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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89화 (89/488)

89화

그가 미간을 구겼다.

“영지를 나가게 해 주세요, 폐하.”

끝내 목숨을 구걸하게 되는구나. 10년 전 그날도. 르네의 앞에서 살려 달라고 울었지. 기억조차 안 나는 그때의 모습이, 어쩐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비참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서, 여전히 내 목숨이 남에게 달린 사정이라…….

이엘은 건조한 시선으로 가만히 노아를 올려보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간을 구긴 채 한참을 서 있다가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줄곧 그녀의 이마를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을 검지로 걷어 주었다. 그의 손이 짧게 스쳤던 이마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마른침을 삼키며 처분을 기다리는 이엘에게 노아의 시선이 닿았다.

“네가 죽어 가는지 살아가는지 하나하나 알아야겠어.”

“…….”

“너를 가두기 위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게 아니다.”

“…….”

“너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폐하.”

“너를 위험하게 만들어 버린 세상으로부터.”

그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잠깐 침묵했다. 그러곤 이불 위에 놓여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입술 쪽으로 당겼다. 힘없이 끌려온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짧게 묻었다가 뗐다. 동시에 이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영지를 떠나지 마라.”

“……폐하.”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 줘.”

“폐하.”

“그게 내 이기적인 속죄야.”

언젠가 그가 피시의 침입에 대응하듯, 그녀에게 똑같이 기사의 맹세를 했던 날처럼. 노아가 입술이 닿았던 이엘의 손등 위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너를 버리는 일 따위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너는 나의 소중한 백성이다. 너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때 했던 그 말을 노아가 되풀이했다. 그의 눈엔 그 어떤 이기적인 욕심도 없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욕망도, 자신을 버리려는 싸늘함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는 전과 다름없는 늑대의 왕일 뿐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늘어날 거예요.”

“…….”

“지금도 당신께 전부를 말하지 못해요.”

“오헬.”

“그런데도 내가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요?”

노아는 크게 흔들리는 녹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

“내가 되어 주겠다고.”

“…….”

“너의 가림막이.”

왜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이 되었든 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떤 대답이라도 그녀를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노아는 이엘의 손을 놓아 주고 다시 이불을 끌어 제대로 덮어 주었다.

“눈 좀 붙여.”

“폐하도 눈 붙이세요.”

“네가 잠들어야 나도 눈을 붙이지.”

결국 이엘은 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눈을 감아 버렸다.

*

“폐하를 뵙습니다.”

“앉아.”

예배가 마치는 대로 먼저 집무실에 돌아와 있던 노아는 뒤이어 들어온 오드에게 손짓했다. 평소처럼 단정한 얼굴로 왕에게 인사를 마친 오드가 소파에 앉았다. 서류를 안드로에게 떠넘긴 노아도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 나가 있어라.”

“예, 폐하.”

그는 모든 늑대들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오드의 앞에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제국서다.”

“…….”

“내가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넌 알고 있겠지.”

“제가 모든 답을 드릴 순 없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

노아는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뇌하는 것처럼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드는 담담히 그를 보며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그가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오헬이 지난 10년간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라.”

“…….”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 않나.”

그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황족의 씨를 전부 죽이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묻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황녀가 잃어버린 10년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로 인해 숨죽여 살아야 했던 그녀의 그 10년을 묻고 있었다.

“길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

“나타니엘 황녀님은 땅 아래서 10년을 살았습니다.”

“…….”

“전쟁 이후 단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 10년을 땅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폐하.”

“…….”

“햇빛도, 물도, 음식도 없는 곳에서 제 성력으로 겨우 명을 이었을 뿐입니다. 땅 위로 올라오자마자 뱀의 왕에게 잡혔고, 그 이후엔 폐하께서 아시는 대로입니다.”

그녀는 이 땅에 혼자만 남겨졌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요. 덧붙여진 오드의 목소리에 노아가 침음했다. 그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하듯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생각보다 더 참담하군. 그제야 노아는 이엘이 정원 가꾸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게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소소한 행복을 그토록 원했던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여자란 사실을 들키지 않았던 거지? 냄새조차 나지 않았는데.”

