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오헬을 별저에 가둬라.”
“예?!”
“폐하!”
“폐하!”
어찌나 놀랐으면 안드로마저 노아를 부를 정도였다. 모여들었던 모든 늑대들이 하나같이 놀란 낯으로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중 이엘을 태우고 왔던 앤디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폐하. 가두라니…… 대체 무슨 일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안드로가 상황 파악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그도 꽤나 충격인 듯했다. 영지에 돌아오자마자 하는 말이 오헬을 가두라는 명령일 줄이야. 이마를 짚으며 짧게 탄식했다.
독수리의 영지가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과 노아와 이엘이 그곳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해 들은 늑대들은 서둘러 저희의 왕을 맞으러 달려왔다. 무작정 독수리의 영지가 있는 쪽으로 달리던 늑대들의 앞에 르네가 나타났고, 그는 노아 일행이 있는 산의 위치를 알려 주곤 황망한 낯으로 금세 떠나 버렸다.
의아함을 느끼고 그 무리의 선두에서 앞장서며 달려갔던 건 다름 아닌 앤디였다. 그는 이엘이 영지를 떠난 이후 줄곧 그녀를 기다렸다. 동생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젖어, 이엘이 영지에서 쫓겨나듯 나갈 때 막지 못했다.
아니. 사실상 자신이 내쫓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형답게, 작위를 수여받은 기사답게, 늑대답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자책하는 이엘을 위로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외려 그 아이에게 널 보는 게 힘들다는 말 따위나 하고 말았다. 결국 자신이 내쫓아 버린 것이다.
짧고도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앤디가 했던 것이라곤 후회와 자책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소식을 듣자마자 선두를 자처하여 기사단을 이끌고 맞이하러 갈 수밖에. 온 마음을 다해 맞아 주고 싶었다. 미안하다, 너도 힘들었지? 그렇게 위로하고 싶었다.
‘폐하!’
‘오헬!’
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노아와 이엘은, 마중을 위해 달려온 늑대들을 보고도 웃어 주지 않았다. 아니. 웃기는커녕,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는 냉기에 늑대들이 되레 머쓱해질 정도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잔뜩 수척해진 얼굴로 생기 하나 없는 이엘과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듯 보이는 노아까지. 자연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늑대들과 함께 돌아오는 동안에도 아무 대화 없이 냉랭한 기운만 웃돌았다. 낑낑거리며 제 눈치를 살피는 늑대들에게 모른 척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오랜 여행과 전쟁으로 지친 것이라 치부했는데……. 앤디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폐하. 어째서 그러시는 것인지 말씀이라도 해 주십시오.”
“별저로 가겠습니다.”
앤디의 항명과는 달리, 이엘은 핼쑥해진 얼굴로 노아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부당한 명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등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남겨진 늑대들만 어리둥절한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앤디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
“돌아오시자마자 갑자기 오헬을 가두라는 말을 왜……!”
“오드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별저에 가지 마라. 명령이다.”
“폐하!”
“2기사단과 3기사단에 사상자가 극심했다며.”
“…….”
“보고 올려.”
그 말을 끝으로 노아 역시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집무실 안이 싸늘했다. 그 누구의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앤디가 주먹을 바르쥐며 노아의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그 앞을 안드로가 막아섰다.
“너는 별저 근처에 있도록 해라.”
“하지만……!”
“폐하께는 내가 가겠다.”
“…….”
“주드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닐 거다. 무슨 이유가 있으시겠지.”
결국 앤디는 안드로의 말대로 별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의 손짓에 따라 모여 있던 늑대들도 하나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왕이 깨어나 돌아오셨다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갑자기 찾아온 냉기로 기가 잔뜩 죽어 버렸다. 안드로는 늑대들의 모습에 혀를 차며 서둘러 노아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에도 대답이 없었지만 안드로는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었다. 피곤한 표정의 노아는 포도주가 담긴 크리스털 잔을 손에 든 채 눈가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근 몇 달간 사라졌던 불면증이 다시 도진 모양이었다.
“노아.”
“형이 잔소리해도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이건 명령이니까.”
안드로는 말없이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책상에 올려 두었다.
“그게 아니고 일하라고.”
“…….”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밀린 일이나 처리해 주십시오, 폐하.”
“나, 참.”
노아가 설핏 웃었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웃고 있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피곤한 낯이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 없는 새에 영지가 많이 복구됐네.”
“그게 공작인 저와 앤디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폐하.”
“고마워. 불안했을 텐데 무리를 잘 다독여 줘서.”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괜찮다는 뜻인지 아니라는 뜻인지, 통 모르겠다. 안드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노아는 말없이 눈가를 꾹꾹 누르기만 했다. 안드로는 탁자에 놓여 있던 병을 들어 유리잔 위에 물을 쪼르륵 따랐다.
“부당한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
“다만 지금처럼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 저조차 납득할 수 없게 됩니다.”
안드로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노아가 흐리게 웃었다. 그래. 그사이에 정말 많은 자들에게 신뢰를 주었구나. 안드로까지 내게 이렇게 말할 줄이야. 하긴. 왕인 자신의 마음을 살 정도니…….
