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85화 (85/488)

85화

처형 장소도 아닌 황궁으로 향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벨리아 러셀.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 평이 자자했고, 어려서부터 성정이 따뜻했던 후작 영애. 그리고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의 황후가 되었을 영애였다.

루시우스의 죽은 여동생. 그녀의 이름이 이벨리아였다. 황태자가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워하는 사람, 이브. 황제는 그 영애를 잊지 못해, 그녀를 닮은 자신을 황궁으로 부르려는 거겠지. 10년 전 그날처럼.

끔찍하다. 차라리 당신의 검으로 나를 찔러 주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10년 전에 끌려가나, 지금 끌려가나. 폐하의 유희거리가 되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영애. 무슨……,”

“무려 10년을 기다렸습니다, 10년을요.”

“…….”

“당신을 너무 만나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니까. 참았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만날 수가 있나요. 10년 전엔 황태자에게 끌려가려던 저를 구해 주신 분이…… 어떻게 지금은 저를 넘겨 버릴 수가 있어요. 아무리 인간은 변한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요. 그녀의 흐느낌이 너무 슬퍼서 곳곳에 있던 나무들마저 혀를 차며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다.

루시우스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릴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도 당신을 볼 수 있어서 설레는 제 자신이 한심하고 역겹습니다.”

“…….”

“좋아해요, 루스 경. 당신을 정말 많이 좋아해요.”

어린아이가 울 듯,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음을 토해 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루시우스는 입술을 깨물며 단번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품에서 단검을 꺼내 손목을 묶은 밧줄을 한 번에 끊어 버렸다.

“잘 들으십시오, 영애.”

“…….”

“저는 영애를 폐하께 보내지 않을 겁니다.”

“무, 무슨……,”

“공작님은 제게 은사님이십니다. 또 다른 아버지십니다.”

“…….”

“그리고 영애는 제 소중한 여동생을 닮았습니다.”

그의 눈에 그제야 다정함이 번져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겠지.

“걱정 마십시오, 영애. 당신을 어떻게든 도망치게 해 드릴 테니.”

“하지만……!”

“그러려고 당신을 찾은 겁니다.”

“…….”

“영애의 마음은 받을 수 없지만, 당신만큼은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시우스는 릴리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아픔을 참아 내며 들리는 음성을 따라 몸을 세웠다. 아직도 쇄골 부근이 뜨끈하고 욱신거렸다. 억지로 마취에서 깨어나려니 온몸에 힘이 풀린다. 릴리가 신음을 토하며 덜덜거리는 손을 짚고 완전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익숙한 손이 다가와 잡아 주었다.

“아프셔도 지금은 일어나셔야 합니다.”

“괘, 괜찮습니다…….”

무작정 그가 이끄는 대로 허름한 천막으로 들어와 차가운 테이블 위에 몸을 맡겼다. 아무도 모르게 들어온 후작가의 주치의가 설명할 틈도 없이 그녀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러곤 메스를 들어 그녀의 쇄골 부근을 갈랐다.

제국은 출생신고를 하는 게 필수였으며, 그때 여자아이와 암컷 새끼들은 쇄골 쪽을 그어 그 안에 인식표를 심었다. 과거엔 보호를 하겠다는 명목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악습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악습이 오늘의 전쟁 또한 가능케 만들었다. 추적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시우스는 제일 먼저 릴리의 인식표를 제거하기 위해 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주치의를 불렀다.

밖은 온통 난리였다. 끔찍할 정도의 총성과 고함 소리, 온갖 이종족의 울음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그 속에 드물게 섞여 있는 늑대의 울음소리도 그의 귀를 괴롭혔다.

‘루스, 축하한다. 네가 나보다 먼저 작위를 승계할 줄이야.’

그의 눈앞에 선하게 웃는 노아의 얼굴이 그려졌다.

루시우스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했다. 막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아와 릴리를 저울에 두고 무게를 재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릴리였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빼닮아 늘 안쓰러웠던 그 영애. 존경하는 은사의 하나뿐인 딸.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노아의 영지는 벌써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고 그는 분개하겠지. 하필 이럴 때에 제 1기사단이 원정을 나가, 아무것도 막지 못했음을 후회할 것이다. 영지로 돌아와 소중한 개체들을 잃고 어머니를 잃은 것에 좌절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나의 수하들 일부가 그곳에 있었음에 분노하겠지.

