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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90화 (90/488)

90화

그의 차가운 말에 소년이 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채 안드로와 이엘을 번갈아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차피 이렇게 팔리나 저렇게 팔리나 똑같은 처지인 건 맞지만, 소년에겐 매음굴 쪽이 더 끔찍했다.

빈민가에서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소문이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소년이 거의 울다시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절하게 그녀를 쳐다보자 이엘이 짧게 한숨을 쉬며 제 이마를 짚었다.

“이런 식으로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안드로 님?”

“네가 이 아이를 받지 않으면 나는 이 아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

“말을 못 하고 글자도 모르니 네 시중을 들기에 적합할 거라고 하시더군.”

이엘은 벌벌 떨며 눈물만 흘리는 꼬마를 보았다. 내가 황녀 시절에 호사스럽게 시중들을 잔뜩 부리며 지낸 줄 아는 건가. 그게 아니면 이제라도 여자란 것을 알았으니 불편하지 않게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가.

뭐가 됐든 그의 배려 자체는 고마웠다. 일부러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말도 못 하고 글자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데려온 거겠지. 거기다 듣자 하니 매음굴에 팔릴 뻔했거나 팔린 아이인 듯하니, 의도치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아이 하나를 구해 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쉽게 얘기하지 마세요, 안드로 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의 손을 잡아 저택 안으로 당겼다. 매서운 그녀의 눈이 안드로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당신에겐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제겐 동족입니다.”

“…….”

“제게 죄책감을 안겨 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수치까지 함부로 운운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어린 소년들을 납치해 매음굴로 팔아먹는 놈들을 탄광지에서 수두룩하게 보았다. 이엘 역시 그 끔찍한 곳에 팔려 갈 뻔한 적이 있지 않던가. 살아남기 위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제 몸을 지켰던 그 일주일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역겨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저는 폐하께 정당하게 인정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당신께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그래. 알겠다. 조심하지.”

안드로는 순순히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는 볼일이 끝난 것처럼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이엘은 한참이나 밖을 쳐다보다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밖이 조용했다. 어제처럼 엉엉 울며 자신을 풀어 달라고 소리를 치던 새끼들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말뿐인 금족령이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노아의 감금 명령은 언제든 풀리겠지만, 이엘도 당분간은 저택 안에서만 지내고 싶었기 때문에 줄곧 문을 열지 않았다. 어제는 아침부터 새끼들이 밖에서 울어 대는 통에 마음이 쓰여 하루 종일 우울했다. 돌아와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건강만 신경 쓰라는 오드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좋을 텐데. 그런 철없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피실 새어 나왔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홀로 들어서자 이엘은 제 코로 밀려드는 향기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런 저택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꽃 냄새였다.

이엘의 시선이 홀 한쪽을 가득 채운 꽃들에 박혔다. 마치 작은 정원이 꾸며진 것 같았다.

‘급한 대로 이거라도 가져왔어.’

아침이 되자마자 저택 안으로 들어선 노아는 땀까지 흘리며 그녀 앞에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얼결에 받기는 했는데…….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게 뭐냐고 물었지만 노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을 피해 버렸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의 눈짓에 앤디를 비롯한 우논들이 들어와 한쪽 홀에 작은 화단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폐하.’

‘정원이 망가졌어.’

‘…….’

‘복구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에도 노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우논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깔끔하게 화단이 옮겨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어제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이미 노아가 저택을 나간 뒤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렇게 종일 소식도 없더니 오늘 아침엔 대뜸 찾아와 이게 무슨.

그의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꾸며진 화단은 정말 예뻤다. 수수한 들꽃들이 오밀조밀 모여,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마치 모두와 함께 만들었던 그 정원 같았다. 비록 각별한 애정을 주었던 붉은 장미는 없었지만. 그녀는 노아에게 시선을 떼 멍하니 화단만 바라보았다.

화단 정리가 끝나자마자 늑대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엘은 화단 구경을 하다가 말고 놀란 표정으로 늑대들을 보았다. 그들이 옛날 황궁에서나 볼 법한 온갖 진미들을 가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선을 노아에게 돌렸다.

‘폐하. 대체 저게 다 뭡니까?’

‘어떤 게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그는 계속해서 묘하게 대답을 피하기만 했다.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이엘은 굳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은 복잡한 생각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의도가 있는 거겠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그의 의중을 넘겨 버렸다.

무언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돌려줄 수 없음에, 그리고 더 크게 잃을 수 있다는 불안함에 초조함과 괴로움이 쌓였지만, 그냥 넘겨 버렸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더니 이제는 그걸로도 모자라…….

