 쪽을 응시했다.

    “앤디.”

    “네, 폐하.”

    “우논 몇을 데리고 후원으로 가 있어라.”

    “네.”

    그들이 별저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하이에나 열두 마리는 여유롭게 성 안으로 들어섰다. 종족 특유의 냄새에 늑대들이 제 코를 틀어막고 털을 긁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이에나들은 개의치 않고 왕이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제일 앞에 서 있던 하이에나 한 마리가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늑대들의 왕을 뵙습니다.”

    “오겠다는 전서도 없이 함부로 영지의 경계선을 넘다니. 너희의 왕자들이 그리 가르쳤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도 급하다 보니.”

    자신을 하이에나 종족의 후작이라 소개한 남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늑대들의 영지 곳곳을 눈에 담았다. 불과 몇 달 전에 인간과 뱀들의 소행으로 박살이 났다던 영지가 단시간에 이전의 모습을 거의 회복해 있었다.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보던 후작이 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늑대들과 화친을 맺고자 하여.”

    “뭐?”

    “전쟁으로 인하여 영지가 훼손되었다는 소식을 왕자님들께서도 들으셨습니다.”

    “…….”

    “하여 영지 복구와 성전 복구에 가장 필요한 것들을 드리고자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전서도 없이 급하게 말이죠.”

    후작이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손을 올리자, 늑대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을 향했다. 줄곧 하늘을 가리고 있던 거뭇거뭇한 그늘이 점차 커지더니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백향목을 비롯한 여러 목재, 석재입니다.”

    변경백이 다스리는 영지는 온갖 식물이 자라기로 유명했다. 향이 아름다워 제국민들이 사랑한 백향목은 유일하게 그 땅에서만 자랐다. 특히 황궁이나 성전처럼, 아주 중요한 건축물을 지을 때 사용하던 값비싼 목재였다.

    그뿐 아니라 신비의 세계인 바다와 맞닿아 내륙인들은 꿈에도 못 먹을 산해진미를 황제에게 진상하던 곳이기도 했다. 갖가지 자원이 넘치는 그 땅에서 가져온 것들이라니. 늑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당연했다.

    후작은 늑대들의 반응을 보며 선선히 웃었다. 그의 눈짓 하나에 위에 떠 있던 목재들과 석재들이 하나하나 영지의 벌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돈으로 셈하지 않는 이종족이었지만, 저 정도 되려면 어마어마한 금화가 필요하단 건 그들도 알았다. 늑대들이 여전히 눈을 크게 뜨며 하이에나의 선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희의 왕자님들께서 반드시 화친 조약을 얻어 오라 하시며, 이것들을 아낌없이 내어드리라 하셨죠.”

    “패티스인가?”

    “모든 왕자님들의 뜻입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다. 노아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화친이 나쁜 건 아니다. 게다가 저렇게 귀한 것까지 받는다면, 이쪽에선 손해가 없는 조약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엔 아군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는 쪽이 우세하니까.

    다만 하필 그 상대가 하이에나라서……. 레온이 알면 어떻게 나올지 귀찮아졌다.

    “아, 그리고 이건.”

    후작은 가장 뒤에 있던 상자 하나를 띄워 제 앞에 내려놓았다. 그가 거대한 상자의 문을 열자 햇빛이 얼비쳐 무언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황금을 비롯한 갖가지 보석입니다.”

    “뜬금없군. 그런 건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데.”

    “이건 셋째 왕자님께서 직접 보내시는 것입니다.”

    피시. 노아는 그 소년에 가까운 왕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신의 축복을 받은 분께 드리라고 하셨지요.”

    무리가 술렁였다. 일반적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면 오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특별한 종족. 그러나 피시는 그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인간들 역시 과거엔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그녀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함부로 받을 수 없다.”

    “그분께 직접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편지와 함께 말입니다.”

    “불가하다.”

    “그렇다면 저는 여기서 목이 잘려야겠군요.”

    “…….”

    “전해 주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후작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으나 노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미친 셋째 왕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피곤이 몰려와 눈가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외에 왕자들이 전하는 말은?”

    “이것이 화친 조약서입니다. 수정도 일부 가능하오니 자세한 건 깊은 대화로 나누고 싶습니다, 폐하.”

    “알겠다. 안드로. 저들을 알현실로 데려가도록.”

    “이 선물은 그분께 직접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전해 줄 테니 너희는 들어가라. 이 이상은 허락하지 않아.”

    어쩔 수 없군요. 후작이 선뜻 물러났다. 하이에나 무리는 안드로의 안내를 받아 왕성 쪽으로 사라졌다. 남아 있는 늑대들은 여전히 포악하게 이를 드러내며 경계를 다지고 있었다. 노아는 그들을 다독거리며 있어야 할 곳들로 전부 보내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상자 안엔 황금과 보석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가득 차,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저걸 선물이라고 보낸 그 왕자 놈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명령이라고 웃으며 들고 온 저놈들도 제정신은 아니다. 하여간 하이에나들이란. 노아는 혀를 차더니 이엘의 선물이 담긴 상자 쪽으로 향했다.

    그 위에 함께 놓인 편지는 두 통이었다. 역시나 하나는 이엘이 수취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 앞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제 편지를 뜯어 확인했다.