노아는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높다란 로빈의 성에서 도망쳐 자신을 마주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서려 있던 그날의 눈동자를. 생기 없이 허여멀건 얼굴에, 먹지 못해 빼빼 말랐던 체구를…….
잔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녀를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다.
“안드로.”
“예, 폐하.”
“10년 전, 내가 죽였던 황자를 기억하나?”
“예.”
“아주 어린 꼬마였지.”
“…….”
“아무것도 모르던 꼬마.”
단 한 번도 그를 죽인 것에 후회를 담지 않았다. 그 소년은 이종족에게 있어 우선순위로 죽여야 하는 척살 대상이었다. 그는 황실의 피를 갖고 태어났고, 미치광이 황제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관례대로라면 차기 황제는 그가 되었을 테니까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를 죽였잖아요. 나를 죽이려 했잖아요. 나는 당신들의 숙청 대상이었잖아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어린 황녀 역시 숙청 대상이었다.
“갑자기 그 말씀을 하시는 건…… 역시 오헬과……,”
“아니. 침묵해라.”
“…….”
“더는 입 밖으로 내뱉지 마.”
머리 좋은 안드로가 그 이상까지 내다보게 할 순 없다. 노아는 지친 얼굴로 쌓여 있는 서류를 펼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기사단과 영지의 피해가 심했다. 사상자는 물론이고 파괴 및 약탈당한 재물도 만만치 않았다. 이엘의 말대로 추격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드의 말처럼 이제는 용서와 감내를 배웠어야 했다. 한번 쌓이기 시작한 후회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만 간다.
“앤디는 어때. 주드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정확히는 주드와 오헬의 일입니다.”
“…….”
“지금은 비교적 괜찮아졌습니다. 여전히 동생의 일은 슬퍼하고 있습니다만.”
“그래.”
“오헬이 돌아왔으니 더 나아질 겁니다.”
노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엉망이다. 제 마음도, 그녀의 마음도. 안드로는 고뇌하는 주인의 손에서 잔을 가져가 물이 담긴 잔으로 바꿔 주었다. 노아는 지친 음성으로 안드로를 내보냈다.
눈을 감은 채 다시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피로가 배로 몰려왔다. 늘 달고 살던 불면증이 다시 도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편안하게 잠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우습게도 흉통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던 게 가장 최근의 단잠이었다.
‘노아, 제발…….’
그의 귓전에 이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힘겨운 낯으로 쓰러진 자신을 붙잡던 그 목소리가. 그리고 연이어 언젠가 들었던, 그 잘게 웃던 웃음소리도 포개어 들린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기도 했고 때론 크게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노아가 좋아하던 그 웃음소리가, 어느새 귓가에서 멀어져 간다.
처음엔 분명한 배신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들 중 그 무엇 하나 진실이 섞여 있지 않았다는 것에 배신이 물밀 듯 밀려들어 왔다. 일부를 각오했던 것과 전부를 부정당한 것은 천지 차이였다.
이쪽은 전부를 주겠다고 말했는데 저쪽은 달아날 준비만 했다는 게, 노아에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사실이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음엔 불안함이었다. 하필이면 여자. 그것도 유일한 황실의 여자라니……. 눈앞을 캄캄하게 만드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를 숨겨야 할지, 이용해야 할지, 없애야 할지……. 감히 무엇 하나, 손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다음엔 죄책감이었다. 이엘의 말처럼 그녀가 진실될 수 없는 세계를, 자신이 만들고 말았다는 죄책감.
마지막으로 노아는 가슴이 미어졌다.
“……나타니엘.”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맨살 위에 새겨진 끔찍한 흉터를 보았을 때, 옆에 있던 르네는 절망했다. 르네가 남긴 그 흉터가 10년이 지나도 그녀에겐 여전했다. 보는 사람마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그 흉터를 가지고 꿋꿋이 살아남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지냈을까. 도대체 어떻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혹은 점차 연민으로 번져 갔다. 노아는 늘 음울하던 이엘의 얼굴을 떠올리며 침음했다. 암울한 유년기를 보내고 이제 겨우 성인이 되었는데 더 끔찍한 앞날이 펼쳐져 있다면, 그 누가 웃으며 살 수 있을까.
이엘의 그 흐린 표정은 그녀의 암담한 미래의 방증이었다. 그 앙상한 몸은…… 잘 자라야 할 시기에 제대로 먹지 못해 그렇게 된 건 아닐까.
복잡다단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온갖 감정들이 제 안에서 뒤섞여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을까. 내가…… 감히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그 불안함에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깊게 숨을 내쉬며 다시 쌓여 있던 서류를 하나둘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에라도 몰두해야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하지. 그는 체념하듯 보고서를 확인하다가 문득 여러 서류 뭉텅이 사이에 끼워져 있는 두꺼운 책을 발견했다.
“제국서…….”
「르뷔 제국서(르뷔 제국력 0~1038년)」
그가 일전에 안드로에게 찾아오라고 했던 그 제국서였다. 아마도 이번 습격 때 앤디가 연구소에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노아는 서둘러 먼지를 털어 내며 두꺼운 책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나타니엘.”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이름. 수많은 페이지를 넘겨 10여 년 전의 역사가 담긴 곳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