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르네는 전혀 몰랐던 건지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무슨 뜻인지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버지가 보시기엔 가장 좋은 신랑감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지.
실제로 스티븐은 그럴 만한 남자였다. 친구라는 타이틀을 제외하고도 그는 훌륭한 충신이었으니까. 자신이 공작 위를 물려받아 새롭게 영지를 다스린다면 그 옆을 보좌해 줄 가장 좋은 독수리는 당연히 스티븐일 것이다.
“하지만 넌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나 보군.”
“……응.”
아마도 그 남자, 루시우스 러셀이 마음에 들었던 건가. 그때 연회장에서 릴리가 보인 반응으로 보아 그럴 것 같았다만. 아버지는 모르시니 스티븐과의 혼사를 추진하신 모양이고. 르네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다가 동생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걱정 마. 아버님께 말씀드리면 네 의견을 존중해 주실 테니까.”
“하지만……,”
“릴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너야.”
“…….”
“겨우 이야기 오간 걸로 스티븐의 가문과 척을 지지는 않을 테니 그런 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빠.”
“독수리는 자유로워야지. 억지로 살면 안 돼.”
르네가 웃으며 동생의 손을 한 번 잡았다가 놓아 주었다. 기다려, 릴리. 아버님께 다녀올게. 행동력 빠르게 르네는 동생에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릴리는 붉어진 얼굴로 이불 끝을 꾹 쥐었다.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 어쩌면 조금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발로 시트를 팡팡 내리쳤다.
하지만 그 설렘은 얼마 가지 못했다.
*
식사 자리는 정적만 흘렀다. 음식을 내오는 시종들은 하나같이 상석에 앉은 아른프리드 공작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공작은 물론이고 소공작마저 표정이 어둡자, 공작가 전체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개중 최악은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채 억지로 웃고 있는 아가씨였다.
“우와. 맛있겠어요. 오랜만에 먹으려니 너무 좋은데요, 아버님.”
“그래. ……아가.”
“오빠도 얼른 먹어. 맛있다, 정말.”
르네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며 잔을 먼저 들었다. 제 맞은편에 앉아 물기 묻은 눈동자로 음식을 살펴보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렇게 된 게 전부 제 탓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아버님을 설득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오― 릴리.’
‘아버님. 왜 그러세요?’
‘…….’
르네의 이야기를 들은 공작은 빠르게 루시우스와의 만남을 주선하려 했지만, 며칠 만에 돌아온 답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혼인을 했다는구나.’
‘……네?’
‘몇 달 전에 식을 올리지 않고 부인을 두었다더구나. 러셀 후작가는 가문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아서 식을 올릴 형편도 되지 못했단다. 그래서 내가 몰랐던 것 같다, 아가.’
‘…….’
‘릴리. 네가 원치 않는다면 스티븐과의 혼담은 없던 걸로 하자꾸나. 더 좋은 자를 찾을 수도 있을 테고. 그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혼담에 불만이 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릴리는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공작과 르네도 속이 탈 뿐이었다.
루시우스와 혼례를 올린 여자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비인 러셀 후작이 강하게 반대를 했고, 식도 올리지 못한 채 혼인 관계만 유지하게 되었단다. 그러던 중 루시우스의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되면서 최근에야 러셀 후작도 아들의 혼인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답신이었다.
러셀 후작은 차라리 공작의 딸인 릴리와의 혼사가 더 나았을 거라며 투덜거리는 편지로 마무리를 지었다.
“와. 정말 맛있어요. 주방장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나 봐요.”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오라고 했단다. 체하니까 천천히 먹도록 해라.”
“네. 걱정 마세요, 아버님.”
애써 밝은 척하는 모습이 더 보기 힘들었다. 르네는 말없이 동생의 스테이크를 가져와 잘라 주었다.
노아에게 먼저 물어볼 것을. 자신을 탓해 봤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모든 게 제 탓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그날, 내가 황궁 앞으로 데리러 갔더라면. 그랬다면 릴리가 그 남자와 만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앓는 동생을 바라보는 게 그에겐 고역이었다.
결국 릴리는 그를 향한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
아아― 접기로 한 마음을 온전히 정리하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10년을 기다렸다. 내려놓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절감하며 무려 10년이나 가슴앓이를 했다. 이 감정이 제발 언젠가는 사라지길 바라며, 10년이나 기다렸다.
“영애를 모시러 왔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나이가 든 그의 모습은 변함없이 올곧고 아름다웠다. 자신은 여전히 데뷔탕트를 마친 그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루시우스는 시간이 흘러간 만큼 중년이 되어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는 게 모두에게 이롭습니다, 영애.”
바닥엔 갖가지 총을 맞고 쓰러진 독수리들이 숱하게 많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워 준 르네의 인간 친구들도 눈을 감은 채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녀는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루시우스! 감히 네놈이……!”
바닥에 쓰러진 거대한 독수리가 고함을 쳤지만 기사들의 발길질에 공작은 기절하고 말았다. 릴리는 창백한 얼굴로 손을 벌벌 떨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피 웅덩이가 출렁이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릴리의 하얀 뺨 위에도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피가 잔뜩 튀었다.
10년을 기다렸다. 감히 눈에 담을 수 없는 그분을 떠올리며 10년이나…… 기다렸는데…….
이건 꿈일까.
“영애. 따라오십시오.”