상념을 지우고 천막을 들춰 밖의 상황을 지켜보던 루시우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었다. 천막 밖에는 러셀가의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말씀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마님께서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리암. 영애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영애를 반드시 숨기도록.”

“주인님께선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저는…… 걱정입니다.”

루시우스는 릴리의 손을 놓았다.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릴리에게 건넸다.

“영애. 집사를 따라가십시오. 그가 당신을 숨겨 줄 겁니다.”

“경께서는요? 경께선 어디를 가시려고……,”

“저는 폐하를 알현해야 합니다.”

“하,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폐하께서 영애를 데려오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건 부하들을 따돌리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영애의 인식표를 다른 시체에 심겠습니다. 그걸로 대신하면 됩니다. 기회를 봐서 공작님이나 소공작과 연락할 테니 그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루시우스는 서둘러 릴리와 집사를 떠밀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우스는 그 자리에 잠잠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집사와 함께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험준하고 가파른 곳을 지나며 릴리는 고통을 참아 냈다. 옷이 붉게 젖어 가는 걸 보아 인식표를 제거한 곳에서 피가 터진 모양이었다. 정신력으로 버티며 그녀는 어떻게든 집사를 따라 달렸다.

살아야 한다. 그분께서 목숨을 걸고 날 지키셨으니까…… 반드시 살아야만 해.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 냈다.

“세상에, 영애!”

쉴 새 없이 꼬박 하루를 움직였다.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포기하려던 차에, 작은 저택이 그녀의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초조하게 움직이던 러셀 후작 부인이 집사와 릴리를 발견하곤 경악에 찬 목소리와 함께 뛰어왔다. 부인은 쓰러지려는 릴리를 부축하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손등을 얹었다.

“불덩이예요. 영애! 괜찮나요?!”

“괘, 괜찮습니다…….”

시트리나 러셀, 그의 사랑스러운 부인이었다. 릴리는 오랜만에 만난 후작 부인과 인사하며 그녀의 부축을 받아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영지가 제도에서 멀리 벗어난 이곳이라 천만다행이었다. 해안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근 이틀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트리나는 아무도 모르게 지하 창고 문을 열었다. 그러곤 집사와 함께 릴리를 부축해 안으로 인도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창고 안은 안락하고 깨끗했다. 후작 부인은 홑몸도 아니면서 마련된 침대의 시트를 직접 정리하며 릴리를 서둘러 그 위에 눕혔다.

“고, 고맙습니다, 부인.”

“그런 말씀 마세요. 제게 영애는 소중한 분이신걸요.”

그녀의 다정한 말은 자신에게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처음 릴리가 후작의 영지로 초대받았을 때도 동기처럼 아낌없이 대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벨리아를 꼭 닮은 릴리를 가족처럼 소중히 배려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릴리는 억지로 웃으며 침대에 누워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 그녀는 지금 모든 게 고통스러웠다. 억지로 몸을 가르고 인식표를 뜯어낸 탓인지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원인 모를 고통이 쇄골에서 천천히 뻗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몸의 아픔도, 마음의 상처도. 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동족은 외면하고 혼자만 살아남은 지금의 이 처지도……. 그냥 이 모든 게 고통이었다.

*

“폐하. 말씀하신 대로 충분한 세포 수를 얻었습니다.”

연구원장이 뛸 듯이 기뻐하며 황제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알렉산드로가 황위에 오른 뒤로 전폭적인 재정과 지원을 받아, 꿈에 그리던 연구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잠 못 이룰 정도로 기뻐했다.

알렉산드로는 그들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대충 손을 휘저었다. 나가 보라. 그의 명령대로 연구원 소속인들이 전부 물러났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됐다. 짐이 곤하니 나중에 찾겠다 전하라.”

“예, 폐하.”

또 쓸데없는 참견을 하러 온 게지. 혀를 찼다.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애 하나도 갖지 못하면서, 원. 불임은 아니라는데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이유를 통 모르겠다.

흥,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게 틀림없지. 알렉산드로는 고개를 흔들었다. 황후는 더 이상 떠올리기도 싫었다.

그런데 그는 그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

“독수리의 영지는 누가 습격했는가?”

“예, 폐하. 제 2기사단이 맡기로 하였습니다.”

“2기사단의 단장이 누구였더라.”

“러셀 후작입니다, 폐하.”

“후작을 황궁으로 불러라.”

그래, 그 계집이 있었지. 그의 얼굴에 기분 나쁜 웃음이 번졌다.