“너 몇 살이니?”

이엘이 제 앞에 서 있는 작은 꼬마를 향해 물었다. 여전히 눈물을 매단 소년이 고사리 같은 손을 모두 쫙 폈다. 열 살이라고? 이엘의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살이면 전쟁 직전에 태어났겠구나……. 이엘은 가만히 소년을 내려보았다.

한편 소년은 자신을 빤히 보는 남자의 시선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저택 안에 들어와 버렸으니……. 겁에 질렸지만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명 울면 더 싫어할 거야. 어쩌면 맞을지도 몰라!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입꼬리가 자꾸만 내려간다.

이엘이 소년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 뭐 하는 거니?!”

바지를 벗기 위해 준비를 하던 소년이 다시 겁에 질린 채 이엘의 눈을 보았다. 이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두 손을 들어 그 앞에서 홱홱 휘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

“그런 시중이 아니라고!”

오, 맙소사. 대체 나를 어떻게 본 거야? 이엘은 황당한 얼굴로 꼬마를 쳐다보았다. 매춘 따위를 하는 놈으로 보인 것도 기분 나쁘지만 무엇보다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애를……. 하긴. 인간들끼리 모여 있는 곳엔 저런 행위도 수두룩했지. 몰려오는 역겨움에 이엘이 제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소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런 행위는 절대 아니야. 앞으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내가 네게 도움을 받고 싶은 건 아주 사소한 거야. 함께 식사를 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알겠니?”

최대한 아이가 겁에 질리지 않도록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그녀의 말이 끝날 때쯤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선 눈물이 똑똑 떨어져 있었다. 이엘은 다시 허리를 펴고 두 손을 들었다. 그러곤 손가락과 손으로 모양을 잡고 움직이자, 이번엔 소년 쪽에서 응답이 왔다. 작은 손으로 열심히 그녀에게 대답을 했고 이엘이 다시 손을 움직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수어를 배웠구나.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니?”

그녀의 물음에 그제야 소년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것을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란 낯이었다.

이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말도 못 하고 글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즉, 소통의 수단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년이 다시 겁에 질리기 전에 그녀는 다시 두 손으로 말을 전했다.

― 괜찮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다정한 눈빛으로 제게 말을 건다. 그것도 수어로. 소년은 줄곧 경계하고 있던 어깨를 조금 편 채 조심스레 제 손을 들어 올려 대답했다.

― 제가 글을 모르기 때문에 데려오셨잖아요…….

― 그러니까 괜찮아. 나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거지, 글은 여전히 모르잖아.

― 하지만…….

― 내가 네 비밀을 지켜 줄 테니 너도 내 비밀을 지켜 주면 돼. 글을 알아도, 수어로 대화를 할 수 있어도, 네가 비밀을 지키면 되는 거야. 그런 건 의미가 없어.

이엘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보아하니 아버지가 없구나.

― 네.

― 가족이 없어?

― 네. 없어요, 하나도.

― 그럼 수어는 어떻게 배웠니?

― 예전에 같이 살았던 형이 알려 줬어요. 그 형은 귀를 다쳤거든요.

소년의 이름은 피터라고 했다. 피터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그녀와 대화할수록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 가는 듯했다. 이엘은 피터에게 할 일을 대충 설명해 주고 1층에 있는 방 하나를 그에게 내주었다. 피터는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하곤 빠르게 그 방으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노아는 부러 인간 아이를 하나 데려온 셈이었다. 혹 그녀가 황족이라는 사실을 들켜도, 여자라는 사실이 발각되어도 아무 문제 없을 말 못 하는 아이로. 여전히 인간을 싫어하면서도 그녀를 위해 기꺼이 인간 아이를 데려왔다.

“대체 당신의 마음을 모르겠어.”

그녀는 창틀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멍하니 왕성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화단으로 돌렸다. 화단에 깔린 폭신폭신한 흙을 보고 있으니 문득 아침에 봤던 노아의 셔츠 소매가 떠올랐다. 접힌 소매 끝 부분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마치 직접 흙을 파서 꽃을 옮긴 것처럼.

*

“폐하! 하이에나가 오고 있습니다!”

“하이에나?”

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영지 복구를 마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안드로에게서 겉옷을 받아 들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앤디가 밖을 힐끔 보며 늑대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 신호에 바닥에 엎어져 있던 늑대들이 일제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미리 오겠다는 전갈도 없이 오고 있다고? 어디쯤 왔지?”

“이미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곧 있으면 숲에 도착할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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