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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86화 (86/488)
  • 86화

    *

    “안 됩니다, 영애!”

    “괜찮아요, 부인. 전 정말 괜찮습니다.”

    “영애가 가시면 안 됩니다. 후작님이 반드시 영애를 지키라고……,”

    “하지만 제가 나가지 않으면 후작님과 부인께서 위험하시잖아요.”

    “…….”

    “홑몸도 아니신데.”

    물끄러미 시트리나의 배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배 속엔 사랑스러운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릴리는 가만히 손을 뻗어 부인의 배를 만졌다. 일순 작은 태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 계집을 보내지 않으면 러셀 후작가를 파멸하겠다! 파멸하겠다!

    나무를 타고 터져 나오는 딱따구리의 전언이 귀를 때렸다. 그 딱따구리조차 동족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이용당하고 있었다. 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을 울리는 시끄러운 전언에, 위층에서 잠을 자던 루시우스의 두 딸도 잠옷 차림으로 지하실까지 뛰어 내려와 있었다. 그들은 릴리를 불안하게 쳐다봤다.

    “괜찮아요, 영애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하, 하지만…….”

    “부인과 함께 여기 있으면 안전하답니다. 약속해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릴리의 다정한 설득에 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재빨리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 릴리는 자신만 없었다면 평화로웠을 가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씩씩하게 지하실을 올라갔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택을 둘러싸고 온갖 총과 화살, 심지어 포까지 대령해 있었다. 황제는 정말로 자신이 나오지 않으면 이들을 몰살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나마 집 안을 샅샅이 뒤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나.

    아니. 황제는 그저 내게 죄책감을 씌워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말없이 그들을 따라 손에 밧줄이 묶인 채 제도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고작 이틀 만에 제도에 도착했다. 꽤 멀다고 생각했는데, 마차를 타니 생각보다 가까웠다. 채찍에 맞으며 울부짖는 말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그 어느 이종족 하나 행복한 개체가 없구나. 유달리 청명한 하늘을 응시하며 오랜만에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황궁.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에 내가 세 번이나 오게 되었구나.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 내며 황제가 있는 알현실까지 끌려왔다.

    릴리는 손목이 묶인 채 알현실을 뚜벅뚜벅 걸었다. 저 멀리 끝에 앉아 있는 황제가 보였다. 10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남자였다. 조금 성숙해진 것 외에는 여전히 포악하고 잔인한 남자.

    “그래. 네 발로 걸어와야지.”

    “…….”

    “폐를 끼치긴 싫었던 모양이구나?”

    릴리는 시선을 돌려 옆에 서 있는 루시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미 여기저기 피가 터진 얼굴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탄식을 참았다.

    그는 자신을 데리고 완전히 도망친 것도, 완전히 숨긴 것도 아니었다. 그건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소중한 것들이 있었으니까. 루시우스 러셀은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황명을 완전히 어길 수 없었고, 겨우 눈속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늑대들의 영지가 아니라, 뒤늦게 자신이 숨어 있던 곳으로 와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그에게 감사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능력 선에서 그녀를 충분히 보호해 주었다.

    “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암컷이더군.”

    “…….”

    “이름이 릴리, 라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내가 하사한 ‘이브’란 이름은 기어코 받지 않았고.”

    “폐하께서 거두어 가신 이름입니다. 또한 제 이름이 아니죠.”

    “말대꾸하지 마라.”

    그가 귀찮은 건지 고갯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채찍을 들고 그녀를 후려쳤다. 고통을 참지 못한 릴리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쓰러져 버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루시우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릴리는 마지막으로 그를 보기 위해 울음을 삼키려 노력했다.

    “저 계집을 안으로 들여라.”

    “예, 폐하.”

    “폐하!”

    기사 둘에게 양팔이 붙들려 끌려가는 릴리의 앞을 루시우스가 막았다. 그는 허리에서 검을 꺼내 바닥에 그 검을 찍었다. 그러곤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폐하께 제 충성을 맹세할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십시오.”

