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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88화 (88/488)
  • 88화

    「아르세니온 에르네스트 르뷔아. 알렉산드로 아르카디 프레이 르뷔아의 첫아들로, 제국력 1035년에 일찌감치 황태자로 책봉되어 황위 계승권을 돈독히……(중략)……을 제안하여 황제로부터 칭찬과 토지(우르)를 하사받다.」

    그의 손에 죽었던 황자의 이름에서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7년이라는 짧은 기록이었지만 그 안에 적혀 있는 황태자의 행보는 빼곡했다. 어린 나이에 제국에 공헌한 법들이 꽤 되었고, 그 폭군으로부터 선한 행적으로 칭찬을 받기까지 했다. 노아는 그의 이름을 눈에 새기듯 글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어 뒷장을 넘겼다.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알렉산드로 아르카디 프레이 르뷔아의 첫딸로, 아르세니온 에르네스트 르뷔아의 쌍생아이다. 황자와 함께 황위 계승권을 받았다.」

    그게 끝이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몇 장을 더 넘겨 봤지만 그로부터 얼마 뒤 제국이 망해 버렸기 때문에 이엘에 관한 이야기는 더 찾아볼 수 없었다. 수많은 역사에 겨우 한 줄을 남겼을 뿐인 이름이었다.

    그마저도 누구의 딸, 누구의 쌍둥이로 적혀 있는 게 다였다. 노아는 큰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책을 덮어 버렸다.

    모든 것이 이엘의 존재를 부정했고, 부정하고 있으며, 부정하게 될 것이다.

    “폐하!”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해가 기울어져 갈 무렵이었다. 방 밖에서 앤디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사색에서 벗어난 노아가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다소 무례한 행위에도 노아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오헬이 아픕니다!”

    “뭐?”

    “부디 별저로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빌어먹을!”

    노아는 대답도 않고 서둘러 제 성을 빠져나갔다. 달리다시피 별저로 향한 노아는 그 근처를 서성거리는 늑대들에게 오드를 데려오란 말만 남기고 홀로 저택 안에 들어섰다. 입구에서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곳에 이엘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바닥을 짚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아 올렸다.

    “아프다고 말을 해야 될 것 아냐!”

    “…….”

    “너는 정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픔을 참아 내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시선을 반대로 돌릴 뿐이었다. 마치 자신을 외면하는 것 같았다. 그 차가운 행동에 노아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졌다. 몰랐을 땐 억척스럽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된다고.”

    모든 게 자신이 만든 비극이었다. 투정조차 부릴 수 없게 만든 비극.

    노아는 2층까지 단숨에 올라와 문을 열고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열에 사로잡혀 뜨거운 숨만 내뱉던 이엘은 눈에 핏기가 설 정도로 아득바득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노아가 그녀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 체온을 쟀다.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웠다.

    “오헬.”

    “…….”

    “제발 의지해.”

    제발 나에게만이라도…….

    그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그녀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여전히 편안한 숨은 아니었지만 전보단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엘을 쳐다보다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곤 욕실에서 찬물에 수건을 적셔 와 그녀의 이마 위에 올려 주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손의 한기로 이엘의 열을 내릴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방법으로, 조금이라도 그녀를 편하게 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함부로 능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오헬.”

    “…….”

    “말도 하기 싫어?”

    싫겠지. 그렇게 화를 냈으니. 노아가 자조하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분노에 눈이 어두워 네 아픔을 보지 못한 건 오롯이 내 잘못이다. 그는 미동도 않고 숨을 쉬는 이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저 입술에서 원망이 되었든, 분노가 되었든 무슨 말이라도 좀 나왔으면 좋겠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덧붙이려 입술을 떼려던 찰나에 문이 열리며 오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온 건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는 노아에게 가벼운 묵례 후 서둘러 이엘의 안색을 살폈다.

    “열이 심한 것 같은데. 감기인가?”

    “감기 기운이 미약하게 있으나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후유증인 듯싶습니다.”

    “후유증이라니?”

