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자신을 향해 다른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틀림없는 황태자였다. 며칠 전, 데뷔탕트에서 황태자비로 예정된 영애와 춤을 추었던 그 남자였다. 릴리는 마주쳐서는 안 되는 황족을 만났다는 생각에 벌벌 떨며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화, 화, 황태자 전하를 뵙니다…….”
어찌나 떨렸으면 말까지 더듬었다. 손끝이 달달 떨려 왔다. 함부로 돌아다녔다고 혼이 나면 어떡하지? 소문으로는 황태자가 이종족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어도 큰일이었고,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함부로 황궁에 드나들었다는 트집을 잡으면 릴리는 할 말이 없어진다.
이쪽은 잃을 게 많았다. 공작인 아버지와 이제 곧 승계를 하게 될 오빠까지. 데뷔탕트에서 보았던 그 무심한 얼굴을 떠올리며 릴리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렸다.
“일어나라.”
“예, 예…….”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에서 벗어나려 했다. 마치 품평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불편하고 괴로운 자리였다.
“독수리냐?”
“네. 맞습니다, 전하.”
“이종족이 어찌 나의 궁 근처를 배회하는고? 그것도 아무런 작위 따위 갖지 못할 계집이.”
“…….”
“고개를 들라.”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내키지 않았다. 릴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황태자의 손이 그녀에게 뻗어 나왔다. 깜짝 놀란 릴리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황태자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전하.”
“루시우스. 감히 네가 내 몸에 손을 댔느냐?”
“아른프리드 공작의 직계입니다. 잘못하면 공작과 척을 지실 수 있으십니다.”
“누가 보면 내가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군. 놔라, 루스. 더럽구나.”
“예, 전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루시우스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손수건으로 루시우스의 손이 닿은 곳을 벅벅 닦아 냈다. 릴리는 갑작스레 나타난 루시우스에 대한 반가움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모른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 힘으로도 이길 수 없는 사람. 그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알렉산드로, 그러니까 황태자는 제 앞에서 사색이 된 채 벌벌 떠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에 거슬릴 정도로 불에 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 생각하면 할수록 역겨운 이종족 특유의 외형이었다. 영락없는 독수리의 모습.
“네 이름이 무엇이냐.”
“릴리입니다, 전하.”
“릴리? 이름이랑 썩 어울리지 않는 꼴이구나.”
“…….”
“네겐 새 이름을 지어 주마.”
“네?”
“이브라고 부르지.”
“전하!”
소리를 친 건 루시우스였다.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감히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경이 진정 미쳤나? 알렉산드로는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다. 루시우스는 손을 덜덜 떨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두어 주십시오, 전하.”
“왜? 네가 저 계집의 무엇이관데 나서는 것이냐.”
“전하. 그 이름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걱정 마라.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저것은 이종족이고 이벨리아는 인간이니.”
“…….”
“그저 껍데기만 닮았을 뿐이지.”
그는 다시 한 번 릴리를 훑어보았다. 마치 온몸 구석구석을 훔쳐보는 것처럼 기분 나쁜 눈초리였다. 릴리는 이제 두렵다 못해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이브.”
“…….”
“대답을 안 하겠단 것이냐?”
“저, 전하. 어찌하여 제게……,”
“네겐 황자궁의 출입을 허가할 터이니 이틀 내로 또 들어오거라.”
그 순간 온몸이 바닥까지 처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게 아니었다. 영리하고 똑똑한 릴리는 알렉산드로의 저의를 금방 파악했다. 그는 자신을……. 절망과 역겨움, 그리고 두려움에 결국 맺혀 있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전하. 말씀하신 토벌을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의 앞을 살짝 가로막으며, 루시우스가 굳은 목소리를 뱉었다.
“호오― 그렇게 징글징글 말을 안 듣던 경이 어쩐 일로? 학살은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른프리드 공작님은 제게 은사님이고 또 다른 의미의 아버지십니다.”
“그래서. 겨우 저것 때문에 자신의 신념까지 꺾겠다?”
“이벨리아는.”
“…….”
“마지막 그 순간까지 전하만 생각했습니다.”