“제가 만든 약 때문입니다. 그날은 예정보다 빨리 약효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폐하께서 아셨습니다.”

“계속해서 숨길 수 있는 건가?”

“한 계절을 조금 넘는 정도의 양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론…… 며칠 전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겠지요.”

“더 만들 수는 없고?”

“네. 다시 10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 늑대들의 냄새로도 가려지지 않겠지.”

“인간들이면 몰라도 이종족들은 금세 눈치챌 겁니다.”

노아는 차분하게 생각을 덧대기 시작했다. 단순히 제 영지 안에만 가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 것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여자.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인간들이 광분한 채로 전쟁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전쟁의 피해자로 또다시 그녀가 지목되는 게 두려웠다. 절대 그것만은 안 된다.

종족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종족은 수컷을 잃은 암컷만 노리기도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수컷들 사이에 혼자 남겨진 암컷이란 존재는, 한없이 암담할 뿐이었다. 게다가 종족 번식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고 들 테니…….

오헬은 이종족과 인간 모두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안드로와 상의해 좋은 약재들과 필요한 것들을 잔뜩 사 오도록 해라. 우리 산하에 있는 탄광지에서 암암리에 시장이 열리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 필요하다면 거길 다녀와도 좋아.”

“네.”

“오헬에게 필요한 것도 충분히 사 오도록. 특히 의복.”

“의복 말씀이십니까?”

“늘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느라 갑갑했을 테니, 별저에선 편하게 입고 다니도록 괜찮은 옷을 구해 와라. 품이 크고 널널한 옷이어도 좋다.”

“네.”

오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 같은데도 그는 한참이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침에 식사를 잘 했다는 앤디의 보고에도 그의 마음은 계속 자신의 후원 별저에 있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군.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약으로 감출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한 계절을 넘는 정도. 여름의 끝이 찾아오면 또 엉망이 되겠군. 그는 겨우 복구시킨 제 영지를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하다는 핑계로 언제까지고 영지에 가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살 자유가 있었다. 설령 위험하다 할지라도.

‘기꺼이 내가 되어 주겠다고, 너의 가림막이.’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이기적인 속죄라고 지탄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는 전심으로 그녀의 가림막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우선은 그녀의 안정이 먼저다. 마음의 문을 닫기 전에 조금이라도 열린 틈 안으로 무엇이든 채워 주어야 한다. 잃어버린 그 10년을 되찾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지만 노아는 할 수 있는 한, 무엇이 되었든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는 곧 안드로를 불러들였다.

*

“인간이라니?!”

“갑자기 웬 인간이야?”

꼬마가 잔뜩 겁에 질린 채 영지 안으로 들어서자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드로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인간 소년은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만 같은 왜소한 체구였다. 소년은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바닥만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안드로는 킁킁거리며 달려들 준비를 하는 늑대들을 제지했다.

“쓸데없이 모여 있지 말고 가서 놀아라.”

“공작님. 저건 뭡니까?”

“저렇게 살이 없어서는 아무 맛도 안 날 텐데요.”

“배도 안 부를걸요.”

“뼈밖에 없잖아요. 우웩.”

살벌한 투정을 들으며 어린 소년은 계속해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눈물이 차올라서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결국 소년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울지 마라. 폐하께선 우는 인간을 싫어하신다.”

단호한 안드로의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눈을 벅벅 닦았지만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건 당연했다.

소년은 가만히 제 상황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쩌다 여기에 왔더라……. 지독한 노예 생활 끝에 끔찍한 매음굴에 질질 끌려가던 것을 저 남자가 구해 주었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더니 갑자기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버렸다.

소년은 안드로라고 불리는 남자가 늑대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태어나 우논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두려움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영지 한가운데까지 안드로의 뒤를 따라 걸었다.