    “후작의 충성은 이미 충분히 알았다. 저것을 숨겨 준 이후부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

    “제 가문은 이제야 비로소 바로 섰습니다. 이렇게 멸문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셋이나 있습니다. 빛도 못 보고 죽을 순 없습니다. 한순간의 판단이 흐려져 폐하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자애로우신 폐하. 신을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폐하께 평생을 바치겠나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나실 황족께도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

    “폐하……. 이벨리아가…… 죽은 제 여동생이 너무 가엽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그 아이를 생각하시면서 어찌 그런…… 폐하, 부디…… 부디 저를 용서하시고 이벨리아를 생각해 주십시오!”

    그가 흐느꼈다. 루시우스가 울부짖으며 바닥에 머리를 쿵쿵 내리찧자 그의 얼굴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는 가만히 그의 하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눈썹을 위로 틀며 혀를 찼다. 루시우스의 얼굴 위로 이벨리아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건 남매가 똑같아선.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누그러진 낯으로 잔을 치웠다.

    “뭘 어떻게 하겠단 것이냐.”

    “폐하의 존귀하신 옥체에 더러운 이종족의 피를 묻힐 순 없습니다. 신이 직접 이 검으로 저것의 목을 베겠습니다. 부디 허하여 주십시오!”

    루시우스가 손가락으로 릴리를 가리켰다. 릴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금 엉터리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나의 안전과 나의 모든 것을 지켜 주기 위해. 약속한 대로, 나를 지켜 주고 있어.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흥, 끝까지 그딴 소리구만.”

    “폐하.”

    “되었다. 짐도 흥미가 떨어졌다. 저딴 더러운 계집, 닿아 봤자 내 손만 더러워질 터. 후작이 알아서 죽여라.”

    결국 변덕이 심한 알렉산드로가 흥미를 잃고 완전히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릴리는 기사들에게 붙들려 황궁 밖으로 끌려갔다. 그녀의 뒤를 루시우스가 따랐다.

    릴리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다. 온몸이 불에 탈 것 같은 열감도 끝난다.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아져. 이 죄책감도 다 사라져.

    “멈춰라. 거기서 처형하겠다.”

    루시우스의 명령에 기사들이 릴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돌아섰다. 루시우스는 커다란 검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슬픔을 참아 내려는 루시우스와 이제야 웃음이 번진 릴리의 눈이 서로 닿았다.

    “감사합니다, 경…….”

    “…….”

    “당신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영애…….”

    내 동생도 지켜 주지 못했는데. 그 아이를 닮은 영애마저 지키지 못했다. 루시우스는 짧게 탄식했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는 노아와 릴리 중 릴리를 택했다. 그리고 결국 노아와 릴리 모두를 잃었다.

    그렇다면 그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가는 길만이라도 편하게 해 주어야 한다. 단 한 번으로…….

    릴리는 마지막으로 눈을 크게 떠 루시우스 러셀을 가슴에 새겼다.

    “죄책감을 갖지 마세요, 후작님.”

    “…….”

    “당신은 저를 세 번이나 살려 준 셈이니까.”

    “…….”

    “이젠 편해지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친애하는 러셀 경께. 당신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에 눈을 감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신께선 제 소원을 들어주셨군요. 당신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올곧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변함없이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 친절한 손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하겠죠. 부디 죄책감은 갖지 마세요. 당신과 나는 모두 피해자일 뿐입니다. 당신은 잘못이 없어요. 이전에 당신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요.

    저는 미련이 없습니다. 이제 행복해지고 싶어요. 이제 그만 편안해지고 싶습니다. 다만 아쉬운 건……. 당신처럼 죽은 여동생을 그리워할 우리 오빠와 아버님 생각뿐이랄까요. 오빠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게 가장 아쉽네요.

    하지만 진심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좀 편해질 수 있겠어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두려움에 영지 안에서만 살았습니다. 황태자의 눈에 띌까, 혹 당신을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릴까. 그렇게 영지 속에 숨어 살았습니다. 자유로운 독수리인데도요. 그러니 이젠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모든 굴레와 억압을 넘어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당신께.

    모든 게 감사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인사했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루시우스는 순식간에 검을 내리꽂았다.

    그렇게 모든 게 끝이 났다.

    “후작님. 시신은 어떻게……,”

    “불에 태워라.”

    “네?”

    “형체도 남지 못하게. 재도 남기지 않도록 전부 불태워서 사라지게 해라.”

    죽어서 만큼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그렇게. 돌아서는 루시우스의 눈엔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외전. 친애하는 당신께> 마침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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