이틀 만에 루시우스는 황명을 따라 입궁했다. 그는 최악의 경우, 이 상황이 벌어질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주치의를 시켜 얼굴이 뭉개진 시체에 릴리의 인식표를 심어 두기까지 했다. 황제가 혹 릴리를 찾을 수도 있단 생각에…….

실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황제는 릴리를 찾았다. 그는 10년 전을 기점으로 이벨리아를 똑 닮은 릴리를 잊지 못하고 집착했다. 즉위 전에도 숱하게 그녀를 궁 안으로 들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루시우스가 나서서 반대했다. 이전엔 러셀 가문이 그럭저럭 이름만 있을 뿐이었지만, 10년 전에 있었던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우며 이제는 명문가로 바로 섰다. 그의 반대는 많은 귀족들의 반대를 불러왔다. 결국 알렉산드로는 릴리를 그 이후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른프리드 공작과 르네조차 모르는 사실이었다.

루시우스가 제복을 정돈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알현실로 들어섰다. 알렉산드로는 보좌에 앉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록 어릴 때부터 이종족을 혐오하고 차별했지만, 한때는 인간들에겐 성군이라 불릴 만큼 영민했던 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 지금은 폭군일 뿐이다. 루시우스마저 때때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미쳐 가고 있다는 소문에.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예, 폐하. 신을 부르셨다 하여 입궁했습니다.”

“후작이 독수리의 영지를 토벌하였다고?”

“예, 폐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공작의 딸도 그대가 데려왔겠군?”

“예, 폐하.”

그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후작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그 계집을 궁으로 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지금도 반대하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의 명령대로 독수리의 암컷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

“그렇다고 한들 말이야. 지금도 반대하느냐 물은 것이다.”

루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 대체 당신은……. 그는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깨물어 속으로 침음했다.

자신이 릴리를 숨기지 않았더라면 정말……. 동시에 죽은 제 동생에게도 못할 짓이 될 뻔했다. 한숨 끝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고귀하신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

“황족은 이종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피가 아닙니까. 보존하십시오, 폐하.”

후작은 이전부터 입바른 소리만 하는군. 그가 혀를 찼다. 루시우스는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었다.

“하지만 그 낯짝은 다시 보고 싶구나. 사체를 들고 오라.”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루시우스는 기사단을 시켜 준비해 둔 가짜 시체를 들것에 실어 가져왔다. 줄곧 보좌에 앉아 있던 알렉산드로가 몸을 일으켜 비로드 융단을 걸어왔다. 그는 하얀 천이 덮인 것을 단숨에 들춰 올렸다. 그러곤 이맛살을 구겼다.

“얼굴이 왜 이 모양이지?”

“명령을 따르지 않은 단원 중 하나가 시체들을 한데 모아 불태웠습니다.”

“…….”

“…….”

한참이나 사체를 뒤적거리던 알렉산드로는 시큰둥한 낯으로 시체를 걷어찼다. 루시우스의 손짓에 기사단이 달려들어 시체를 다시 천으로 덮고 황급히 알현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잠깐. 짐이 다시 확인하겠다.”

덮인 천을 들춰낸 알렉산드로는 엉망이 된 사체의 목 부근을 손으로 쓸었다. 미미하게 다른 감촉에 흐음, 소리를 내던 그는 그렇게 한참을 주시하기만 했다. 이내 고갯짓으로 시체를 치운 황제는 다시 보좌에 기대앉았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루시우스를 바라보았다.

“후작의 아이가 총 몇이더라.”

“딸이 둘 있고, 아이 하나는 뱃속에 있습니다.”

“금실이 좋구만. 딸들과 꽤 나이 차가 나는 막내가 생겼으니.”

“황공합니다, 폐하.”

“그럼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것들이겠군.”

“…….”

“딱따구리를 하나 잡아 와라.”

황제의 명령에 루시우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그것을 시켜 러셀 후작가에 전해라.”

“…….”

“공녀가 나오지 않는다면 후작가를 전부 짓밟겠다고.”

“폐하!”

“후작 부인의 뱃가죽을 갈라 태아를 빼내겠다고.”

아, 안 돼……! 속으로 비명을 지른 루시우스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황제를 믿은 건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파고들 줄은 몰랐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친구의 가문까지 협박하며 릴리에게 집착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겨우 눈속임 하나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알렉산드로는 한때 절친한 지기였던 자의 절망 어린 표정을 보며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짐을 우롱한 죄는 톡톡히 갚아야 할 것이다. 그가 여유롭게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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