    “뱀의 독을 너무 강하게 마셨던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로빈의 독? 그때 다 치료했던 게 아니야?”

    “물론 독을 다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뱀의 독은 인간에게 치명적입니다.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후유증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둘러 치료해. 필요한 약초나 약물이 있으면 무엇이 되었든 말하고. 다 구해 줄 테니까.”

    “예, 폐하.”

    오드는 우선 주변을 정화시키는 성력을 사용했다. 그의 입에서 터지듯 퍼져 나온 성력이 이엘의 침대를 결계 치듯 감쌌다. 노아는 뒤로 물러나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폐하. 오헬은 괜찮은 건가요?!”

    “폐하. 들어가면 안 돼요?”

    “폐하!”

    어찌나 크게 짖는지. 밖에서 새끼 테르들이 낑낑거리며 그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2층까지 들려왔다. 이엘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기뻐하기도 전에, 그녀가 별저에 갇혔다는 이야기에 테르들이 울부짖었다. 폐하! 오헬한테 왜 그러세요?! 폐하! 오헬은 억울해요! 폐하! 오헬을 풀어 주세요! 그들의 울음소리가 노아의 귀에 안 들릴 리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닫고 별저를 나왔다.

    “시끄럽다. 너희가 이렇게 떠들면 오헬은 편하게 쉴 수 없어.”

    “어째서 구금하신 거예요?”

    “오헬이 뭘 잘못했나요?”

    “저희가 대신 벌을 나눠서 받으면 안 되나요?”

    “맞아요! 제가 받을게요. 제 잘못이에요…….”

    “맞아요……. 주드 님이 그렇게 된 건…… 오헬 탓이 아니란 말이에요…….”

    어느새 흐느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로날드를 시작으로 모여들었던 새끼들이 훌쩍거리며 끝내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럽게 영지 밖으로 쫓겨난 이엘과의 재회는 앤디보다 이쪽 늑대들이 더 고대했을 것이다. 새끼들이 철없이 엉엉 울자, 그의 아비들이 당황해 그들의 꼬리를 물고 뒤로 잡아당겼다.

    “괜찮다. 새끼들이 하고 싶은 대로 두어라.”

    “하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노아는 무례를 꾸짖지 않고 가장 앞에 엎드려 우는 로날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왕의 위로에 로날드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는 서러웠다. 친구와도 같았던 주드의 죽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토록 좋아하던 이엘마저 영지에서 쫓겨났다. 어른들은 잠시 도피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로날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쫓겨났다는 걸.

    그러니 이엘이 이렇게 갇힌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주드 님이 죽었기 때문에……. 주드 님의 죽음은 다 우리 때문인데. 오헬 때문에 죽은 게 아닌데! 우리가 그날 제대로 성지를 지켰더라면……. 서러움과 미안함과 속상함에 더 크게 울음이 터져 버렸다.

    그런 로날드의 머리를 쓰다듬던 노아가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내가 오헬에게 잘못해서 그런 거야.”

    “네?”

    “내가 잘못했거든.”

    폐하가 잘못했는데 왜 가둬요……? 제 왕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로날드는 훌쩍거림을 멈추고 노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노아는 한참이나 로날드를 쓰다듬어 주다가 다시 별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드의 성력도 끝이 날 즈음이었다. 그들을 지키듯 둘러싸던 반투명한 막이 벗겨지며 지친 얼굴로 오드가 고개를 돌렸다.

    “열은 내렸습니다. 필요한 약재는 안드로 님과 상의하겠습니다.”

    “그래. 여기는 내게 맡겨라. 간호는 내가 할 테니.”

    “폐하, 당신께 해가 된다면 오헬과 저는 영지를 나가겠습니다.”

    “…….”

    “그러니 더는 이 아이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이건 제 간언이자 경고입니다.”

    더없이 싸늘하게 오드가 저택을 나갔다. 노아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성큼성큼 걸어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땀과 열에 젖어 있던 얼굴이 오드의 성력으로 보송보송해졌지만 눈 밑은 여전히 수척하고 그을려 있었다. 노아는 말없이 이엘의 이마 위에 올려놓은 수건을 뒤집어 주었다.