    「늑대의 왕께 청합니다. 오헬을 제 영지로 초대하고 싶으니 허락하십시오.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제가 당신의 영지로 만나러 가겠습니다.」

    짧고 굵은 선전포고였다. 그것도 일방적인. 화친 조약을 맺고자 온 사신들에게 이따위 선전포고가 담긴 편지를 함께 보내는 왕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진짜 미친놈이군.

    “환심을 사고 싶다, 이건가.”

    황금 더미를 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인간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이다. 이종족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지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게 정말 이런 것들일까. 어제 아침, 바리바리 싸 들고 간 ‘그것’들보다 이런 게 더 좋을까.

    내 창고에도 이런 건 널렸다고. 그가 신경질적으로 상자를 쏘아보았다. 마음 같아선 싹 다 버리고 싶지만……. 그는 상자 위에 있는 루비 보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제국이 있을 때도 루비는 굉장히 보기 힘든 보석 중에 하나였다.

    “……반지.”

    황녀의 반지. 그 반지도 붉은 루비로 장식되어 있었지.

    그녀가 갖고 있던 반지는 주드의 목숨값으로 대신 지불했다. 텅 비어 있을 그 작은 손을 떠올렸다. 그래, 맞다. 오헬은 제국의 유일한 황녀였지. 이런 황금 따위를,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어릴 땐 누리면서 살았을 테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 어린 하이에나 놈이 저보다 나은 것 같아 다시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는 줄곧 들고 있던 피시의 편지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몰랐을 땐 무시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하이에나 따위와 엮여서는 안 된다. 이엘이 여자란 게 밝혀지면 놈들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맹목적으로 암컷을 따르는 하이에나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왕위에 옹립시키고 말 것이다.

    *

    “누가 왔군요.”

    “불청객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창문 가까이에 서 있던 앤디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무료하게 이불을 털고 있을 무렵, 영지가 어수선해졌다. 후원은 왕성보다 더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엘은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답답했다. 갑작스런 소동은 언제나 불안을 동반했다. 게다가 최근에 겹쳤던 여러 전쟁으로 그게 더 심화된 탓도 있었고.

    고민 끝에 이엘이 문을 열고 저택을 나가려던 차에, 이곳으로 달려오던 늑대들과 마주쳤다. 그 중심엔 앤디가 있었다.

    노아의 명령을 받고 왔다던 늑대들은 혹시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거대한 저택 밖, 곳곳마다 자리를 잡았다. 앤디는 이엘이 서 있는 창문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문 입구 쪽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저택 안에 있는 이엘을 보았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줄곧 앤디를 힐금대며 쳐다보던 이엘은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돌아온 뒤로 앤디와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많이 풀렸을까. 아니면 아직도 주드의 일 때문에 내가 불편할까. 갑자기 내가 돌아와, 겨우 묻었던 주드가 다시 떠오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어쩐지 어색해져 괜히 목덜미만 만지작거렸다.

    앤디는 그런 그녀를 보며 씨익 웃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너 그동안 잘 살았나 보다.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잘 산 건 아니지만 독수리의 영지에서 잘 먹긴 했어요.”

    “하긴. 그쪽 왕이 좀 미식가긴 해. 사체를 먹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

    “영지가 좀 춥지? 폐하께서도 네가 감기 걸릴까 걱정하시던데. 몸은 좀 괜찮냐?”

    고개를 끄덕였다. 전과 다를 게 없는 무의미한, 그러나 그녀에겐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갈 즈음에 창을 넘어 앤디의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그는 늘 그랬듯 습관처럼 그녀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었다. 말 없는 위로였다.

    “무덤을 옮겼어.”

    “네?”

    “녀석이 제일 좋아하던 곳으로 옮겨서 묻어 주었어. 그걸 좋아할 것 같아서.”

    “…….”

    “폐하의 정원 말이야.”

    “…….”

    “감히 그 안엔 묻을 수 없으니 가는 길목에 묻어 주었거든.”

    묻고 나니 시원섭섭해졌다. 이렇게 별것 아닌 일에 그 작은 인간 소년을 내쫓아 버리고 만 제 마음이 치졸해졌고, 그러면서도 자신에겐 절대적으로 별것이었던 소중한 동생을 영영 떠나보내고 만 현실에 괴로웠다.

    “늑대들이 유대감이 깊고 가족애가 깊긴 해도, 사실 이 정도는 아니거든. 내가 좀 별난 걸지도 몰라.”

    “별나지 않아요.”

    “녀석은 내게 자식이나 다름없어서.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모났나 보다.”

    “모난 게 아닙니다. 저였어도 그랬을 테니까요.”

    되레 위로를 받은 것 같아, 앤디가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

    “그건 네게 더 많은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안 할래.”

    “…….”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넌 꼭 그 사과를 받아 줘야만 하는 입장이 될 테니까.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앤디 님.”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 주고 싶었어.”

    “…….”

    “넌 내게 정말 소중한 동생이야. 주드에 버금갈 정도로. 아니, 이젠 내게 유일해.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는 살짝 눈가를 구긴 채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생이 그런 표정 짓는 걸, 대체 어느 형이 좋아하겠냐. 농담 섞인 말에 이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별나고 모났다는 걸 알았을 테니 다신 그런 얼굴 하지 마. 알았냐?”

    “네.”

    “그리고 폐하의 명령에 너무 상심하지도 말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나가게 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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