커다란 성은 위세가 흉흉했지만 완벽해 보이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급하게 보수한 흔적들이 꽤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소문대로 추웠다. 적응이 안 되는 추위에 소년이 몇 번 기침을 하자, 앞서 걷던 안드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감기에 걸린 것이냐?”

매서운 질문에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드로는 소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거대한 홀을 지나고 몇 번의 복도를 더 지났다. 안드로는 문을 똑똑 두드렸고 안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커다란 문이 열리며 소년의 앞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녀석이야?”

“예, 폐하. 말씀하신 것에 가장 적합한 인간입니다.”

“…….”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게 아니라. 데려가기 전에 좀 씻기고 옷도 갈아입혀. 저렇게 보내면 또 쓸데없이 속상해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병은 없지?”

“예. 혹시 모르니 오드에게 진찰하라고 말하겠습니다.”

“가 봐.”

“네, 그럼.”

폐하? 폐하라니……! 소년이 놀라다 못해 경악에 휩싸여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그냥 우논도 아니고 늑대의 왕이라고? 이종족의 왕과 마주치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니다. 나는 분명 누군가의 먹이가 되기 위해 끌려온 거야! 그것도 왕이 특별히 신경 쓰는! 눈물이 앞을 가렸고 심장은 쉴 틈 없이 빠르게 뛰었다.

“아, 참.”

돌아섰던 노아가 다시 고개를 돌려 꼬마를 바라보았다.

“네가 모실 주인께 충성을 다하도록 해라.”

“…….”

“그렇게만 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게 해 줄 테니.”

왕은 소년이 이해 못 할 말만 남긴 채 문을 닫아 버렸다. 그 뒤로 소년은 안드로에게 이끌려 욕실에서 깨끗이 몸단장을 했고, 감히 꿈도 못 꿔 볼 비싼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거울 앞에 선 소년은 거울 너머의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져 무서웠다. 안 어울리는 옷을 입고 대체 누구에게 가는 걸까. 내가 모실 주인이 누구인 걸까. 누구길래 늑대의 왕이 저렇게 신신당부하는 걸까……. 소년은 막연한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안드로의 걸음이 멈춘 곳은 왕성의 후원 깊은 곳이었다. 그곳엔 아름다운 저택이 위치하고 있었다. 안드로는 저택의 문을 두드리기 전, 소년에게 시선을 돌리고 경고했다.

“앞으로 너는 이 안에서 지내면 된다. 안에 있는 자가 네 주인이며 그가 시키는 일을 하면 된다. 그는 격식이 없는 자니 네가 예법에 어긋날지라도 너를 탓하거나 구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넌 네 온 마음을 다해 네 주인을 섬기도록 해라. 비록 예법은 모를지라도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경의를 담아 주인의 시중을 들어라. 알겠느냐?”

그의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하필 매음굴로 팔려 가던 자신을 선택한 것, 자신이 말도 못 하고 글자도 모르는 어리숙한 아이라는 것에 관심을 보인 것, 마지막으로 자신이 친지도 없는 천애 고아라는 말에 비싼 값을 치르고 자신을 산 것. 나는 먹이로 끌려온 게 아니라 더 끔찍한 짓에 사용되기 위해…….

똑똑― 안드로가 문을 두드린 지 한참 만에 누군가 문을 열며 나왔다. 소년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울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무서웠다.

“안드로 님?”

“몸은 좀 괜찮나.”

“네, 뭐. 보내 주신 약들이 너무 좋아서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고르고 보내신 것이다.”

“…….”

“앞으로 네 시중을 들어 줄 아이다.”

“네? 시중이요?”

이엘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높아졌다. 시중은 무슨……. 그녀는 안드로를 보던 시선을 옆으로 돌려 왜소한 소년을 돌아보았다. 값비싼 옷을 입고 있지만 몸보다 한참 큰 탓에 우스꽝스런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중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서 보내셨다.”

“제가 시중받을 처지는……,”

“그럼 이 아이는 다시 매음굴로 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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