왜 이런 식인 건가요, 경……. 릴리의 맑은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 눈앞에 굴러다니는 시종들의 머리를 보며 릴리는 바닥에 엎드려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하게 당해 버렸다. 보호석을 들고 온 기사단들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의 명령으로 암컷을 숙청하겠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해 들은 건 아버지였다. 그는 빠르게 황궁을 빠져나와 릴리를 섬으로 피신시켰다. 하지만 이 섬에 기사단이 이미 숨어 있을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바다에 빠져 죽지 않는 이상, 인간의 손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음을 그들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루시우스의 눈짓에 따라 기사 중 하나가 적갈색 독수리의 목을 밧줄로 졸랐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비명 소리 하나 내뱉지 않으며, 르네는 여동생을 위해 참았다. 조금이라도 힘들어한다면 저 아이의 판단력이 흐려져 분명 저자를 따라가고 말 것이다.
그는 이를 갈며 아픔을 참아 냈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릴리의 상실이다.
“가겠습니다.”
“아, 안 돼!”
“안 된다!”
“안 돼!!”
찢어질 듯 소리치는 독수리들을 뒤로하고 릴리가 힘없이 일어섰다. 그녀는 제 발 아래 도로록 굴러와 툭 멈춰 선 스티븐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10년간 그녀를 꾸준히 기다려 주며 외롭지 않게 지켜 주었던 스티븐마저 목숨을 잃었다.
오빠와 함께 새로운 영지를 꾸려 갈 독수리들이, 전부 죽었다. 릴리는 흐린 눈으로 쓰러진 독수리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루시우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가요, 경.”
“안 돼!”
빽빽 소리를 지르는 독수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기사단을 루시우스가 제지했다. 단장의 명령에 그들은 떨떠름하게 검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선박에 오를 때까지도 릴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고통에 몸서리를 치는 동족을 보는 게 고역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죽었으면 될 일이었는데……. 쓸데없이 많은 목숨이 희생당했구나. 그런 생각만 들었다.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루시우스의 손에 힘이 조금 더해졌다. 릴리는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올곧게 정면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피했다. 10년이나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을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될 줄이야. 자신의 인생이 참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잘 지내셨나요, 경.”
“…….”
“저는…… 잘 못 지냈습니다.”
바람을 타고 배가 움직였다. 릴리는 그의 손을 놓고 난간을 붙잡으며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불타 버린 숲 사이로 절규하는 아버지와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들도 눈에 들어왔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죄책감으로 물들어,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그러니까 이게 꿈이었으면.
“제가 경을 사모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
그는 대답이 없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며 그녀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릴리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피 묻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짝사랑에 그친 사랑 정도라면 이렇게 비극적이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손을 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도 그녀가 사랑하는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존재마저 자신의 짝사랑이었다.
“신께서는 늘 인간을 사랑하시죠.”
“…….”
“우리도 신을 사랑하는데……. 우리가 더 신을 사랑하는데도 말이에요.”
대륙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점처럼 작았던 제국이 점차 커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지 않네요.”
“…….”
“경의 동생분께선 정말로 저와 닮았더군요.”
어느 날 우연히 러셀 후작가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루시우스가 가문을 잇게 되었고 그의 부인이 후작 부인이 되었을 때, 그가 아버지를 비롯해 자신을 초대했다. 영지에 있으라는 공작의 말을 따르지 않고 릴리는 모두와 함께 후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 저택에서 커다란 초상화 하나를 발견했다.
머리와 눈동자 색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말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말에 의미 부여를 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의 말은 순수한 진실이었다. 단순히 자신이 루시우스의 여동생과 닮았기 때문에 연회장에서 그와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떤 작은 티끌조차도 없었다.
늘 매섭고 사납게 날을 세우던 바다가 유독 잔잔하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파도 속에서 꿈틀거리는 미지의 생물들도 루시우스의 선박을 피해 갔다. 그럼에도 무장한 기사단이 검과 총을 쥐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을 보며, 릴리는 자신이 저 바닷속 미지의 생물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을 붙여 보았다.
그건 꿈에서나 가능하겠지.
이윽고 배가 대륙에 도착했다. 루시우스는 릴리의 팔을 밧줄로 묶으며 그녀와 함께 배에서 내렸다.
“영애는 내가 모시고 황궁으로 가겠다. 너희는 집합 장소로 먼저 가거라.”
“예? 처형 장소가 아니고요?”
“폐하의 명령이다. 공작의 딸은 황궁으로 데려오라는.”
알렉산드로.
릴리는 10년 전에 만났던 황태자를 떠올렸다. 그 잔악무도한 자가 황위에 오른 뒤로 이종족의 대우는 바닥으로 처박혔다. 선대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황제도 연구와 실험에 미쳐 있었고, 그는 그중에서도 유달리 머리가 좋은 인간이었다.
알렉산드로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계획하던 것들을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희생양은 이종족들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이 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최종 목적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신들의 목숨이 황제에겐 한낱 먼지만도 못하다는 것뿐이었다.
루시우스는 그녀와 함께 제도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릴리는 땅을 밟은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황제가 자신을 황궁으로 부른 이유. 단 하나일 것이다.
“이럴 거면 그때 왜 저를 구해 주셨습니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에 루시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뒤를 돌았다. 릴리의 붉은 눈동자에서 한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를 더 괴롭게 하십니까?”
“영애.”
“그때는 구해 주셨으면서, 왜 지금은 저를 폐하께 보내시는 겁니까?”
왜 저를 더 아프게 하세요? 왜,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