    “해가 되다니.”

    “…….”

    “네가 독수리를 따라 남겠다고 할까 걱정하던 게 내 쪽이거늘.”

    손등으로 그녀의 창백한 뺨을 조용히 쓸었다. 커다란 창 사이로 달빛이 쏟아지듯 두 사람을 비추었다. 노아는 이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녀의 뺨 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 주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겉옷을 벗고 있는 이엘의 몸 위로 이불을 잔뜩 끌어 덮어 주었다. 혹시나 춥지 않을까, 그는 제 차가운 손이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노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옆에 있던 간이 의자에 몸을 의탁했다. 지독한 불면증이 다시 찾아왔는가 싶었는데…… 그것도 네 옆에선 아닌가 보군. 그는 그녀의 손조차 함부로 잡지 못해, 그녀가 덮고 있는 이불 끝을 움켜쥔 채 눈을 붙였다.

    *

    달빛이 어슴푸레 들어와 감긴 눈꺼풀을 건드렸다. 이엘은 몇 번의 시도 끝에 눈꺼풀을 완전히 들어 올렸다. 온몸이 무겁고 노곤했다. 무엇보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악물었던 입 안이 얼얼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보이는 천장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얼굴을 모로 묻고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새카만 밤하늘을 닮은 그의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져 엉망이었다. 늘 정갈하던 남자의 셔츠는 잔뜩 구겨져 있었고, 옆으로 돌아선 그의 얼굴은 자신만큼이나 수심이 깊어 보였다.

    ‘제발 의지해.’

    ‘…….’

    ‘제발 나에게만이라도…….’

    애절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노아의 목소리는 불안했다. 언제나 위엄이 실려 있었고 감정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그녀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렀다.

    처절하다고 느껴질 만큼 불우하게 밝혀진 제 비밀로 인해 독수리는 자리를 떠나 버렸고 늑대는 입을 다물었다. 무리를 아끼는 이종족이니, 위험한 존재인 자신은 내쳐질 거라고 이미 각오하고 예감했지만……. 생각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무서워 별저로 도망치듯 숨어 버렸다.

    이엘은 먹먹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노아의 잠든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착각하잖아. 아직도 내가 당신의 무리에 속해 있는 것처럼…….

    그의 감정을 이해한다. 배신감이 느껴졌겠지. 내가 아직도 무리에 곁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 그간 모두의 노력이…… 허사가 됐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렇게 한참이나 노아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눈썹이 짧게 흔들렸다. 이엘은 다시 고개를 천장으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노아와 대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열이 내렸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치우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펄펄 끓던 열이 싹 사라졌다. 그가 안도하듯 짧게 한숨을 쉬더니 수건과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욕실로 사라졌다.

    새벽이 되었으니 그가 저택을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엘의 예상을 비웃듯, 노아는 다시 간이 의자에 몸을 붙이고 팔짱을 낀 채 제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무언가 생각난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엘이 깨지 않게 발걸음도 잔뜩 죽여 걷던 노아는 불쏘시개를 들고 난로 안에 집어넣었다.

    가뜩이나 커다란 방이라 추울 텐데 전혀 생각을 못 했군. 어찌나 정신이 없었으면. 혀를 차며 난로를 데운 노아가 터벅터벅 걸어와 다시 간이 의자에 앉았다. 그새 뒤척인 건지, 이엘은 등을 돌리고 벽을 보듯 누워 있었다. 마치 얼굴조차 보여 주기 싫어하는 것처럼. 그게 차가운 공기보다 노아에겐 더 시리게 느껴졌다.

    “성으로 돌아가셔서 눈 붙이십시오.”

    그러나 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투였다. 노아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엘도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날이 밝는 대로 나가겠습니다.”

    “뭐?”

    “쥐 죽은 듯 살 테니…… 보내 주십시오.”

    “…….”

    “여태 살아왔던 것처럼 조용히 살겠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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