이벨리아는 누구일까. 릴리는 알지 못하는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을 바라만 보며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루시우스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주먹을 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는 동안 그 아이의 부탁 한 번 들어준 적이 없으니, 저는 지금이라도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루스.”
“전하. 안 됩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
“폐하께서 아시면 분명 노하실 겁니다. 공작뿐만 아니라 이종족들 전부와 척을 지실 수도 있습니다.”
“…….”
“아직 황위에 오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부러 귀족들의 반발을 사실 이유가 없으시잖습니까, 전하.”
루시우스의 설득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알렉산드로가 매서운 눈으로 릴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릴리가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자, 알렉산드로는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농담 한 번에 죽은 여자의 이름까지 들먹거리지 마라.”
“…….”
“하긴. 감히 저것에게 이브라는 이름을 내리기엔 과하지.”
그러곤 자신의 궁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고요해진 공간 속에 릴리가 막혀 있던 숨을 토해 내듯 내쉬었고, 루시우스도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릴리는 차올랐던 눈물을 닦아 내더니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걸 놓치지 않은 루시우스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 넘어지지 않게 세워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경…….”
“괜찮으십니까? 많이 놀라셨습니까, 영애?”
“아, 아니에요. 황태자 전하는 처음 뵙는 거라…… 당황했을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제복 겉옷을 벗어 릴리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작은 스침에도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쓰렸다.
“다시는 황궁에 입궁하지 마십시오.”
“네……?”
“전하께선 두 번은 봐주지 않으십니다.”
“…….”
“저는 전하의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형제 같은 자라, 이번에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다음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뜻을 분명히 이해했다. 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떨구었다.
“괜찮습니다, 영애.”
“…….”
“영애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의 위로에 릴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기 싫었지만 눈물이 달리는 것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지금 가장 필요했던 위로였다. 만약 루시우스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릴리는 영지로 돌아가서도 제 자신을 탓하며 덜덜 떨었을 것이다. 피해를 받은 것은 이쪽인데도.
“그저. 때로는 불합리한 권력을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
“그러니 절대로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영애. 영애는 정당하게 공작님을 따라 들어오신 것뿐이니 그 누구도 영애께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러셀 경.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영애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테니.”
그러나 루시우스의 마지막 말을, 릴리가 다른 의미로 깨닫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었다.
*
“예? 곡기를 끊고 있다고요?”
“그래. 걱정이구나. 안 그래도 허약한 몸에, 저러다 무슨 병이라도 걸리는 건 아닐지.”
“제가 잘 말해 보겠습니다.”
원정을 끝내고 오랜만에 영지로 돌아온 르네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왔다. 자신이 없는 새에 별일이 다 있었던 모양이다. 릴리가 곡기를 끊으며 방 안에서만 지내고 있다는 얘기는 그에게 그다지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똑똑, 황금색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릴리의 기운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르네는 방문을 열었다.
“릴리.”
“오빠. 잘 다녀왔어?”
평소라면 웃으며 달려왔을 텐데. 아버지의 말이 사실인지 릴리는 창백한 낯으로 침대에 앉아 자신을 맞아 줄 뿐이었다. 르네는 간이 의자를 끌어 침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릴리는 머리를 대충 빗으며 르네를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제 손가락만 응시했다.
황궁에서 돌아온 지 벌써 몇 주가 흘렀지만 요동치는 마음은 여전했다. 알렉산드로와 마주했을 때의 공포감과 러셀의 위로. 그 감정들이 뒤섞여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했다. 심지어 스티븐과의 혼담을 파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직 아버지께 꺼내지도 못했다.
릴리는 울적한 얼굴로 무릎을 끌어 모아 고개를 파묻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르네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릴리?”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
“아버지가 널 걱정하신다.”
그의 말이 맞다. 언제까지 아버지께 걱정만 끼칠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치도 않는 결혼을 올리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릴리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르네의 손을 잡아 내리곤 자신의 오빠를 가만히 쳐다봤다.
“스티븐하고 나. 혼담이 오간 건 알아?”
“뭐? 스티븐하고?”